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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5m 문서, 조선 공신록 국보 된다, 훈장 잔치 20회
‘공신 인플레이션’ 이면엔 탐욕,살육,환국
문화재보존 잘되고 특이해 보물서 국보로
남장사 괘불도, 대둔사 경장은 보물 예고
봉암사 마애여래좌상 등 3건은 보물 지정

[헤럴드경제=함영훈 기자] 25m에 달하는 조선 숙종 때의 공신 관련 문서인 ‘20공신회맹축-보사공신녹훈후’가 국보로 승격 예고됐다.

숙종조는 군신간 합리적 역학관계가 국운 융성에 미치는 영향으로 보았을때 조선왕조의 중대한 분기점이었다. 수차례 엎치락 뒤치락 환국들, 공신책록와 피비린내나는 숙청의 교차, 이것들이 국운융성의 발목을 잡고, 후대 왕들의 불행을 빚었다는 비판도 들린다. 숙종때 만들어진 초대형 공신잔치 기록물이 국보로 승격 예고됐다. 물론, 그들이 잘 나서 승격되는 것은 아니다. 사진은 숙종이 묻힌 명릉.

문화재청은 상주 남장사 영산회 괘불도 및 복장유물과 구미 대둔사 경장을 보물로 지정 예고했으며, 문경 봉암사 마애여래좌상 등 조선 불교문화재 3건은 보물로 지정했다.

20공신녹훈후는 1680년(숙종6) 8월 30일 열린 왕실의 의식인 ‘회맹제(會盟祭, 임금이 공신들과 함께 천지신명에게 지내는 제사)’를 기념하기 위해 1694년(숙종 20) 녹훈도감(復勳都監)에서 제작한 왕실 문서다.

이 의식에는 왕실에서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내린 이름인 ‘공신(功臣)’ 중 개국공신부터 보사(保社)공신에 이르는 역대 20종의 공신이 된 인물들과 그 자손들이 참석해 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하였다. 조선 태조~숙종 사이 290년 동안 20회의 공신 잔치가 벌여졌다.

정파 간 탐욕이 대립한 끝에 쟁투의 결말, 즉 환국이 되면 왕과 집권정파는 공신 잔치를 벌였다. 집권에 따른 농토, 이권, 특권 분배 등 논공행상도 따랐고, 그만큼 백성에게 나눠줄 것은 줄었다.

또한 정치권력 투쟁에서 패퇴한 자들은 피살, 멸족 등을 당했다. 나라의 인재들은 패자의 그림자가 덧씌워지는 순간 제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상실했다.

피의 숙청, 공신책록의 달콤함 때문에, 학습효과가 이어지면서 조금이라도 오래 집권하려는 정치공학의 기술만 발달해, 결국 나중엔 나라를 일본에 팔아먹는 결과를 초래한 망국적 노론 독재로 이어지게 된다. 공신 책록, 훈장 잔치의 배후엔 거대한 피의 강이 흘렀고, 조선의 역사는 거꾸로 흐르는 경우가 많았다.

문서가 하도 크고 기이하며, 관련 기록들의 보존이 잘 되는 등 문화재적 가치가 높기에 격상되는 것이지, 그 공신들이 잘 나고 존경받을 만 해서 문화재 격이 높아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20공신회맹축-보사공신녹훈후’ 중 일부
남장사 괘불도
대둔사 경장

abc@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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