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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엄마가 사라졌다, 속이 시원했다”던 그녀도 실종…1년뒤 ‘뜻밖’의 발견[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아그네스 마틴 편]
홀로 선 은둔자
미니멀리즘

<동행하는 작품>
나무
무제 6번
세상을 등지고
.
편집자주
페르메이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본 뒤 관련 책과 영화를 모두 찾아봤습니다. 잘 그린 건 알겠는데 이 그림이 왜 유명한지 궁금했습니다. 그림 한 장에 얽힌 이야기가 그렇게 많은지 몰랐습니다. 즐거웠습니다.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은 달라졌다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이 경험을 나누고자 글을 씁니다. 미술사에서 가장 논란이 된 작품, 그래서 가장 혁신적인 작품, 결국에는 가장 유명해진 작품들을 함께 살펴봅니다. 기사는 역사적 사실 기반에 일부 상상력을 더한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쓰여졌습니다.
아그네스 마틴(일부 확대)

[헤럴드경제=이원율 기자] 1967년의 어느 날, 아그네스 마틴이 사라졌다.

그녀가 어디로 갔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사실상 실종이었다. 그러다 1년 후, 마틴은 뉴멕시코 쿠바의 한 주유소 식당에서 등장했다. 살도 빠지고, 피부도 까맣게 탄 모습이었다. "참 좋은 곳에서 일하시는군요." 마틴이 주유소 직원에게 살갑게 인사했다. 미소로 답한 그에게 마틴은 대뜸 말을 덧붙였다. "혹시, 남는 땅 있어요?"

그곳은 황무지였다.

날리는 건 모래, 보이는 건 나무와 잡초뿐이었다. 비포장길로 30여㎞를 달려온 곳이었다. 때마침 빈 땅이 있다며 주유소 직원의 아내가 보여준 곳이었다. "여보. 그래도 그렇지, 이런 땅을 보여주면…." "잠깐. 저 여자 눈빛을 보세요." 주위를 살펴보는 마틴의 표정은 환했다. 아무것도 없는 곳, 나아가 아무것도 없을 곳인 이 땅이 마음에 쏙 드는 듯했다. "너무 좋아." 마틴은 들뜸을 감추지 못했다. "고마워요. 제가 원하던 풍경이에요." 그녀는 어린아이처럼 방방 뛰었다. 이제 마틴은 로빈슨 크루소 같았다. 크루소와 다른 건 있었다. 마틴은 스스로 고립의 길에 섰다. 고독을 품고, 외로움을 붙잡았다. 마틴은 차에 짐을 싣고 왔다. 그는 빈 땅 한가운데 터를 잡았다. 벽돌을 쌓았다. 전기톱을 들고와 나무를 숭덩숭덩 벴다. 깎고, 세우고, 묶으며 종일 씨름했다. 그 결과, 그럴듯한 거처를 만들 수 있었다. 그녀에겐 나무 보금자리와 픽업트럭이 전부였다. 전기도 없고, 물탱크도 없고, 화장실도 없는 삶이었다. 그녀 말곤 자그마한 생명의 떨림조차 없는 생이었다.

뉴멕시코에 있는 아그네스 마틴. [Gianfranco Gorgoni]

마틴은 철저히 혼자였다.

그녀는 맨바닥에 등을 깔고 누웠다. 더우면 사과와 복숭아를 으적으적 씹어먹었다. 추우면 토마토와 호두, 딱딱한 치즈를 집어삼켰다. 온 우주가 귀찮을 땐 바나나와 오렌지 주스를 섞은 녹스 젤리를 입에 넣고 굴렸다. 마틴이 가장 좋아하는 건 따로 있었다. 흔들의자나 침대에 풍덩 앉아 가만히 있는 일이었다. 그녀는 광활한 하늘 위 햇빛과 달빛 아래에서 그대로 눈을 감았다. 종종 좋아하는 노래 '푸른 하늘'(Blue skies)을 흥얼거렸다.

아그네스 마틴, '무제 10'

그렇게 놀고먹는 듯했던 마틴은, 아주 가끔 발작하듯 일어섰다.

