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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영상 칼럼]신진서가 소환한 ‘이창호의 상하이 대첩’
농심배 마지막 주자로 ‘벼랑끝 탈출’
파죽의 셰얼하오 8연승 저지했지만
딩하오·커제 등 최고수들 5명 대기
이들 모두 제압해야 한국에 우승컵
불가능에 도전해야 하는 신 9단
내년 2월 치를 고독한 숙명에 짠~

논설실장
부산에서 지난 4일 열린 제25회 농심신라면배 세계바둑최강전 9국에서 신진서(오른쪽) 9단이 셰얼하오 9단과 바둑을 두고 있다. 신 9단은 이날 대국을 승리로 장식했고, 셰얼하오 9단의 8연승을 저지했다. [한국기원]

승부의 세계에서 절대 강자는 고독한 법이다. 빈틈 허용이란 있을 수 없다. 실수는 더더욱 용납할 수 없다. 승리는 당연한 몫이다. 어쩌다 지면 따가운 눈총이 쏟아진다. 컨디션 난조라는 핑계는 씨알도 안먹히는 사치일 뿐이다. 그래서 절대 강자는 외롭고 또 외롭다. 승리는 외로움의 또다른 이름이다. 인공지능(AI)급 바둑을 둔다고 ‘신공지능’이라 불리는 신진서 바둑 프로9단의 경우가 그럴 것이다.

신 9단이 절대 강자임은 기록이 말해준다. 신 9단은 2023년 마지막 12월 랭킹에서도 1위를 차지하며 48개월 연속 랭킹1위 자리를 고수했다. 지난달엔 한해 100승을 달성하기도 했다. 연간 100승 기록은 한국 프로바둑 역사상 처음이다. 특히 신 9단은 지난 8월 ‘바둑올림픽’으로 불리는 세계 최대 기전인 응씨배를 손에 쥐며 14년만에 한국에 우승을 선사하는 강렬한 인상을 줬다. 절대 강자로서 손색없는 기록을 쌓은 것이다.

승률 면에선 독보적이다. 현재 신 9단의 승률은 89%가 넘는다. 앞으로 남은 기전에서 전승을 기록할 경우, 꿈의 90%대 승률 달성도 불가능하지만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신 9단의 지난 2022년 승률은 85.1%. 승률 외에도 다승·연승까지 3관왕에 오른 신 9단은 지난해 최고의 해를 보냈다. 올해는 그 이상의 좋은 성적이 예상된다. 봐도 봐도 넘사벽(넘을수 없는 사차원의 벽)이다. 이런 신 9단 앞에 숙명의 과제가 놓였다. 절대 강자의 고독한 운명에 주어진 숙제다.

신 9단은 지난 4일 부산 동래구 호텔농심에서 열린 제25회 농심신라면배 세계바둑최강전 9국에서 중국의 셰얼하오 9단에게 133수 만에 흑 불계승을 거뒀다. 천금같은 1승이었다. 숱한 승리를 만끽한 신 9단이었을지라도 이날 승리가 대단한 의미가 있었던 것은 셰얼하오 9단의 8연승을 저지했다는 점에 있다. 최근 열린 삼성화재배 월드바둑마스터스 8강전에서 셰얼하오 9단에게 패배의 일격을 당한 후여서 승리의 기쁨은 배가됐다.

