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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장에서]허울 뿐인 ‘기울어진 운동장’ 외침
금융사 IT기업 M&A 허용
실제 성사된 사례는 1건뿐
‘핀테크 편애’ 투정에 그쳐
보수적 분위기·마땅한 투자처 없는 어려움도

[헤럴드경제=정경수 기자] ‘기울어진 운동장’ 바로 잡기는 금융권 최대 현안으로 떠오른 이슈 중 하나다. 지난 8월 취임한 고승범 금융위원장이 역점 사업으로 꼽으면서 ‘뜨거운 감자’가 됐다.

그간 금융사들은 금융위가 소수 플랫폼 기업에 특혜를 주고 있다며 ‘동일기능 동일규제’를 주장해왔다. 수십년 간 지켜온 금산분리 규제(금융-산업 자본)를 완화해 빅테크에 인터넷전문은행을 열어줬고, 대출모집인이 한 금융사 대출 상품만 취급하는 ‘일사 전속주의’ 규제도 핀테크만 예외적으로 허용하기도 했다. 금융사들은 “혁신금융이라는 명목으로 빅테크만 편애하는 것 아니냐”며 볼멘소리를 했다.

불만 가득한 금융사들을 달래기 위해 금융위가 내놓은 당근 중 하나가 ‘핀테크 투자 가이드라인’이다. 2019년 10월부터 시행된 가이드라인은 금융사가 투자할 수 있는 분야를 전자금융업·신용정보업에서 인공지능(AI)·빅데이터·사물인터넷(IoT) 등 신기술 전반으로 넓혔다. 핀테크의 지분 15~20%까지만 출자할 수 있었던 규제도 사라졌다. 심지어 투자에 실패하더라도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면책 조항까지 담겼다.

제도 시행 후 2년이 지난 현재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허무한 결과물 뿐이었다. 2년 간 가이드라인을 이용해 금융사가 기술기업에 투자한 사례는 단 1건에 불과했다. KB증권은 작년 9월 이스트소프트의 자회사 줌인터넷과 함께 핀테크 합작법인 ‘프로젝트바닐라’를 설립해 주린이를 위한 간편 주식거래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주장이 공허하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빅테크의 금융업 진출을 허용해준 대신 금융사들도 비금융업에 마음껏 진출해보라고 길을 열어줬지만 실제론 복지부동한 모습만 보였다. 금융권 관계자는 “아직까지 금융사들이 본업만으로도 먹고 살만하다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핀테크 업체 대표는 “금융사들은 투자하면서 꼭 자기들과 독점적으로 사업을 하길 원한다. 다수의 공급업체·고객이 모이는 플랫폼의 특성을 이해하지 못한 접근이다. 추구하는 방향이 다르다보니 여러 차례 투자가 불발된 경험이 있다”고 전했다.

물론 금융사 나름대로 어려움이 있다. 한 보험사 대표는 “새로운 분야에 투자하려고 하면 이사회를 설득하는 것부터 어려움을 겪는다. 수익모델이 분명하지 않으면 시도조차 하지 않으려고 한다. 보수적인 금융권 분위기가 혁신을 막고 있다”고 토로했다.

마땅한 투자처를 찾기 어렵다고도 한다. 이성복 자본시장연구원 박사는 “이미 승자독식인 비금융 플랫폼에 뛰어들기보단 금융업의 디지털화를 더 적극적으로 추진하자는 인식이 있다”고 전했다.

그럼에도 금융위는 가이드라인을 1년 더 연장하고, 이를 법제화한 ‘핀테크육성지원법’을 만들 계획이다.

정말 운동장이 기울었다고 판단된다면 금융사들은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말고 잡아야 한다. 동일규제를 외치며 빅테크의 금융업 진출을 막는 게 생존의 길이 아니다. 산업 간 융합 흐름에 올라타야 한다. 최선을 다하면서 동등한 경쟁을 요구해야 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더 이상 ‘기울어진 운동장’ 논리는 공허하게 들릴 뿐이다.

kwater@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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