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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리 올래?” 나체女가 급히 감춘 ‘특별한’ 신체부위…섬뜩한 실체는[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존 콜리어 편]
<동행하는 그림>
육지의 아이
물의 요정
릴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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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페르메이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본 뒤 관련 책과 영화를 모두 찾아봤습니다. 잘 그린 건 알겠는데 이 그림이 왜 유명한지 궁금했습니다. 그림 한 장에 얽힌 이야기가 그렇게 많은지 몰랐습니다. 즐거웠습니다.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은 달라졌다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이 경험을 나누고자 글을 씁니다. 미술사에서 가장 논란이 된 작품, 그래서 가장 혁신적인 작품, 결국에는 가장 유명해진 작품들을 함께 살펴봅니다. 기사는 역사적 사실 기반에 일부 상상력을 더한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쓰였습니다.
위험한 노래
존 콜리어, '육지의 아이'(일부 확대)

[헤럴드경제=이원율 기자]그건 분명 노랫소리였다.

꿈결 같은 선율이었다. 아이는 모래성을 쌓다 말고 귀를 기울였다. 파도와 함께 밀려오는 목소리는 들을수록 달콤했다. "엄마. 누가 바위 너머에서 노래를 불러요." "들리질 않는데?" "에이, 거짓말." 아이는 입술을 쭉 내밀었다. 엄마가 놀리는 게 분명했다. 아이는 오후 내내 모래를 갖고 놀았다. 그러다 조개껍데기를 줍고, 지루하면 옷을 훌훌 벗은 채 바닷물에 뛰어들었다. 아이는 이 모든 순간에 노래를 들을 수 있었다. 심지어 잠수를 할 때도 귓가에 닿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자연스럽게 그 음에 맞춰 같이 흥얼거렸다. 그렇게 한참 물놀이를 하다 뒤를 돌아봤다. 엄마는 햇빛 아래 곤히 잠들어있었다.

누구일까.

어떤 사람이기에 이처럼 온종일 예쁜 목소리를 낼 수 있을까. 아이는 궁금했다. 다시 해변으로 올라왔다. 물이 후드득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쭉 짰다. 잠깐이면 돼. 아이는 엄마의 깊은 숨소리를 뒤로 한 채 결심했다. 저기 바위틈이 있었다. 바짝 붙으면 지나갈 수 있었다. 그러면 바위 너머의 세상을 볼 수 있을 터였다. 참을 수 없는 호기심이 아이를 이끌었다. 한 발, 두 발 살금살금 움직였다. 생각보다 좁았지만, 큰 무리 없이 빠져나갈 수 있었다. 그곳은 새로운 모래사장이었다. 발자국 하나 찍혀있지 않은 신비한 공간이었다. 노랫소리가 커졌다. 더 짙어지고, 더 감미로워졌다. 아이는 발걸음을 뗐다. 이제야 목소리의 주인공을 볼 수 있었다. 아이는 천진난만한 미소를 띠었다.

존 콜리어, '육지의 아이'

눈앞에 모습을 보인 건 아름다운 나체의 여성이었다. 바닷물에 웅크린 채 앉은 그녀는 윤슬을 보며 우수에 젖어있었다. 작은 입술로는 끊임없이 선율을 흘리고 있었다. 그녀 또한 아이를 봤다. 그제야 노래를 멈췄다.

"아가." 그녀가 상냥하게 말을 걸었다. "이리 와서 함께 부르지 않을래?" 아이에게 손짓했다. 아이는 홀린 듯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녀는 아이가 더 가까워지기만을 기다렸다. 그런 그녀가 애써 숨기는 게 있었다. 두 다리 대신 있는 지느러미였다. 존 콜리어(John Collier·1850~1934)의 '육지의 아이'를 보면 이런 이야기가 떠오른다. 귀여운 아이, 매혹적인 인어를 그린 이 그림에서 뜻밖의 스산한 공기가 감도는 탓이다. 콜리어는 왜 인어를 소재로 이런 을씨년스러운 그림을 그렸을까. 그림 속 아이와 인어 사이에선 곧 무슨 일이 벌어질까. 이를 짚어보기에 앞서 인어의 '불편한 진실'부터 살펴봐야 한다.