잊어서는 안 될 기억을 떠올린 사람처럼 허겁지겁 움직였다. 빙글빙글 돌던 마틴은 아무 땅바닥에 자리를 깔고 앉았다. 그녀는 숨을 골랐다. 몸의 떨림이 멈출 때쯤, 모래 위에 점을 찍었다. 그리고 선을 죽 그었다. 격자무늬 패턴의 무언가를 그렸다. 정확히 뭘 그리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행위에 끈질기게 매달렸다. 더 어이없는 건, 선이든 조금만 어긋나도 모래를 마구 밟아 흩트렸다는 것이다. 이처럼 예측불가능한 그녀의 정체는 무엇인가. 이토록 극단적 미니멀리즘(Minimalism)의 삶을 산 이유는 무엇이며, 그러면서 빚어내는 황당하리만큼 단순한 선이 뜻하는 건 또 무엇인가.

‘폭군’ 어머니는 후유증을 남기고…
아그네스 마틴, 'Daisies in a Jar'

마틴의 이야기는 캐나다 서스캐처원의 한 농장에서 시작한다.

마틴은 1912년 이곳에서 출생했다. 마틴은 세상 빛을 보자마자 선물을 받았다. 그것은 자연의 경이였다. 그녀는 매 순간 자연의 숭고함을 체험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해와 구름, 별과 은하수를 퍼먹으며 컸다. 마틴은 우뚝 솟은 바위산, 탁 트인 초원을 업고 태어난 잭슨 폴록과 동년배이기도 했다. 이들을 보면 때때로 자연은, 인간의 예술 감수성을 일깨우기에 가장 좋은 각성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아그네스 마틴, 'Egg'

어린 마틴은 들판에 엎드려 시를 쓰고, 틈틈이 정원과 텃밭을 가꾸는 귀여운 여인으로 클 수 있었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빙 둘러앉아 칠면조 요리를 기다리는, 그런 평범한 삶을 살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마틴이 기구한 생을 걷게 된 건 어머니 탓이 컸다. 마틴의 어머니는 강했다. 엄격하고 꼿꼿했다. 이웃들이 "수도승도 울고 가겠다"고 말할 정도였다. 문제는 온 가족, 천진난만한 자기 딸에게도 그 기질을 강요했다는 것이었다. 마틴의 아버지는 떠났다. 마틴이 겨우 세 살 때였다. 이후 마틴은 폭군처럼 군림하는 그녀 앞에서 어쩔 도리 없이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양치기 소녀처럼 깜찍했던 마틴은 차츰 음울해졌다. 마틴은 그녀를 통해 침묵을 배웠다. 금욕을 익혔고, 자기통제에 익숙해졌다. 남에게 기대고 의지하는 건 죄악이란 말을 듣고 자랐다. "엄마. 저 목이 아파요." 마틴이 그녀에게 호소했다. 여섯 살 때였다. 마틴이 캑캑대도 그녀는 멀뚱히 쳐다만 봤다. 마틴은 혼자 전차를 타고 병원에 가야했다. 알고 보니 편도선을 제거해야 할 만큼 심각한 상태였다. 독립심은 세상살이에 중요한 덕목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여리고 예민한 꼬마 소녀가 배우기엔 이른 감이 있는 건 사실이었다. 마틴은 많은 순간 혼란스러웠고, 마음 곳곳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받았다. 이 일들은 곧, 그녀에게 치명적인 후유증을 가하고 만다. "(내가)검으로 세상을 뚫고 나온 줄 알았어. (세상을 상대로)이기고, 또 이기면서." 훗날 마틴은 자기가 출생한 순간을 이같이 말했다. "하지만 사람들이 엄마에게 (신생아였던)나를 데려간 순간, 나는 곧바로 적응하고 말았어." 그리고 마틴은 이 말을 덧붙였다. "(내가 이긴 게 아니고)우리 엄마가 이긴 것이었어." 마틴은 그녀에게 굴복해가던 과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엄마가 없어졌어. 너무 시원한걸." 이는 그녀가 죽었을 때 한 말이었다.

아그네스 마틴, '무제'

마틴은 화가가 되기 전까지 여러 샛길을 걸었다.