파죽지세의 셰얼하오 9단 누르다

셰얼하오 9단의 파죽지세는 그만큼 대단했다. 이번 농심배에서 그는 7연승이라는 놀랄만한 성적을 거뒀다. 한중일 초강자가 겨루는 대회에는 한국은 신 9단을 비롯해 박정환·원성진·변상일 9단과 설현준 8단이 출전했다. 중국에서는 셰얼하오 9단을 필두로 커제·딩하오·구쯔하오·자오천위 9단이, 일본에서는 이야마 유타·이치리키 료·시바노 도라마루·쉬자위안 9단, 위정치 8단이 참가했다. 셰얼하오 9단은 여기서 한국의 원성진·변상일 프로를 비롯해 쉬자위안·이치리키 료·시바노 도라마루· 위정치 프로를 모두 제압했다. 내로라 하는 세계강자들이 그 앞에서 추풍낙엽처럼 줄줄이 나가 떨어진 것이다. 믿었던 박정환 9단마저 셰얼하오 9단의 기세에 눌려 246수 만에 불계패 당했다. 중국의 첫번째 주자의 이같은 놀랄만한 선전으로 한국과 일본은 코너에 몰렸다. 중국은 셰얼하오 9단은 물론 커제나 딩하오 프로 등 다섯명이 생존하고 있는데, 한국과 일본은 마지막 주자 한명 밖에 남지 않는 상황이 됐다. 한국의 그 마지막 주자가 바로 신 9단이었다. 신 9단마저 무너지면 셰얼하오 9단에게 8연승을 헌납하게 되고, 농심배를 너무도 허무하게 중국에 내줄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런 1승이 절박한 상황에서 얻은 귀중한 승리라 ‘역시 신진서는 신진서다’라는 말이 뒤따랐다. 한국 바둑은 벼랑끝 위기에서 간신히 탈출했다. 절체절명의 순간에서 셰얼하오 9단의 8연승을 저지하고, 일대 반격에 나선 것에 팬들 역시 일단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바둑팬들은 이번 25회 농심배에서 ‘혹시나’하는 기적을 바라고 있다. 신 9단이 나머지 판들도 파죽의 연승을 거둬 한국에 우승컵을 안겨줄 것이라는 일말의 희망이다.

물론 확률은 ‘낙타 바늘구멍’만큼 작다. 신 9단이 우승컵을 품으려면 일본의 이야마 유타를 시작으로 커제, 딩하오 프로 등 중국의 초고수 4명을 쓰러뜨려야 한다. 제아무리 신공지능이라 불려도, 알파고가 아닌 이상 지구촌 최고강자급 다섯명을 연달아 이기기는 쉽지 않다. 아니, 불가능에 가깝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05년 이창호의 5연승 우승신화 또?

그런데도 이런 기대감을 갖게되는 것은 ‘돌부처’ 이창호 프로의 ‘전설의 우승’ 사례가 있기 때문이다. 20여년이 흐른 지금도 회자되는, 그 유명한 ‘상하이 대첩’이다. 이창호 9단은 2005년 제6회 농심배에서 마지막 주자로 출전해 5연승 후 우승이라는 기적(?)을 일궜다. 당대의 고수였던 뤄시허, 장쉬, 왕레이, 왕밍완, 왕시 프로를 연달아 쓰러뜨림으로써 한국에 우승컵을 안겼다. 이 9단은 2010년 농심배에서도 마지막 주자로 나서 류싱, 구리, 창하오 프로를 연달아 제압하고 끝내기 3연승으로 한국 우승에 기여함으로써 ‘농심배의 사나이’란 칭호를 얻기도 했다. 이런 대역전 우승의 꿀맛을 목도한 경험이 있는 바둑팬들 사이에서 예전 ‘이창호 신화’ 데자뷔를 다시 보고 싶다는 기대감이 싹트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신 9단은 겸손했다. 셰얼하오 연승을 막은 뒤 그는 “겨우 한판 이긴 것이기에 우승에 대한 욕심보다는 한판 한판 둔다고 생각하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서 “앞으로 다섯판이면 세계대회 우승 정도의 승수가 필요하기 때문에 세계대회 첫판을 둔다는 생각으로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다. 연승 욕심을 앞세우기 보다는 한판, 한판 눈앞의 승리에만 전력을 다하고 싶다는 뜻이다.

신 9단에 연승 승전보를 올려달라고 압박(?)할 필요도 없고, 할 수도 없다. 당대 내로라 하는 고수들 다섯명을 줄줄이 쓰러뜨리는 것은 확률상 너무나도 버거운 일이다. 우리 보기 좋자고 불가능에 가까운 일을 달성하라고 떼 쓰는 건 인간적으로도 예의는 아니다.

농심배 우승국을 결정짓는 3차전은 내년 2월 장소를 중국 상하이로 옮겨 펼친다. 이창호 9단의 승전보가 유난히 크게 들렸던 장소라는 점에서 느낌은 나쁘지 않다. 신 9단이 우승을 의식하지 말고, 본인 말처럼 한게임 한게임 대국 자체를 즐기면서 전력을 다하길 바란다. 한판 이기면 두판 이기고, 곧 세판 이길지 누가 알겠는가. 어이쿠, 이 말 자체가 압박이네. 앞 말 지운다. 대신 이 말을 하고 싶다. “신공지능, 너무 부담 갖지 말고 최상의 컨디션에서 좋은 플레이 보여주세요.”

ysk@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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