잔혹한 민낯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 '율리시스와 세이렌'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인어공주'에서 인어를 귀엽고도 천진난만한 요정으로 그렸다. 하지만 이 동화가 등장하기 전 인어는 외려 잔혹한 생물로 묘사될 때가 많았다. 사실 인어의 원형은 세이렌이라는 게 정설로 통한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세이렌은 지중해에 사는 괴물 새다. 인간 여성의 얼굴, 독수리의 몸을 가진 이 짐승은 아름다운 노래로 뱃사람을 끌어들였다. 세이렌의 목소리는 듣는 이의 혼을 쏙 빼놓을 만큼 고혹적이었다. 많은 뱃사람이 이를 듣고 그쪽으로 배 키를 돌렸다. 더 가까이에서, 더 오래 듣기 위해 세이렌 앞에 뱃머리를 댔다. 세이렌은 미소를 흘리며 다가왔다. 그러고는 표정을 확 바꾼 채 사람을 낚아채 마구 뜯어먹었다. 배가 부르면 발톱으로 몸통을 물어 바다에 빠뜨렸다. 가상 생물이긴 하지만, 검푸른 바다를 항해하는 이들에게 이 털 짐승은 꿈에 나올까 두려운 존재였다.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 '율리시스와 세이렌'
프레데릭 레이튼, '어부와 세이렌'

이처럼 악명 높은 세이렌의 모습은 시간이 흐를수록 변했다. 미지의 괴물이라는 인상이 신비주의를 낳은 건지, 점점 더 미녀의 얼굴을 갖췄다. 바다에 산다는 설 때문인지, 반인반조(半人半鳥)로 그려진 이 생물체는 차츰 반인반어(半人半魚) 모습으로 그려졌다. 털 박힌 날개는 매끈한 지느러미로 탈바꿈했다. 하지만 전해지는 습성은 똑같았다. 달콤한 목소리로 인간을 홀려 익사시킨다는 고약한 버릇만은 바뀌지 않았다. 그렇기에 옛사람들은 인어를 '예쁜 세이렌' 정도로 보곤 했다. 영국 화가 프레데릭 레이튼(Frederic Leighton·1830~1896)의 그림 '어부와 세이렌'을 보면 그 시절 인식을 엿볼 수 있다. 젊은 어부는 금발 인어의 다정한 속삭임에 몸과 마음을 다 내줄 기세다. 자기 다리를 서서히 조여오는 그녀의 지느러미는 느끼지도 못하는 듯하다.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 '인어'

여러 전설 속에서도 인어는 위험한 존재로 등장한다. 가령 고대 마케도니아 정복왕 알렉산더의 여동생 테살로니키가 죽은 뒤 인어로 부활했다는 설화가 있다. 에게해에 사는 그녀는 뱃사람을 보면 무섭게 헤엄쳐 다가온다. "알렉산더 대왕께서는 잘 계시는가." 옥구슬 같은 목소리로 말을 건다. "그분은 살아계십니다. 앞으로도 영원히 제국을 통치할 겁니다." 이렇게 말해야만 목숨을 건질 수 있다. "그가 죽은지는 이미 하세월이 흘렀는데 무슨 소리요?"라는 식의 매몰찬 답을 하는 순간, 그녀는 넓적한 지느러미로 배를 박살내버린다.

그런가 하면, 독일은 라인강에 얽힌 인어 전설을 품고 있다. 독일 장크트고아르스하우젠 부근 라인강 기슭에는 132m의 바위가 있다. 소리 나는 바위라는 뜻에서 로렐라이(Loreley)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원래는 저녁노을이 비칠 때쯤 인어가 이 위에서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근처 수많은 배가 인어의 미모와 목소리에 홀려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고 한다. 그 결과는 침몰과 죽음뿐이었다는 이야기다. 아일랜드에도 인어 민담이 있다. 아일랜드에선 인어를 메로우(Merrow)라고 불렀는데, 이 생명체가 나타나면 반드시 폭풍우가 온다고 여겨졌다.

