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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탈한 응형과 진중한 이응광 사이…“재앙 속에서 예술의 힘 전하고 싶었다”
진중한 바리톤 이응광과 소탈한 ‘응형’ 사이
클래식 아티스트 최초 ‘유튜버’…‘응광극장’ 일상 공개
 
루체른 극장 ‘세비야의 오페라’ 포기하고 입국
코로나19로 올 한 해 공연 30회 취소
성악가 최초 ‘랜선 공연’으로 소통
“재앙 속에서 예술의 힘 전하고 싶었다”
진지한 바리톤 이응광에게 소탈한 부캐 ‘응형’이 생겼다. 클래식 아티스트 최초로 자신의 일상을 유튜브에 공개하며 대중과 소통하는 이응광의 새 별칭. 이전엔 SNS를 하는 것조차 꺼렸던 그가 ‘응광극장’이라는 유튜브 채널을 통해 자신을 보여주고, 랜선 공연을 통해 음악으로 코로나 시대를 위로하고 있다. 박해묵 기자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누구도 가지 않은 길을 가기로 했다. 바리톤 이응광의 이름 앞에 ‘성악가 최초’라는 수식어가 생겼다. 엄숙하고 진중한 외피를 걷어내자, 소탈한 부캐(부캐릭터) ‘응형’이 등장했다. 클래식 아티스트가 자신의 일상을 유튜브로 공개하는 것은 이응광이 처음. “클래식이라는 작은 바운더리에서 많은 것을 의식해왔는데, 이제 조금 더 저의 길을 보여줘야지 싶더라고요. 결심이라기 보다, 자연스럽게 그렇게 됐어요.” ‘나이’로 인한 변화라고, 이유를 들었다. “제가, 볼혹이에요. (웃음)”

입국 전, 스위스 루체른에서 지내던 인간 이응광의 모습은 유튜브 채널 ‘응광극장’에 담겨 한 편 한 편 공개됐다. 화려한 무대 위 오페라 가수는 무대 아래에서도 ‘하드캐리’(활약상이 뛰어난 사람을 뜻하는 신조어)였다. “워낙 서정적인 노래를 많이 하니까, 진지하게만 보더라고요. 조금 더 나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더 많은 사람들과 소통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1만 5000번을 저어야 완성되는 ‘달고나 커피’를 제조했고, 홍합스튜와 파스타를 요리했다. 운동은 또 어찌나 열심히 하는지…. “아티스트 이응광의 모습 말고도 제 안엔 다른 끼가 있어요. 응형은 조금 더 가볍고, 유머러스해요. 그동안 많이 참았어요.” 웃지도 않고 진지하게 입을 뗀다. ‘절제’가 미덕이라 생각했던 때도 있었지만, 이젠 달라졌다. 2020년의 끝자락에 만난 이응광은 “지금도 절제한게 이정도”라며 “아직도 보여줄 건 무궁무진하다”고 한다.

‘볼혹’을 맞으며, 이응광은 많은 변화를 겪고 있다. 클래식 아티스트 최초로 유튜버가 됐고, 성악가 최초로 ‘랜선 공연’(방구석 클래식)을 개척했다. 난생 처음 경연이자 예능 프로그램 (MBN ‘로또싱어’)에도 출연했다. 서울대 음대와 독일 한스아이슬러 음대에서 공부한 이후, 스위스 독일 등 유럽 본토에서 주역으로 활약했던 이응광이 대중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선 해였다.

바리톤 이응광. 박해묵 기자

중대한 결정의 배경에는 ‘팬데믹’ 시대를 살아가는 음악가로의 고민이 있었다. 올해 이응광은 스위스 루체른 극장에서 공연하는 오페라 ‘세비야의 이발사’에서 타이틀롤을 맡았다. 지금의 한국살이는 이 무대를 포기하고 얻었다. “코로나19가 터지며 스위스에서 연말까지 머물며 공연을 마치느냐, 한국에서 내게 조금 더 의미있는 활동을 하느냐를 놓고 많이 고민했어요.” 덕분에 이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 팬들 앞에 펼쳐지고 있다. “대한민국 사람이고, 클래식 가수로 하고 싶은 일도 많았다”고 한다.

스위스에선 스무 번의 오페라 무대 중 가장 중요한 첫 무대를 포함해 딱 네 번의 공연에만 섰다. 열여섯 번을 포기한 만큼, 아쉬움도 적진 않다. 특히 이번 작품은 코로나19의 시대상을 반영해 완전히 각색한 버전이었다. “스위스 정부와 루체른 시에서 세 시간 동안 오리지널 오페라를 할 수 없다는 지침이 내려와, 100분으로 축소했어요. 그 과정에서 ‘세비야의 이발사’는 ‘코로나의 이발사’로 바뀌게 됐죠.” 주인공 피가로가 코로나19로 이발소를 폐업하고, 돈을 벌기 위해 양심까지 버리며 온갖 일을 다 하는 캐릭터가 됐다. 의상과 연출도 파격적이었다. 가터벨트를 차고, 계단을 내려오며 춤을 췄다. “고생을 많이 한 만큼 아쉬움이 남더라고요.”