마틴은 수영에 소질이 있었다. 10대 시절 올림픽 선발전에 나서 4위를 차지할 정도였다. 1931년, 미국으로 이주한 뒤부터는 교육학에 관심을 가졌다. 숲속의 여러 학교를 떠돌며 분필을 잡았다. 그런 마틴이 화가 꿈을 꾼 건 뉴멕시코주(州)에 있는 광활한 사막을 사랑하게 된 후부터였다. 마틴은 마른 땅을 거닐며 감수성이 철철 흐른 옛 시절을 떠올렸다. 다른 행성에 온 듯한 이 기분에 낡은 추억을 버무렸다. '미술을 해야겠다.' 그렇게 해 나온 결과물은 이런 다짐이었다.

아그네스 마틴

마틴은 이제 예술가였다.

1941년, 마틴은 미국의 심장부로 갔다. 뉴욕이었다. 그녀는 컬럼비아 대학 부속 기관에서 순수 미술을 전공했다. 마틴은 뉴욕과 뉴멕시코를 오가며 그림 공부를 이어갔다. 정물화와 풍경화 등 전통적 소재에 몰두했다. 마틴은 그림에 대해서만큼은 이상하리만큼 완벽주의를 고집했다. 그림이 성에 안 차면 일단 때려부쉈다. 그런 성질 탓에 초기 작품은 남아있는 게 거의 없다. 마틴은 약간은 까다로운, 그렇지만 딱히 특별할 건 없는 여류 화가로 남을 수 있었다. 그런 그녀는 컬럼비아 대학에서 선(禪) 사상가 스즈키 다이세쓰를 만나면서 또 한 번 가치관의 변화를 맞았다. "인간이 깨달음을 얻으려면 마음을 비워야 한다. 거추장스러운 장식을 배제해야 한다." 다이세쓰는 강연과 그의 책 '선이란 무엇인가' 등을 통해 이렇게 설파했다. 다이세쓰는 마틴에게 노장(老莊)사상도 전파했다. 도덕의 표준을 무위자연(無爲自然·사람의 힘을 더하지 않는 있는 그대로의 자연)으로 두는 사상이었다. 마틴은 다이세쓰의 가르침이 좋았다. '더할 생각 말고 뺄 생각을 하라'는 문장을 곱씹다보면 있는 그대로의 자연이 안겨주는 경이, 오염되지 않은 우주와 대지가 선사하는 거룩함이 생각났다. 마틴은 이제야 자기가 뭘 그려야 할지 알 수 있었다. 그는 화려한 덧셈의 그림이 아닌, 숭고한 뺄셈의 그림을 만들어야 했다.

禪사상과 황폐한 도시로…‘격자무늬’ 눈 뜨다
아그네스 마틴, 'Friendship'

어머니의 '특훈' 때문이었을까.

마틴은 강했다. 무엇이든 잘 먹고, 어디서든 푹 잘 수 있었다. 상대가 누구든 딱히 기대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 마틴이 선 사상과 노장사상까지 익혔다. 그녀는 이제 무서울 게 없었다. 어떤 환경에서든 독야청청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마틴은 코엔티스 슬립으로 갔다. 마흔다섯 살 정도였을 때였다. 이 지역은 뉴욕 맨해튼 남쪽에 있는 소수 민족 거주지였다. 이스트강을 낀 황폐한 해안가에서 낡은 조선소와 버려진 창고들을 볼 수 있는 곳이었다. 마틴은 다락방을 얻었다. 물은 안 나오고 찬 바람만 숭숭 불어오는 방에서 가만히 있었다. 플라톤주의와 칼뱅주의, 선불교와 도교 사상을 곱씹으며 내면을 탐구했다. 인간의 정신, 자연과의 조화를 연구했다. 그러다 보면 머릿속에서 여러 관념이 두둥실 떠올랐는데, 이 중 선과 색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를 고민했다. 신호가 오면 벌떡 일어나 붓과 연필을 쥐었다. 마틴은 점점 더 단순하게 그렸다. 그의 그림에서 이제 대상은 찾을 수 없었다. 마틴은 인간의 모든 관념을 모아 약분(約分)하면 끝내 남는 건 점과 선밖에 없다는 양, 반복되는 그리드(격자무늬) 패턴을 선보였다.

