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락(受諾)이라는 말의 의미는 요구를 받아들인다는 뜻으로 아주 간명합니다. 남의 주장이나 의견, 요구를 받아들이는 겁니다. 그런데 왠지 수락이라고 하면 윗사람이 아랫사람의 부탁을 받아들이는 느낌이 있습니다. 마치 허락한다는 느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의미로 볼 때는 좀 무거운 느낌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우리말에서는 요구를 받아들인다는 표현도 있고 들어준다는 표현도 씁니다.

우리는 수락이라는 말을 평상시에는 잘 쓰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일단 우리가 뭔가를 수락할 일이 없기 때문이기도 할 겁니다. 누가 우리에게 엄청난 부탁을 하는 일도 잘 없으니 수락할 일이 없는 것도 당연한 일이겠죠. 그래서 수락이 더 무겁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들어주기 힘든 요구나 부탁을 받아들일 때 수락이라는 표현이 어울립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수락이라는 표현은 대통령 후보 ‘수락 연설’이라는 말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제가 늘 어색하게 생각하는 표현입니다. 일반적으로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는 각 정당의 후보로 선출되는 과정이 있습니다. 그 때 치열한 경선과정을 거치고 후보로 선출되면 후보 수락 연설을 합니다. 어색하죠. 본인이 대통령이 되려고 애를 쓰고, 후보가 되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후보 역할을 수락한다니 어색한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영어에서는 acceptance speech(수락 연설)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왜 이런 풍습이 생겼을까요? 저는 이 해답을 전헌 선생의 강의를 담은 책 ‘몸이 되는 말’에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라는 표현입니다. 그리스도는 머리에 기름을 바른다는 표현이라고 합니다. 기름 부음 받은 자라고도 합니다. 머리에 기름을 발랐다는 것은 어떤 역할을 부여받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보통은 왕, 예언자, 제사장의 역할을 맡은 이에게 머리에 기름을 바른다고 합니다. 일종의 자격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세 가지 일을 모두 하는 이를 그리스도라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왕이나 예언자나 제사장이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서로 하려고 원하는 일이 아니었다는 의미입니다. 왕 노릇이 얼마나 피곤하였을까요. 앞날의 일을 내다보는 예언자의 삶도 괴롭기 짝이 없었을 겁니다. 좋은 일을 예언하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나쁜 일을 내다봐야 한다면 고통스러웠을 겁니다. 제사장도 마찬가지죠. 모두가 쉬는 안식일을 준비하는 괴로움, 금욕적인 생활의 괴로움은 상상 이상일 겁니다.

당연히 이런 일들은 받아들이고 싶은 일이 아닙니다.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은 일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사람들 혹은 하늘이 그 일을 맡긴다면 마냥 피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운명으로 받아들여야 했을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왕도, 예언자도, 제사장도 수락이 필요할 겁니다. 낮은 자세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봉사하겠다는 겸손한 자세입니다. 수락연설은 그런 느낌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세상이 바뀌었습니다. 봉사하라고 맡긴 자리에 앉고 나서는 사람이 변합니다. 아니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그 자리에 앉으려고 애를 썼을 겁니다. 그 자리에 앉으면 권력자가 되고, 권위적이 됩니다. 스스로를 능력자라고 생각하고 힘을 쓰려고 합니다. 위험해 집니다. 사람들이 고맙다고 하니까, 그 일을 맡기에 훌륭하다고 하니까 자신이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게 문제입니다. 내가 특별한 것이 아니라 힘든 일이지만 기꺼이 받아들여 열심히 책임을 다하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저는 수락 연설이라는 표현을 보면서 생각합니다. 언어 속에는 그 때의 정신과 마음이 남아있는데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저는 언어를 보면서 다시 생각이 바뀌기 바랍니다. 내가 왜 그 자리에 있는 것인지? 그 자리에 간 나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주어진 책무를 묵묵히 하기 바랍니다. 왕도 예언자도 제사장도 모두 누군가에게 역할을 부여받은 사람들입니다. 힘든 일을 맡은 사람입니다. 고마운 사람이죠. 그런 평가를 받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