스위스 루체른 극장 무대에 오르는 ‘세비야의 이발사’에서 타이틀롤 피가로를 맡아 열연한 이응광. “코로나19 시대에 맞게 각색”된 이 작품은 코로나19로 이발사를 폐업한 주인공 피가로가 돈을 벌기 위해 양심까지 버리며 온갖 일을 다 하는 모습을 담았다. 이응광은 “가터벨트를 차고, 춤을 추는 파격 변신”을 시도했다. [봄아트프로젝트 제공]

결심과 함께 한국행 비행기에 오르자, 스위스의 상황은 급변했다. “일주일 사이에 400~500명이었던 확진자가 5000명이 됐고, 한국에서 2주 자가격리를 하는 동안 1만 명까지 나오더라고요.” 그는 스스로 ‘운이 좋았다’고 말한다. “지금은 우리도 확진자가 늘고 있지만, 한국에 와서 우리의 방역 수준에 굉장히 감탄했어요. 유럽에 비하면 엄청나게 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올 한 해 취소된 공연만 해도 무려 30회. 코로나19로 그는 화려하고 멋진 국내외 무대를 잃었다. ”처음엔 좌절했고, 상실감도 컸어요.” “세계적인 재앙 속에서 무대가 사라지자, 클래식 아티스트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주저앉을 순 없었다. “답답하고 불안한 이 시기”에 “음악으로 위로할 수 있는” ‘랜선 콘서트’를 시작했다. 코로나19가 확산하기 시작한 지난 2월, ‘방구석 클래식’이라는 타이틀로 관객과 만났다. 최초의 온라인 클래식 공연이었다.

“경제적 활동이 안 된다는 생각을 버리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걸 해보자 싶었어요. 이런 재앙 속에서 예술의 힘을 다시금 전해야겠다는 사명감이 생기더라고요. 예술이 사람들에게 정신적인 힘, 영혼의 건강한 힘을 전해줄 수 있다고 믿고 있으니까요. 클래식을 알린다는 생각보다도, 클래식을 통해 공감하고 싶다는 마음이 컸어요.”

휴대폰을 앞에 두고 노래하는 것은 낯선 경험이었다. “노래하면서 소통하고, 댓글로 실시간으로 답을 하는게 어색하더라고요.” 익숙하지 않아 정신없고, 그래서 색다른 경험이었다. “랜선 공연을 통해 소통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됐어요. 한두 사람이라도 제 노래를 듣고 진심으로 위안을 얻고, 감동과 삶의 희망을 느꼈다면, 그것 자체로 의미있는 일이더라고요.” 최근의 이응광은 무대의 크기를 가리지 않는다. 작은 모니터 너머의 관객과 소통하고, 지방의 작은 무대에서 100명의 관객 앞에 선다. 이런 시도들이 이응광에겐 큰 변화다. 그는 “그 어떤 세계적 무대에 섰을 지언정, 무대의 크기는 중요하지 않다”고 했다. “어느 곳에서건 제가 가지고 있는 가치를 믿어요. 무대와 상관없이 제가 가진 예술적 모습을 보여주드릴 수 있다는 자부심이 있고, 그 모습을 통해 나의 진정한 가치를 알아줄 거라는 믿음이 있어요.” 크든 작든 무대의 크기를 떠나 이응광은 스스로에게 의미를 주는 무대에 서고 싶다는 마음이다.

바리톤 이응광. 박해묵 기자

돌이커 보면, 올 한 해 여러 활동들은 음악가로서 전하는 그만의 대화였다. 음악을 매개로 성실하게 사람들의 마음을 두드렸다. 때로는 위로를 건넸고, 때로는 희망을 안겼다. 최근 크리스마스 캐럴 음반을 낸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건조하고 팍팍한 삶에 크리스마스 음악으로 선물을 주고 싶다”는 진심을 담았다. “이 시기에 전할 수 있는 따뜻함을 담고 싶었어요. 이 음악을 듣는 순간만이라도 크리스마스에 대한 따뜻한 기억을 떠올리면 좋겠다는 생각이었어요.” 재즈와 만난 바리톤의 깊은 음색은 길고 긴 감영병 시대를 지나는 사람들의 지친 마음을 어루만지는 힘이 있다. 재즈의 즉흥성으로 인해 “원테이크로 녹음한 앨범”이자, 똑같이 하라면 다시는 못하는 “한 번뿐인 녹음”이 됐다. 벌써부터 반응이 좋다. 이응광의 SNS로 “없던 신심(信心)이 생긴다”는 피드백까지 왔다.

“경북 김천의 작은 시골”, 그 중에서도 “메인 시골”에서 나고 자라 22년간 성악 외길을 걸어왔다. 그는 “클래식 가수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고 했다. 지금은 또 다른 목표를 뒀다. 그의 앞에 세워질 이정표는 스스로 그리기로 했다.

“이제부터는 클래식 가수로서 걷지 않은 길을 걷고 싶어요. 지금까진 훌륭한 선배들의 길을 따르는 것이 목표였는데, 마흔부터는 제가 주체가 돼 새 시대에 맞는 새로운 클래식 가수로의 행보를 해보려고요. 후배들에게도 저렇게 다양한 활동을 하는 선배의 길도 있다는 것, 그러면서도 예술가로의 가치와 품위를 가져갈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제가 가진 가치와 신념을 잃지 않고, 오십이 되든 육십이 되든 늙어가는 모습 그대로 음악을 하는 것이 저의 바람이에요.”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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