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시계
실시간 뉴스
  • “한때 경주마처럼 달려…이 무대는 희망·위로”
소프라노 홍혜란, 23일 예술의전당 독창회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아시아계 최초 우승
앞만보고 달려 명성 얻었지만 ‘번아웃’
아버지 죽음이 음악인생 변곡점으로
지난 몇년은 소중함·삶을 찾아간 시기
커리어가 중요한 것 아닌 걸 알게 돼
홍혜란은 초등학교 때부터 노래하는 사람을 꿈꿨다. 강원도 정선에서 태어나 대전에서 자랐고, 성악가들의 ‘꿈의 무대’인 뉴욕 메트로폴리탄 무대에서 활동하다 한국으로 돌아와 음악가이자 교육자이자 엄마로서의 오늘을 치열하게 살고 있다. 박해묵 기자

“그녀, 오늘은 거기에 있어? 집을 나갔어? 내가 오늘 너를 찾을게.”

조금 쑥스러운 고백을 하듯 이렇게 말했다. “제게 노래는… 전 친구라고 생각해요. 좀 웃긴데… 이름을 지었어요.” 소프라노 홍혜란이 ‘노래’라는 친구를 부르는 이름은 ‘그녀’다.

“어릴 때 내게 와줬고, 평생 함께 가야할 친구죠. 마음 같아선 전부라고 하고 싶은데, 그러면 언젠가는 제가 무너질 것 같고, 가족이라고 하기엔 너무 매달릴 것 같아요. 가장 친한 친구 정도. 너와 나의 거리는 그만큼 유지하지만 평생 같이 가자. 이렇게 생각하면서 하고 있어요.”

노래를 처음 부른 것은 초등학교 때였다. 강원도에서 태어나 정선의 밤하늘을 보며 노래를 불렀다. 누구도 그가 성악을 하리라곤 예상치 못했다고 한다. 도리어 말렸다. 모두가 반대했지만, 스스로는 믿었다고 한다. 혹시 모를 재능 때문이 아니었다. “누구보다 노래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세상에서 내가 제일 노래를 잘 할 순 없지만, 제일 좋아할 순 있을 것 같았어요. 어릴 때 제 마음 안에서 결정을 했어요. 난 노래하는 사람이라고요.”

‘미래를 의심받던 소녀’는 시간이 쌓여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성악 부문(2011년)의 우승자가 됐다. 아시아계 최초였다. 성악가들에겐 ‘꿈의 무대’로 불리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무대에 섰다. 세계적 명성을 얻은 10년의 시간이 그의 이름 뒤로 따라온다. 4년 만의 독창회 ‘호프(HOPE)’(1월 23일, 예술의전당)를 앞두고 준비에 한창인 소프라노 홍혜란을 최근 서울 삼성동에서 만났다. 그는 “코로나19로 모두가 힘든 시기에 독창회를 여는 것이 괜찮을지 고민했다”며 “그래도 누군가는 예술이라는 것을 통해 희망을 발견하고 위로를 줄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무대를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오랜만의 독주회는 희망과 위로가 담긴 가곡들로 구성했다. 이번 공연은 슈베르트의 ‘아베마리아’, ‘숭어’를 비롯해 스페인과 한국 가곡을 선보인다. 한국 가곡은 2020년 1월 발매한 앨범 ‘희망가’에 수록된 곡들이다. 돌아가신 그의 아버지가 즐겨 부르던 ‘희망가’를 비롯해 ‘보리밭’ ‘봉선화’와 같은 곡이 앨범에 담겼다.

한국예술종합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줄리어드 음악원에서 유학한 후 접어든 프로의 세계는 치열했다. 콩쿠르 이후 그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다. 전 세계 무대가 그를 찾았다. “이전까진 누구도 인정해주지 않아 혼자 꾸역꾸역 개척했다면, 우승 이후론 갑자기 성악 천재가 돼있더라고요.”

홍혜란은 “콩쿠르 후론 의도하지 않았는데 더 유명해지고 싶고, 더 잘 하고 싶다는 욕심들이 생겼다”고 했다. 주류 무대에서의 삶은 쉽지 않았다. 유일한 동양인으로 오페라 무대에 서는 동안 인종차별적 시선도 적잖이 받았다. “아무리 잘 한다 해도 원어민이 듣기엔 완벽하지 않은 발음이나 소극적인 모습은 ‘네가 한국인이라 그래’라는 반응으로 돌아왔어요.” 극복하려 해도 힘든 상황들은 스스로를 채찍질하게 한 이유였다.

“미국에 있을 때 별명이 경주마였어요. 친구들이나 선생님이 그러더라고요. ‘넌 옆도 뒤도 안 보고, 앞으로만 달려가잖아.’ 그럴 정도로 경쟁심을 좇았어요. 내가 원하던 삶, 원하는 노래는 이게 아닌데 싶어 우울감이 오더라고요. 전에는 노래하는 매순간이 기쁨이고 감사함이었는데, 그 땐 기쁘지 않았어요.”

그의 음악 인생에 큰 변화가 찾아온 것은 아버지와의 이별이었다. 2019년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죽음은 그의 삶을 돌아보게 한 계기였다. “커리어가 제 인생에서 중요한 것이 아닐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제가 노래하는 이유는 말로는 표현하지 못하는 것을 노래를 통해 전하고, 조금이나마 따뜻한 위로를 건네고 싶은 거였는데 그동안 찾아 헤매던 건 그게 아니더라고요. 지난 몇 년은 제게 정말 소중한 것, 제 삶을 찾아간 시기였어요.”

아버지를 떠나 보내고 코로나와 함께 했던 지난 2~3년, 홍혜란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다. 하루 24시간을 잘개 쪼개 엄마이자, 교육자이자, 예술가로 산다. 한국에 돌아와 모교(한예종)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육아를 병행한다. 힘들게 얻은 딸은 벌써 20개월이 됐다. “가르쳐준 적도 없는 동요를 부르는” 타고난 유전자다. 아버지에게 보내는 선물인 가곡 앨범도 그 사이 냈다. “이제는 늦었다고 생각했는데 저와 가장 친한 짝꿍인 남편이 아직도 늦지 않은 것 같다고 응워해줬어요.” 홍혜란의 남편은 한예종 1학년 때 만나 같은 길을 가고 있는 세계적인 테너 최원휘다.

“엄마로서도, 교수로서도, 노래하는 사람으로도 온전히 마음을 쏟고 싶은데, 때론 세 가지 모두 충실하지 못한 것 같다는 생각이 저를 괴롭혔어요. 제 안에서 결론을 내렸어요. 모두에게 완벽하려는 욕심을 버리자, 주어진 시간에 최선을 다하면 되지 않을까 하는 거였어요.”여기에 하나를 더했다. 그 “한 가지를 놓쳐 한순간 번아웃이 왔기 때문”이다. “제 자신을 생각하지 못했더라고요. 하루에 30분이라도 투자해 제게 관심을 주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4년 만의 무대는 세계적인 소프라노이자, 평범한 누군가처럼 많은 짐을 지고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의 홍혜란을 만나는 시간이다. 성악가로서 그는 대단한 성공을 목표로 두진 않는다. “모든 음악가가 그렇듯, 저 역시 제 부족한 소리가 누군가에게 힘이 되고 위로가 된다면 좋겠어요. 이 마음을 유지하는게 저의 목표예요.” 고승희 기자

shee@heraldcorp.com

맞춤 정보
    당신을 위한 추천 정보
      많이 본 정보
      오늘의 인기정보
        이슈 & 토픽
          비즈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