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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창 김금미 “9년 걸린 ‘적벽가’ 완창…새 작품 만날 때마다 자신과 쌈박질” [인터뷰]
국립창극단 김금미 ‘적벽가’ 첫 완창
호방한 영웅 세계를 여성의 소리로…
“얼마 안남은 시간 떳떳히 예술의 길 갈 것”
국립창극단의 간판 배우이자 명창 김금미가 처음으로 ‘적벽가’ 완창에 도전한다. 2015년 처음 만난 ‘적벽가’를 완벽하게 선보이기까진 장장 9년의 시간이 걸렸다. 임세준 기자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피를 토하며 노래하는 패전국의 왕비(‘트로이의 여인들’), 전설이 된 소리 천재(‘정년이’), 존재 자체가 아우라인 맹인 노파(‘패왕별희’)….

굵직한 인기 창극엔 언제나 그가 있었다. 무대에 등장하면 안심이 되는 사람. 국립창극단을 이끄는 ‘창악부 악장’이자 중견 소리꾼인 김금미(59)에겐 아무리 진부해도 ‘믿고 보는 배우’라는 말이 안성맞춤이다. 이미 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그이지만, 아직 풀지 못한 숙제가 하나 있었다.

“명창 선생님들께서 ‘자네, 어디까지 공부했나?’고 질문할 때 ‘흥보가’ 배우고 있다고 하면 ‘공부 좀 더 하라’하고, ‘적벽가’ 배우고 있다고 하면 ‘음, 그렇군’이라며 인정을 해줘요. 그러니 소리꾼이라면 여기까지는 반드시 도달해야 하는 거죠.”

요즘 김금미는 생전 먹지 않던 ‘뇌 영양제’를 먹는다. ‘초인적 기억력’이 필요한 때라서 그렇다. 오는 13일, 드디어 그는 국립극장에서 완창 판소리 ‘적벽가’를 꺼내 놓는다. 오래 품었던 숙제를 마칠 시간이다. 최근 서울 국립극장에서 만난 김금미는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뒤, 어떻게든 해내야겠다는 생각에 머리 맑아지는 약을 먹으며 연습 중”이라고 말했다. 김금미의 완창 판소리는 2021년 ‘심청가’ 이후 2년 만이다.

소리꾼 김금미. 임세준 기자
여성이 그리는 ‘영웅 시대’ 백미…“나만의 색깔 입힌 ‘적벽가’”

“저음에서 노래를 하다가 갑자기 4도 이상 팍 뛰어버려 음정의 기폭도 넓고, 시김새나 사설은 보통 판소리와 달리 어려워요. 삼국지 유래가 사설로 들어오니 창자(唱者) 자신조차 외우는 것이 굉장히 어렵죠.”

판소리 다섯 바탕 중 하나인 ‘적벽가’는 중국 소설 ‘삼국지연의’의 내용 중 ‘적벽대전’을 중심으로 재구성한 소리다. 위·촉·오 삼국을 이끄는 조조, 유비, 손권이 천하를 얻기 위해 벌이는 지상대전. 시대를 호령한 영웅들의 이야기는 한 편의 ‘전쟁 영화’다.

‘적벽가’는 다섯 바탕 중에서도 최고 난이도의 소리이기에 계승조차 쉽지 않다. 김금미가 적벽가를 처음 만난 것은 지난 2015년. 그는 김경숙 명창에게 오랜 시간 ‘적벽가’를 배웠다. 이번 무대에서 선보일 김금미의 소리는 ‘박봉술제 적벽가’다, 그의 스승인 김경숙 명창은 박봉술 명창에게 ‘적벽가’를 전수 받았고, 애제자 김금미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냈다.

김금미가 완벽한 ‘적벽가’를 세상에 내놓기까지 걸린 시간이 장장 9년이다. 그는 “‘적벽가’ 완창 무대를 준비하며 마음이 급해졌다”고 말했다. 발음도 어렵고 기억력도 예전 같지 않아 더 늦기 전에 머릿속에 ‘적벽가’를 남겨야겠다는 조급함 때문이었다.