뒤늦은 절규
존 콜리어, '육지의 아이'(일부 확대)

이제 콜리어가 그림 '육지의 아이'를 스산하게 그린 이유를 알 수 있다. 아이 눈에는 이미 초점이 없다. 인어 또한 아이에게 별다른 감정을 느끼지 않는 듯하다. 그러고 보면 제목부터 음침하다. '육지의 아이'는 오직 인어의 시선에서 붙일 수 있는 매정한 표현이다. 인간이 물고기 떼 속 각각의 생김새를 들여다보지 않듯, 인어 입장에서도 표적이 된 아이의 외모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귀여운 아이든, 사랑스러운 아이든 모두가 육지에서 사는 똑같은 작은 인간일 뿐이다. 확 끌어들여 물에 처박으면 아무 말도 못 하며 버둥거릴 생물들이었다. 그러다 이내 팔다리가 축 처질 그런 존재들일 뿐이었다.

인어에게 다가가는, 더 정확히는 끌려가는 이 아이는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지 못할 터였다. 아이를 두고 잠든 엄마는 곧 이름을 부를 것이다. 아이도, 인어도 종적을 감춘 해변에서 뒤늦게 우짖으며 헤맬 것이다.

‘위험한 여성’ 빠지다
존 콜리어, '에드워드 아우구스투스 잉글필드' 초상화
존 콜리어, '찰스 다윈' 초상화

콜리어는 '육지의 아이' 속 인어처럼 매혹적이고도 섬뜩한 여성을 그리기로 동시대 최고 화가였다. 1850년 영국에서 출생한 콜리어는 어릴 적부터 유복하게 컸다.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유명 정치인이었던 그는 이들의 지원으로 새로운 영역에 도전했다. 그게 회화였다. 영국의 명문 이튼 칼리지를 다닌 콜리어는 곧 프랑스 파리, 독일 뮌헨 등을 돌며 미술을 배웠다. 당시 집안, 학벌 모두 좋고 실력까지 갖춘 화가가 사실상 독점하는 영역이 있었다. 저명인사를 그리는 일이었다. 콜리어는 왕족과 군인, 학자 등의 초상화 주문을 받았다. 그중에는 해군 제독이자 극지 탐험가 에드워드 아우구스투스 잉글필드, 진화론의 창시자 찰스 다윈 등도 있었다.

콜리어는 안정적인 초상화가의 길에 만족하지 못했다. 그는 라파엘전파의 존 에버렛 밀레이(John Everett Millais·1829~1896), 로렌스 앨마 태디마(Laurens Alma-Tadema·1836~1912)에게 그림을 배울 기회가 있었다. 이때 라파엘전파 특유의 몽환적 분위기, 아름다운 여체 묘사에 푹 빠졌다. 콜리어도 이들처럼 그리고 싶었다. 그는 신화와 역사, 문학을 섭렵했다. 아름답게, 동시에 치명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인물을 탐색했다. 그렇게 차츰 위험한 여성에게 손 대기 시작했다.

존 콜리어, '물의 요정'
허버트 제임스 드레이퍼, '켈피'