아그네스 마틴, '나무'

마틴은 1964년에 '나무'를 그렸다.

멀리서 보면 하얀 캔버스만 보인다. 조금씩 다가가면 사각형을, 더 바짝 붙으면 수없이 그어진 얇은 선을 볼 수 있다. 연필로 그려진 보일 듯 말 듯한 선은 마틴의 미세한 손 떨림을 그대로 담고 있다. 그림은 간소하다. 그런데도 이 연약한 격자무늬를 보다보면 인간의 치열한 고민, 거기에서 흘러나오는 정신을 느낄 수 있다. 이에 따라 명상적인 느낌도 받을 수 있다. 마틴이 표현하고자 한 건 순수함이었다. 그녀는 자기 삶에 쑥 들어온 모든 사상을 '순수함을 유지하라'는 것으로 이해했다. 깨달음과 반성은 때가 묻지 않은 상태를 유지할 때 올 수 있는 것으로 확신했다. 그렇기에 마틴은 회화를 점 찍기와 선 그리기 등의 가장 단순한 작업으로 만들었다. 순수함을 방해하는 모든 예술적 기교를 거부한 것이었다. 마틴은 이 그림을 자신의 첫 격자무늬 작품으로 명명했다. "나는 나무의 순수함을 생각하고 있었어. 그러다 이 격자무늬가 떠올랐어. 나는 그게 순수함을 뜻한다고 생각했고, 여전히 그렇게 믿고 있어." 마틴의 말이었다. "이따위가 무슨 그림이야?" 마틴의 작품에 대해 이런 반응이 있으면 이렇게 응수했다. "사람들은 그 모든 게 전부 텅 빈 사각형이라는 사실을 참지 못하는 듯해." 그럴 수도 있다는 듯, 담담한 목소리로.

로버트 라우센버그, '모노그램'

마틴은 그곳에서 친구도 몇몇 사귀었다.

버려진 해운 창고들을 작업실로 쓰던 팝아트의 대가 로버트 라우센버그재스퍼 존스, 추상화의 장인 엘스워스 켈리 등이었다. 이들보다 열 살가량 더 많은 마틴은 패기 어린 동생들과 거침없이 소통했다. 그런데, 부지런히 살던 마틴에게 예상치 못한 일이 생겼다. 냉대와 무관심으로 얼룩졌던 어린 시절 후유증이 뒤늦게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편집성 조현병이었다. 마틴은 '목소리들'과 함께 하는 순간이 많아졌다. 그녀는 '목소리들'이라고 점잖게 말했지만, 사실 이는 예고없이 들려오는 환청이었다. 마틴은 가수(假睡·의식이 반쯤만 깨어있는 상태)에 빠지는 일도 잦아졌다. 어느 겨울에는 한 교회에서 연주되는 조지 프레더릭 헨델의 '메시아'를 듣고 가수에 들어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한번은 자기가 누구인지, 여기가 어디인지 모른 채 떠돌다가 붙잡힌 일도 있었다. 마틴은 점점 더 자주 정신병원을 찾았다. 백 번 넘는 전기 충격 치료도 받았다.

아그네스 마틴, 'Night sea'

마틴의 격자무늬 그림은 몇 차례 전시, 동료들 입소문 덕에 유명해졌다.

그러나 마틴은 병 때문에 눈에 띄게 약해지고 있었다. 그러다 약해진 건강에 결정타를 맞았다. 멘토였던 화가 애드 라인하르트를 잃은 것이었다. 사인은 심장마비였다. 고독의 삶을 택한 마틴이 거의 유일하게 각별히 여긴 존재였다. 마틴은 절망에 빠졌다. 이런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마틴은 자기 작업실이 있는 건물의 철거 계획을 마주했다. 그녀가 받는 지원금은 픽업트럭과 캠핑 장비를 살 수 있는 정도였다. 마틴은 무언가 결심한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그림을 멈췄다. 캔버스와 페인트 용품 등을 주변 동료에게 나눠줬다. "왜 그래?" 친구들의 물음에도 알 수 없는 미소만 띠었다. 그리고 1967년의 어느 날, 마틴은 사라졌다.

위대한 은둔…더 ‘미니멀’해지다
아그네스 마틴, 'Summer'

"얼음을 꼭 챙기길 바라. 아그네스가."