널뛰기 하는 소리를 오롯이 표현하는 것도 쉽지 않지만, 시대의 호걸들을 생생히 그려내는 것은 더 어려운 일이다.

“‘새타령’이라는 눈대목이 있어요. 조조가 적벽에서 패하고 쫓기는 와중에 가장 인간다운 마음을 표현하는 장면이죠. (연습할 떄) 이 대목이 그렇게 어렵더라고요.”

새타령은 일종의 ‘진혼곡’이다. 적벽화전에서 죽은 100만 대병이 원조(怨鳥)로 환생해 조조 앞에서 억울함을 토해내는 장면이다. 흉년새, 삐죽새, 꾀꼬리, 종달새 등 13마리의 새소리가 환상적으로 솟구친다. 새의 울음소리엔 죽은 넋을 향한 위로와 조조를 향한 반발과 호통, 비난 등이 담긴다. 여기에 조조의 탄식까지 이어지니 소리꾼과 관객도 한 눈 팔 새가 없다.

김금미는 “삼국지에서 조조는 살아남기 위한 간사한 인물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지만, 자기 설움을 호소하고 진심을 토로하는 모습에서 그의 인간적 면모를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소리꾼 김금미 ‘적벽가’의 백미는 여성 청자가 그리는 ‘영웅 시대’다. 남성 청자 못잖은 ‘풍부한 성량’과 진계면(시나위 성음에 가까운 소리)을 넘나드는 ‘애환의 소리’는 관전 포인트다. 임세준 기자

“1000번을 연습했는데도 시간이 지난 지금에서야 몰입이 커지더라고요. 가장 밑바닥에서 무릎 꿇고 조아리며 아주 초연하게 진실을 담아 표현한 이 대목들이 명장면이 될 거라 생각해요.”

김금미 ‘적벽가’의 백미는 여성 창자가 그리는 ‘영웅 시대’다. 남성 창자 못잖은 ‘풍부한 성량’과 진계면(시나위 성음에 가까운 소리)을 넘나드는 ‘애환의 소리’, 다채로운 연기가 더해진 진심의 울림은 무수히 많은 적벽가 중에서도 손꼽힐 역작이 되리란 기대가 높다.

“저희 스승님은 박봉술 선생님이 계신 창극단에 오셔서 ’적벽가‘를 전수 받으셨대요. 메추리가 나오는 장면은 소품을 뜯어가며 조조의 이미지를 만드셨어요. 제가 그 어른들을 어떻게 다 흉내낼 수는 없지만, 그래도 무대에서 잔뼈가 굵었으니 나만의 색깔을 묻혀 잘 해보려구요.”

‘적벽가’ 공연 시간은 보통 3시간~ 3시간 30분 정도. 하지만 김금미의 적벽가는 더 길어질 수 있다는 귀띔이다. 그는 “시간을 한정하지 않고 한 대목 한 대목 정성을 다해 부를 생각”이라며 “그날의 흐름에 따라 10~15분 정도 길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완창 판소리도, ‘적벽가’도 처음 본 관객들도 김금미의 ‘적벽가’라면 염려할 필요 없다.

“‘적벽가’는 저 스스로도 이해를 못하고 암기가 되지 않았을 때의 고통이 컸 듯 관객들이 모두 삼국지를 읽고 오는 것이 아니니 이해하기에 쉽지 않은 대목들이 있을 거예요. 게다가 완창 판소리에서 ‘한 번 지나간 단어’는 다시 돌아오지 않으니까요. 한 문장 한 문장 위엄있게, 또박또박 읊어 제 입 모양과 음색에만 집중하면 모든 드라마를 따라올 수 있을 거예요. 걱정 마세요. (웃음)”

스물다섯에 소리를 시작한 김금미는 소리를 시작하고 불과 4년 만에 국립창극단에 입단(1999)했고, 12년 만에 전주대사습놀이 명창부 부문에서 대통령상(2007)을 받았다. 임세준 기자
시작은 늦었지만…4년 만에 창극단 입단·12년 뒤 대통령상 수상

외할머니는 남도민요 ’육자배기‘ 대가인 김옥진 명창, 어머니는 한국국악협회 전 이사장인 홍성덕 명창. 대대손손 ‘판소리 명가’에서 자랐지만, 김금미는 다소 늦은 나이에 소리를 시작했다. 소리를 하기도 전, 무용에 더 소질을 보여서다. 그는 1991년 전주대사습놀이 무용 부문에서 이매방류 전통무용으로 차상을 받을 정도로 춤꾼이었다.