콜리어는 물에서 인간을 홀리는 존재로 인어 말고 켈피(kelpie)도 즐겨 그렸다. 켈피는 스코틀랜드 강줄기에 사는 물의 요정이다. 켈피는 매력적인 인간 또는 풍채 좋은 말의 모습을 하고 있다. 사람을 꾀는 방법은 인어와 비슷하다. 켈피가 인간일 때는 예쁜 외모로 지나가는 이를 유혹한다. 홀린 누군가가 강에 발을 담그는 순간, 표정을 싹 바꾸고 깊은 물 속으로 끌고 간다. 다음 날, 캘피가 있던 곳에는 희생자의 장기만 볼 수 있다는 끔찍한 설도 있다. 반면 켈피가 말의 형상으로 있을 때는 어린아이만 집중적으로 노린다. 처음에는 등에 태운 채 함께 물놀이를 한다. 웃음소리가 무르익을 때쯤 갑자기 물로 쑥 빠진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도 있다. 어느 날은 아이 아홉 명이 말의 탈을 쓴 켈피 등에 올라타 놀고 있었다. "근데 말이야. 우리 몸집이 아무리 작은들, 아홉 명 씩이나 태울 수 있는 말이 있을 수 있어?" 뒤늦게 잘못됨을 느낀 한 아이가 말했다. 그제야 이상한 낌새를 느낀 아이들을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다. 가장 느린 아이 하나만 도망치지 못했는데, 그날 이후 녀석을 본 이가 없었다는 것이다.

콜리어가 그린 '물의 요정' 속 켈피는 벌거벗은 미녀의 외양을 갖췄다. 인어와 달리 두 다리까지 갖췄다. 그런 그녀는 자기가 괜찮게 변했는지 보려는 듯 물에 모습을 비추고 있다. 장난기 가득한 표정의 그녀는 곧 사람을 홀리기 시작할 것이다. 누구든 걸려만 든다면 곧장 낚아채 바위 밑 짙은 심해로 데려갈 터였다.

나의 그녀, 릴리트
존 콜리어, '키르케'

콜리어는 인어, 켈피보다 훨씬 더 위험한 여성으로 릴리트(Lilith)도 주목한 적이 있다. 릴리트는 히브리어로 '밤의 괴물'을 뜻한다. 유대 신화에 따르면 태초의 신은 첫 인간이자 첫 부부로 남성은 아담, 여성은 릴리트를 빚었다. 아담의 연인으로 알려진 이브는 사실 릴리트가 낙원 에덴동산에서 도망친 뒤 만들어진 생명체라는 게 신화 속 설명이다. 그런데 릴리트가 달아난 이유가 흥미롭다. 릴리트와 아담은 인류사상 첫 부부싸움을 했다. 왜 나는 당신이 원할 때만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그때마다 왜 나만 누워있어야 하는지를 놓고 릴리트가 따졌다. 제대로 대꾸하지 않는 아담 앞에서 릴리트는 선을 넘고 말았다. 아담을 비난하는 데 이어 신까지 모욕하고 만 것이었다. 그녀 입장에서 도망은 창조주의 보복을 피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존 콜리어, '릴리트'

릴리트는 남쪽으로 정처 없이 뛰었다. 그녀는 홍해 근처에서 한 동굴을 찾았다. 그 안에는 뜻밖의 존재가 있었다. 악마 루시퍼였다. 신에 대한 공포, 아담에 대한 분노에 젖은 릴리트는 루시퍼와 관계를 맺었다. 아예 악마의 연인이 돼 계속 악마를 낳기로 했다. 유대인들은 그런 릴리트를 '모든 악마의 어머니'로 칭했다. 이들은 릴리트가 훗날 이브를 유혹하는 뱀을 직접 낳았다는 설을 덧붙였다. 산모가 갓 낳은 어린아이를 산 채로 꿀꺽 삼킨다는 소문, 스스로 몽마(夢魔)가 돼 남자를 말려 죽인다는 이야기도 덧씌웠다. 도발적 면모, 위험한 행보, 파괴적인 힘…. 콜리어에게 릴리트는 구미가 당기는 소재였다. 콜리어는 그림 '릴리트'를 통해 그녀를 눈부신 외모의 미녀로 묘사했다. 풍성한 머리카락과 살짝 감은 두 눈, 옅게 웃는 입술, 군살 없는 몸매 등은 치명적일 만큼 매혹적이다. 알몸으로 들판에 선 릴리트는 뱀과 뒤엉킨 그 상태에서 황홀경을 느끼고 있다. "이제 에덴동산에서 가거라. 이브를 홀려 선악과를 집어삼키게 하라." 뱀에 대고 곧 이렇게 속삭일 듯하다.