1974년. 뉴욕 첼시 25가에 페이스(PACE) 갤러리를 차린 마틴의 친구 아니 글림처는 마틴에게 깜짝 편지를 받았다. 그녀가 직접 그린 지도도 함께였다. 글림처는 사막과 숲을 뚫고 갔다. 모험에 가까웠다. 마틴 말대로 얼음은 정말 필요한 것이었다. 그렇게 고생한 끝에 마틴의 보금자리에 닿았다. 글림처가 올 줄 알고 있었다는 듯, 마틴은 김이 모락나는 구운 양갈비를 대접했다. "대체 여기서 뭘 하는데?" 글림처가 물었다. 마틴은 그런 글림처를 보고 그저 웃었다. "얘기해봐. 왜 은둔 생활을 하게 됐어?" 질문이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갑자기 매일 같이 죽고 싶은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뉴욕을 떠난 거야." 마틴의 답이었다.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혼자?" "나는 내 마음을 알아야 했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면, 내 마음은 내 마음이 아니거든." 이번에는 도인 같은 말이었다. "보여줄 게 있어." 마틴은 글림처를 작업실로 데려갔다. 그녀가 보여준 건 새로운 그림들이었다. 아주 연한 붉은색과 아주 묽은 담청색 수평선과 수직선이 있는 작품들이었다. "여태 이런 걸 그리고 있던 거야?" 글림처가 물었다. "아니. 실은 말이야. 얼마 전까지 단 하나의 그림도 그리지 못했어. 한 6년 정도는 명상만 했어." 마틴이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얘기했다. 글림처는 고독의 끝에서 빛을 본 마틴의 그림들을 살펴봤다. 어떤 그림에는 노을빛이 펼쳐질 때의 들뜸, 어떤 그림에는 천둥 번개가 때릴 때의 두려움이 담겨있었다. 어떤 그림에는 철저히 혼자기에 느낄 수 있는 편안함, 또 어떤 그림에는 철저히 혼자기에 겪을 수 있는 불안과 공포가 서려있었다. "모래와 살구, 아침 하늘빛을 닮은 색층, 국경 없는 나라, 안락하고 자유로운 새 공화국의 깃발…." 비평가 올리비아 랭은 책 '이상한 날씨'에서 마틴의 작품을 이렇게 표현했다. 마틴은 아무것도 없는 이곳에서, 선과 점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그림을 수년째 그리고 있었다. "내 그림을 갤러리에 전시할 수 있을까?" 글림처는 마틴의 말에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뉴멕시코에 있는 아그네스 마틴. [Gianfranco Gorgoni]
뉴멕시코에 있는 아그네스 마틴. [Gianfranco Gorgoni]

마틴은 "나는 미니멀리즘 화가가 아니고 추상 표현주의 화가"라고 늘 강조했다.

하지만 비평가 랭에 따르면, 마틴은 자기가 미니멀리즘의 신비주의자로 불린다는 것을 내심 즐겼다. 회화에서 미니멀리즘은 2차 세계대전 후 현대미술을 달군 액션페인팅과 추상 표현주의, 곧장 따라붙은 팝아트에 대한 반발로 등장한 사조였다. 액션페인팅과 추상 표현주의의 부담스러운 감정 분출, 팝아트의 볼썽사나운 천박함을 두고 볼 수 없기에 등장한 움직임이었다. 미니멀리즘은 '빼기'의 예술이었다. 팝아트에 이르기까지 대부분 사조가 '더하기'에 집중한 일과 구분되는 차이점이었다. 가령 인상주의는 회화에 빛을 더하는 화풍이었다. 표현주의는 화가의 정신, 초현실주의는 화가의 상상력을 더하는 기법이었다. 이어 추상 표현주의는 화가의 감정, 팝아트는 사회의 자본을 함께 버무리는 작업 방식이었다.

도널드 저드, '무제' [국제갤러리/Judd Foundation]

미니멀리즘은 그런 메커니즘과 거리가 있었다.