“다른 길을 갔지만 어머니의 소리를 들으며 늘 귀에 익혔어요. 무용을 했으니 장단은 자연스럽게 몸에 배었고요. 재미 삼아 새타령도 부르고 소리를 하면 음정이 기막히게 정확했다고 하더라고요. (웃음)”

소리꾼 중에서도 ‘흔치 않은 목소리’를 가진 딸의 재능을 알아본 어머니의 권유로 김금미는 스물다섯 살에 본격적으로 소릿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 때가 1995년이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보단 늦었지만, 스물다섯이 그리 많은 나이는 아니었다”며 “겁은 났지만 도전정신이 있었고, 겸허하고 겸손하게 받아들여 더 열심히 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김금미는 명창들의 예쁨을 받는 제자였다. 매일 아침 9시까지 스승의 집으로 가 그의 손발이 돼가며 소리를 배웠다. 그는 당시를 떠올리며 “이미 무용을 하면서 층층시하 시집살이를 한 덕에 눈치가 빠삭했다”며 “선생님께선 음악성은 둘째 치고 싸가지, 예법이 보며 예뻐라 하셨다”고 말했다.

눈대목부터 가르치며 ‘자질’을 봤던 성창순 명창은 그에게 “넌 완창을 해야겠다”며 ‘심청가’ ‘흥보가’ ‘춘향가’를 전수했다. 덕분에 ‘적벽가’를 마친 후 도전할 ‘춘향가’ 완창은 이미 모든 준비를 마친 상태다.

소리꾼 김금미. 임세준 기자

소리를 시작하고 불과 4년 만에 국립창극단에 입단(1999)했고, 12년 만에 전주대사습놀이 명창부 부문에서 대통령상(2007)을 받았다. 김금미는 ”창극단에 처음 입단했을 때는 밑천이 딸려 소리로는 게임이 안되겠다 싶어 무섭게 공부했다“며 ”소리벽만 뚫으면 나도 경쟁할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덤벼 들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지금 생각해도 창극단 입단 후 8년 만에 대통령상을 받은 건 기적이었다”고 말한다.

사실 김금미의 꿈은 가수였다. 그가 롤모델이자 멘토로 꼽는 사람은 가왕 조용필. 10대 가수상을 휩쓸던 가왕의 휘황찬란한 가창의 향연을 보며 가수를 꿈꿨던 그는 어느덧 국립창극단의 기둥이자 후배들의 롤모델이 됐다.

창극의 한계를 뛰어넘어 새 시대의 전통을 보여준” ‘장화홍련’(계모 역)은 그가 ‘가장 잊지 못하는 작품’이고, 엔딩 한 장면 뿐이었지만 소리꾼 김금미의 민낯을 드러내야 했던 ‘서편제’는 ‘가장 두려웠지만, 본연의 나로 돌아온 작품’이었다. 굵직한 작품마다 주요 배역으로 극을 이끄는 그는 다음 달 올릴 ‘만신:페이퍼 사면’에서도 또 다른 모습으로 변신한다.

정년을 앞두고 있지만, 창극 배우이자 소리꾼 김금미는 여전히 젊고 도전적이다. 그는 “국립창극단에 좋은 작품이 많아 굵직한 역할을 하게 될 기회가 많았다”며 “(새로운 작품을 만날 때마다) 나는 어떤 사람인지, 어떤 소리꾼인지 자문하며 발버둥치고, 눈앞의 산을 넘고 싶어 나 자신과 쌈박질한다”고 했다.

“이제 창극단에 머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아쉬움이 크긴 하지만, 건강함을 잃지 않으려구요. 제가 좋은 사례로 남아야 후배들에게도 이정표가 될 수 있으니까요. 그저 올곧게 나의 예술 생활을 진취적으로 펴면서 흔들림 없이 떳떳하게 그 길을 가려고 해요.”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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