존 콜리어, 'In the Venusberg Tannhauser'
존 콜리어, '추락하는 인형'

콜리어가 내놓은 여러 여성 그림들을 보면, 그가 이성에게 억하심정이 있었던 건 아닐지 추측하기도 쉽다. 하지만 이는 오해다. 콜리어는 외려 자기 작품을 통해 그때로는 사실상 용납할 수 없는 '공격적인 여인', '저항하는 여자'의 상을 부각하고자 했다. 얌전하고 정숙한 여성을 최고로 친 그 시대에 여성 편에 서서 반항을 한 격이다. 당시 유럽은 유부남의 바람은 이혼 사유로 쳐주지도 않았다. 반면 유부녀의 간통은 사회적 죽음을 각오해야 할 만큼 가혹했다. 콜리어가 이처럼 불평등한 삶을 살고 있던 여성에게 연민을 가졌다는 건 그의 그림 '추락한 인형'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콜리어는 이 그림을 그린 후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추락한 인형은 울고 있는 여인이에요. 중년 남편에게 무언가를 고백하고 있지요. 고루하고 학구적이었던 남편은 젊은 아내를 잘 돌보지 못했을 거예요. 그는 아내의 잘못(외도)은 자기 탓이 아니었을까 생각했을 겁니다. 저는 그가 아내를 용서할 것으로 상상했어요."

존 콜리어, '토마스 헨리 헉슬리' 초상화

콜리어는 당시 저명 지식인이었던 토마스 헨리 헉슬리의 겹사위로도 유명하다. 헉슬리는 '불가지론'이라는 말을 처음 쓴 생물학자다. 생전에 왕립협회(the Royal Society)까지 역임하는 거물이었다. 콜리어와 1879년에 결혼한 첫 부인 마리안 헉슬리는 오래 살지 못했다. 폐렴에 산후 우울증이 겹쳐 허무하게 생을 마감했다. 그때가 1887년, 연을 맺고서 고작 8년이 흐른 후였다. 그리고 2년 후 콜리어는 마리안의 여동생 에델 헉슬리와 다시 가약을 맺었다. 남편과 처제 사이 불륜의 뒤늦은 결실 같은 '막장 드라마'는 아니었다. 어린 시절부터 가족처럼 지낸 헉슬리 가문 사람들을 위해 콜리어가 의리를 지킨 것이라고 한다. 콜리어는 1934년에 사망했다. 향년 84세였다. 그의 진보적 여성관이 녹아든 그림들은 훗날 여성 운동이 번질 때 중요한 상징물로 역할을 하게 된다.

쿠키 : 나체로 말에 오르다
존 콜리어, '고다이바 부인'

"여보. 농민의 신음을 귀 기울여주세요. 부디 이들의 세금을 깎아주세요."