미니멀리즘은 빼기의 힘을 믿었다. 무위와 무아(無我)의 정신을 따랐다. 미니멀리즘 미술의 특징은 극단적 간결성이었다. 선과 색을 앞세우는 것이었다. 때때로는 그것마저도 없애는 것이었다. 작품에 아무런 단서도 넣지 않았다. 작품 앞에서 구구절절 설명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빼기의 힘은 예상보다 훨씬 강력했다. 부담스럽게 울부짖는 유성영화보다 고요한 무성영화가 더 깊은 여운을 주듯, 아무런 장치 없는 미니멀리즘도 보는 이에게 더 큰 여운을 줄 수 있었다. 단서가 없기에 보는 이는 작품을 마음대로 해석했고, 장치가 없기에 보는 이는 작품에 자유롭게 공감하고 감동했다. 100명이 보면 100명 모두 다른 감상평을 내놓을 수 있었다. 이 또한 예술이었다. 그것도 아주 획기적인 예술이었다. 미니멀리즘은 "저게 예술이야?"라는 예술판의 분위기를 "저게 (누군가에게는)예술일 수도 있겠군!"이라는 분위기로 바꾸는 데 역할을 했다. 20세기 현대미술의 새로운 이정표로 우뚝 섰다. '하나의 답'을 찾아 헤맨 미술의 영역은 '답이 없는' 미니멀리즘 이후 비할 데 없이 넓어졌다. "사물에는 있는 그대로 보이는 것 말곤 어떤 의미도 없다." 미니멀리즘 대가로 꼽히는 도널드 저드의 말이자 이 사조를 요약하는 문장이다. 저드는 같은 크기, 같은 재질로 만든 직사각형 모듈을 놓은 후 '무제'라고 명명, 이를 작품이랍시고 내놓았다. 알아서 해석하고, 알아서 감상하라는 식이었다. 이 작품은 현재 미니멀리즘의 상징처럼 대우받는다.

아그네스 마틴, '무제6'
잭슨 폴록, '연보랏빛 안개 넘버 1'
앤디 워홀, 'Marilyn Diptych' [Tate Gallery, London]

마틴은 부정했지만, 그의 생과 그림에는 미니멀리즘의 향이 짙게 배어있었다.

빼기의 삶 속에서 피어나는 빼기의 작품들이었다. 1983년, 마틴은 '무제 6'을 내놓았다. 이 또한 침묵의 그림이었다. 설명 없는 이 그림은 하늘 위 구름이 낳은 작품 같기도, 용암 속 잿더미에서 건져올린 작품 같기도 했다. 이 안에서 누군가는 군더더기 없는 편안함, 누군가는 고독의 눈물, 누군가는 고통의 비명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작품은 훗날 마틴이 죽은 후 경매에서 약 607만달러(약 77억원)에 팔리게 된다. 마틴은 혼자 살면서 계속 이런 그림을 그렸다. 그녀의 작업 방식 또한 자기 그림처럼 간소했다. 잭슨 폴록이 캔버스 위에서 미친 듯 날뛰고, 앤디 워홀이 공장 기계를 가동하는 일과 빗대면 아주 '미니멀'했다. 사진작가였던 마틴의 친구 도널드 우드먼은 책 '아그네스 마틴과 나'에서 그녀의 작업 방식을 이렇게 썼다. "…마틴이 캠핑카에 가만히 앉아 창밖을 내다보는 모습을 자주 봤다. 보통 새로운 작품을 시작하기 전에 그랬다. 마틴이 열린 창밖으로 이렇게 소리치곤 했다. '지금 제가 일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요? 하지만 나는 일하고 있거든요! 단지 뭘 그릴지 생각하고 있을 뿐이에요. 지금 나는 명상 중이라고요.'"

기댈 건 영감 뿐…“난 세상을 등지고 그린다”
아그네스 마틴

그날도 어제와 같은 날이 이어질 듯했다.

마틴은 흔들의자에 앉아 멍하게 있었다. 늘 그랬듯 오롯이 자신과의 대면을 이어갔다. 종종 '목소리들'이 튀어나와 온갖 참견을 했지만, 어르고 달래며 능숙하게 잠재웠다. 그렇게 영감이 찾아오길 기다렸다. 하지만 오늘 마틴을 찾아온 건 다른 것이었다. "이제 여기에서 나가주쇼." 땅 주인의 통보문이었다. 그들을 탓하기는 어려웠다. 마틴은 누가 봐도 이상한 입주민이기는 했다. 이 때문에 몇 번의 사소한 다툼, 드물게 심각한 충돌을 겪고 있었다. 마틴은 짐을 쌌다. 황무지에서 벗어난 마틴은 친구 글림처에게 전화를 걸었다. "난 옷 한 벌 없는 빈털터리가 됐어." "어쩌려고?" 글림처가 말했다. 마틴의 목소리는 의외로 덤덤했다. "내가 여태 너무 호기롭게 살았다는 신호인걸. 내게 닥친 또 한 번의 시험이야."

아그네스 마틴, '세상을 등지고'
아그네스 마틴, 'I Love the Whole world'

마틴은 새롭게 다가온 시험도 수월히 극복했다.

사실 극복이랄 것도 없었다. 마틴은 그간 수도승처럼 살았다. 그 덕에 통통 튀는 혼도 온전히 붙잡을 수 있었다. 몸만 다시 정처 없이 떠돌 뿐이었다. 마틴은 황무지에서 쫓겨나고도 여전히 혼자 있기를 즐겼다. 가장 좋아하는 건 흔들의자와 침대였다. 또 다른 즐거움은 애거사 크리스티의 추리 소설,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음악, '칵테일의 왕' 마티니 등이었다. 그런 마틴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시간도 조금씩 늘려갔다. 세상은 그녀를 신비주의 화가, 은둔의 예술가로 칭하며 이름값을 높여줬다. 마틴은 그 덕에 종종 강연도 했다. 예술계 인사와 기자들을 만나 토론도 했다. 마틴은 이쯤 진정으로 화해한 듯했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껏 이어지던 숙명 같은 고독, 영감에 대한 집착, 예고 없이 찾아오는 '목소리들'의 투정에 반갑게 인사할 수 있는 상태가 된 것 같았다. 마틴은 점점 더 행복해지는 듯했다. 그녀는, 세상에 대한 미련을 더더욱 내려놓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해 나온 게 이런 그림이었다. 순한 바다의 색, 온화한 태양의 색, 따뜻한 대지의 색이 층층이 쌓여있다. 이 그림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각자가 소중히 간직했던 사랑과 우정, 평화의 순간을 떠올리게 한다. 비평가 랭의 비유 방식을 빌리자면 '알록달록한 콘 아이스크림, 챙이 넓은 밀짚모자, 반짝이는 모래사장, 바다로 향하는 기차' 같은 걸 상상하게 한다. '세상을 등지고(나의 세상으로 돌아가·With My Back to the World)'. 그녀가 지은 작품 제목이었다. 그녀는 이 제목으로 6개 시리즈를 만들었다.

아그네스 마틴, '무제'

1993년, 마틴은 뉴멕시코주 북쪽 마을인 타오스 내 노인 거주 단지로 이주했다. 그녀가 81살 때였다.

그리고 마틴은 1997년에 이 그림을 그렸다. 극한의 미니멀리즘을 추구한 그녀가 부린 몇 안 되는 사치, 순백색 BMW를 몰고 작업실로 오가며 한 땀씩 완성했다. 마틴은 언뜻 보면 똑같아 보이는 걸 거듭 그리면서 서서히 죽음을 향해 걸어갔다. 2004년, 마틴은 캔버스에 사각형을 그려넣었다. 그간 점과 선, 색만 고집하던 그녀가 담회색 바탕에 검은색 사각형을 두 개 떡하니 놓았다. 역시나 별다른 설명은 없었다. 제목 또한 '무제(Untitled)'였다. 하지만 마틴을 아는 사람들은 이 '미니멀리즘 그림' 속 사각형이 무엇을 뜻하는지 예상할 수 있었다. 그것은 죽음의 세포였다. 마틴은 그해 12월, 붓과 연필을 내려놓았다. 마틴은 평생 고독했지만, 임종 직전 며칠간은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시간을 보냈다. 죽을 때는 외롭지 않았다. 향년 92살이었다.

마틴은 타오스에 있는 하우드 미술관에 묻히길 바랐다.