고다이바 부인이 간청했다. 11세기 당시 영국 코번트리의 영주였던 남편 레오프릭 3세는 콧방귀만 뀌었다. 농민 착취에 맛들린 그는 이 즐거움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제 말을 들어준다면요. 당신이 시키는 무엇이든 할게요." 고다이바가 초강수를 뒀다. 레오프릭 3세는 그제야 그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무엇이든?" "네." "그렇다면…. 알몸으로 말을 타고 영지를 한 바퀴 돌 수 있겠는가?" 고다이바는 예상 못 한 저열한 제안에 아무 말도 못 했다. "할 수 없지? 그럼 가만있으시게." 레오프릭 3세는 비웃듯 킬킬대며 돌아섰다. 그런데 얼마 후, 알몸의 고다이바가 말에 오른 채 마을 입구에 섰다. 결연한 표정의 그녀는 말고삐를 잡고 움직였다. 잡화점에서 식료품점, 목장에서 대장간…. 그녀는 천천히 마을을 크게 돌았다. 그녀의 사연을 전해 들은 사람들은 알아서 창문과 대문을 걸어 잠갔다. 딱 한 명 재단사 톰이 엿보긴 했지만, 천벌을 받았는지 눈이 멀고 말았다. 고다이바의 진심에 감동한 레오프릭 3세는 깨달음을 얻고 세금을 크게 내렸다. 벨기에의 초콜릿 브랜드 '고디바'에도 영감을 준 이 내용은 지금도 관련 행사가 매년 성대히 치러질 만큼 뿌리 깊은 전설이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미인이 화려하게 장식된 말을 타고 가는 그림. 많은 이가 한 번쯤은 본 적 있는 '고다이바 부인' 또한 콜리어의 그림이다. 강렬한 붉은색 안장에 앉은 고다이바, 화폭 전체를 가득 채우는 말에서 그녀의 용기를 엿볼 수 있다. 앳된 얼굴과 고운 살결, 수줍은 듯 숙인 고개와 들어 올린 손, 그럼에도 앞으로 나아가는 용기에서 고귀함까지 느껴지는 듯하다. 콜리어는 이렇듯 '위험한 여성'만큼 '고귀한 여성'도 잘 그렸다. 다만, 이 또한 주체성을 갖춘 여성을 그렸다는 점에서 주제 의식은 같았다고 볼 수 있다. 콜리어의 그림 '고다이바 부인'은 그가 당시 상당히 개혁적인 여성관을 가진 화가였다는 걸 증명할 수 있는 또 다른 대표작으로 통한다.

〈참고자료〉

푸른 바다의 신화, 인어의 탄생, 강민경, PARK&JEONG

라파엘전파 회화와 19세기 영국문학, 손영희, 한국문화사

〈후암동 미술관 작품 편 읽는 순서〉

1)“내 딸이 얼어죽을뻔 했어!” 식은 욕조에 女모델 뒀다가 소송갈 뻔한 사연[후암동 미술관-존 에버렛 밀레이 편] - 오필리아 (2023. 9. 2.)

2)“그녀 남친을 제가 죽였어요” 짝사랑 훔쳐보던 괴물, 무슨 짓을 벌였나[후암동 미술관-오딜롱 르동 편] - 키클롭스 (2023. 9. 16.)

3)“몸값만 900억원 이상!” 13명 품에 안긴 男실종사건…정말 화형 당했나[후암동 미술관-빈센트 반 고흐 편] - 가셰 박사의 초상 (2023. 9. 30.)

4)“그남자 목을 주세요” 춤추는 요부의 섬뜩한 유혹…왕은 공포에 떨었다[후암동 미술관-귀스타브 모로 편] - 유령(환영) (2023. 10. 14.)

5)“전염병이 내 아기 다섯을 죽였어요” 피눈물 아빠가 본 ‘사신’은 이랬다[후암동 미술관-아놀드 뵈클린 편] - 페스트 (2023. 10. 28.)

6)“이리 올래?” 나체女가 급히 감춘 ‘특별한’ 신체부위…섬뜩한 실체는[후암동 미술관-존 콜리어 편] - 육지의 아이 (2023. 11. 11.)

〈후암동 미술관 신화 편 읽는 순서〉

1)“독수리가 간 쪼아도 참는다” 최악고문 받는 男, 무슨 사연[후암동 미술관-프로메테우스 편] (2023. 9. 9.)

2)“도저히 못참겠어” 봉인 푼 그녀, 외마디 비명…惡은 그렇게 쏟아졌다[후암동 미술관-판도라 편] (2023. 9. 23.)

3)“네 엄마 뼈를 던져라” 화들짝 놀란 명령…울면서도 할 수밖에[후암동 미술관-데우칼리온 편] (2023. 10. 7.)

4)“앗, 아파” 근육질 아기가 빨아들인 모유…뻥 걷어차고 싶었지만[후암동 미술관-헤라클레스 편] (2023. 10. 21.)

5)“절세미녀 셋이 있는 곳에 가쇼” 근육男은 공포에 떨었다…무슨 일[후암동 미술관-헤라클레스 ②편]

yul@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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