그녀가 기증한 그림이 있는 전시실 근처 정원에서 영원히 잠들기를 기원했다. 하지만 이는 뉴멕시코주의 법으로는 힘든 일이었다. 그래서 마틴이 죽고 다음 해 봄, 그녀의 친구들이 다시 모였다. 늦은 밤 하우드 미술관으로 슬금슬금 들어갔다. 마틴이 원한 곳, 마틴이 꿈꾼 곳을 찾았다. 거기에 그녀의 유골을 조금씩 뿌렸다. 단조로운 흙과 풀 위로 마틴의 하얀 뼛가루가 흩날렸다. 이는 마틴이 남긴 마지막 작품 같았다. "나는 세상을 등지고 그림을 그렸어." 마틴이 그렇게 완전히 떠난 후에도 사람들은 그녀의 말을 오랫동안 잊지 못했다.

아그네스 마틴
아그네스 마틴, '오렌지 과수원'

〈참고 자료〉

이상한 날씨, 올리비아 랭, 어크로스

선이란 무엇인가, 스즈키 다이세쓰, 홍법원

요즘 미술은 진짜 모르겠더라, 정서연, 21세기북스

현대미술, 이렇게 이해하면 되나요?, 샘 필립스, 북커스

Agnes Martin and Me, Woodman, Donald, Lyone Artbooks

Agnes Martin, Martin, Henry, Schaffner Press

〈후암동 미술관 현대미술 편 읽는 순서〉

1) “벌거벗은 女로 우릴 조롱” 욕이란 욕 다 먹었다[후암동 미술관-에두아르 마네 편] - 최초의 모더니스트(모더니즘①) (2023. 6. 24.)

2)“11살 연하女와 비밀연애, 자식도 낳았다고?”…10년 숨겼다 ‘들통’[후암동 미술관-폴 세잔 편] - 현대미술 창시자(모더니즘②) (2023. 7. 1.)

3)“나체女에 웬 아프리카 가면?” 얼빠졌다 조롱당한 그의 ‘반전’[후암동 미술관-파블로 피카소 편] - 희대의 반항아(입체파) (2023. 5. 20.)

4)“내 이름은 로즈” 여장남자된 30대男 전말…‘빅픽처’ 있었다[후암동 미술관-마르셀 뒤샹 편] - 열정의 탐험가(레디메이드·개념미술) (2023. 6. 10.)

5)“외간여성과 시속 120km 광란의 음주질주” 즉사한 男정체 보니[후암동 미술관-잭슨 폴록 편] - 미국의 신화(액션페인팅) (2023. 7. 15.)

6)시뻘건 내 피와 교감해보겠나…울든, 기절하든 그대 마음[후암동 미술관-마크 로스코 편] -교감의 마술사(추상표현주의) (2023. 6. 17.)

7)“관음男-노출女가 만났네요” 조롱…둘은 ‘환상의 짝꿍’이었다[후암동 미술관-살바도르 달리 편] - 위대한 쇼맨(초현실주의) (2023. 7. 8.)

8)“여자랑 사느니 맹수랑 살겠다” 아내앞서 폭언…‘전쟁같은 사랑’을 한 부부[후암동 미술관-에드워드 호퍼 편] 고독의 화가(불모지) (2023. 8. 5.)

9)“난 고깃덩어리, 죽으면 시궁창에 던져버려” 폭탄발언…그는 ‘인간중독’이었다[후암동 미술관-프랜시스 베이컨 편] 고통의 화가(외딴섬) (2023. 7. 29.)

10)“죽일거야” 그녀가 쏜 3번째 총알이 몸 관통…죽다 살아났지만[후암동 미술관- 앤디 워홀 편] - 위대한 악동(팝아트) (2023. 6. 3.)

11)“흑인의 삶 어때?” 무례한 공격들…마돈나도 반한 27살男 무너졌다[후암동 미술관-장 미쉘 바스키아 편] - 자유의 반군(신표현주의) (2023. 5. 27.)

12)“엄마가 사라졌다, 속이 시원했다”던 그녀도 실종…1년뒤 ‘뜻밖’의 발견[후암동 미술관-아그네스 마틴 편] - 홀로 선 은둔자(미니멀리즘) (2023. 8. 12.)

yul@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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