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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기창의 아내 아닌…‘작가 박래현’을 보다
박래현 탄생 100주년 회고전
김기창의 그늘에 갇히지 않고
생활속 주제·재료·기법 탐구

끝없이 실험하고 집요하게 적용
‘한국화 현대화’위해 평생 고민

태피스트리·판화 등 다양한 변주
엄마로, 아내로, 작가로 ‘삼중통역’
박래현, 노점, 1956, 종이에 채색, 267x210cm, MMCA소장. 국전 대통령상 수상작
박래현, 잊혀진 역사 속에서, 1963, 종이에 채색, 150.5x135.5cm, 개인소장
박래현, 시간의 회상, 1970-73, 종이에 에칭, 61x46cm, MMCA소장
우향 박래현 회고전 ‘삼중통역자’ 전시전경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힐마 아프 클린트(Hilma af Klint·1862-1944). 스웨덴 출신의 화가이자 최초의 서양 추상미술작가다. 추상미술의 선구자라고 불리는 칸딘스키(1866-1966)보다도 앞서서 추상미술을 시도했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생소하다. 뉴욕 구겐하임미술관에서 2018년 대대적인 개인전을 열기 전엔 최초의 추상미술작가가 여성이었다는 것도, 그의 작업 경향에 대해서도 잘 알려지지 않았다. 심지어 뉴욕타임즈에서는 ‘Hilma who? no more’(힐마 누구? 더이상은 아니다)라는 기사로 클린트의 작업을 재조명 했다.

한국에도 여성작가라서, 또한 당대 거장이었던 남편을 두었기에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던 작가가 있다. 우향(雨鄕) 박래현. 국립현대미술관(관장 윤범모)은 박래현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박래현, 삼중통역자’전을 덕수궁 전관에서 개최한다.

전시는 철저하게 박래현만을 조명한다. ‘청각장애를 가진 천재 화가 김기창의 아내’가 아닌 작가 박래현이다. 전시는 도쿄여자미술학교 3학년이던 23세에 그린 ‘단장’으로 시작한다. 조선미전 총독상 수상작이다. 소녀가 경대 앞에서 꾸미고 있는 모습으로, 아무 배경없는 큰 화면에 붉은 경대와 검은 옷을 입은 소녀를 대담하게 배치했다. 화장대 위의 화장솔, 레이스 소매단 등 섬세한 세부묘사도 돋보인다. 일본화를 학습하며 기본기를 갖췄고, 해방 이후에는 일본화의 자취를 지워내고 관념적 전통회화를 답습하지 않고 현대에 어울리는 ‘한국화’를 창작하기에 몰두했다. 김예진 학예연구사는 “해방 이후 한국화의 현대화, 동양화의 당대화를 고민했다. 박래현의 키워드는 ‘현대’였다”고 설명한다.

김기창과 결혼후에도 화업을 계속 이어간다. ‘작업을 계속한다’를 조건으로 했다고 하지만 결혼생활은 쉽지 않았다. “아침 6시쯤 일어나 기저귀 빨기, 밥 짓기, 청소하기, 아침 식사가 끝나면 이것저것 치우고, 닭의 치다꺼리, 아기보기, 정오면 점심먹고, 손이 오면 몇 시간 허비하고, 저녁 먹고 곤해서 좀 쉬는 동안에 잠이 들면 자 그러면 본업인 그림은 언제 그리나”(결혼과 생활, 1948)하고 푸념한다. 그럼에도 1956년 1월 막내딸을 출산하고 네 아이의 엄마가 되고서도 같은해 5월 김기창과 부부전을 개최하고 새로운 화풍으로 평단의 호평을 받는다. 한 달 뒤엔 6월에 ‘이른 아침’으로 대한미협전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11월엔 ‘노점’으로 국전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한다. 화풍의 변화도 계속된다. 먹과 종이를 쓰지만 담채의 맑은 색상, 기하학적으로 분할된 색면, 예리한 필선 등 실험이 이어진다.

가사에 쫓겨 스스로를 ‘예술가라 할 수 있는가’라고 번민했던 박래현은 그럴수록 시간을 쪼개 작품을 제작했다. 시장에서도 김기창과 박래현이 함께 작업한 부부공동작업에 대한 니즈가 많았다. 당대 최고의 스타커플이자 잉꼬부부가 그려낸 그림을 좋게 평가한 것. 전시된 ‘봄C’는 부부공동작품이다. 박래현은 거대한 등나무를, 김기창은 참새를 그리고 글을 썼다. 가정을 지키는 자신을 나무로 자유롭게 화업을 이어가는 남편이 참새로도 해석된다.

박래현은 김기창의 그늘에 갇히지 않고, 생활속에서 예술의 주제, 재료, 기법을 탐구했다. 새, 자궁, 알과 같은 이미지는 초기작품부터 말년까지 반복·변주된다. 1960년 처음으로 해외를 방문한 이후, 추상작업으로 본격적으로 넘어간다. 물감과 아교의 번짐효과, 다양한 채색기법을 활용한 작업이 주를 이룬다. 1967년 상파울루비엔날레를 참석으로 중남미와 미국을 방문한 그는 1974년까지 뉴욕에 체류하며 태피스트리와 판화를 연구했다. 동판화 기법을 하나씩 마스터하며 다양한 표현 방법을 익혁고, 다시 기술로부터 자유로워진 작품을 선보인다. 귀국후 간암으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끝없이 실험하고 집요하게 적용하며 자신의 예술세계를 만들어 갔다. 김 학예연구사는 “박래현은 새로운 기법을 익히고 통달하고 활용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무척이나 짧았다. 보통 1년간 숙달해야하는데 3개월만에 마치기도 했다. 유족들의 말에 따르면 ‘잠을 거의 자지 않았다’고 한다”고 말했다. ‘천재적’이란 수식어는 일반인을 뛰어넘는 노력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번 박래현 회고전 전시명은 ‘삼중통역자’다. 미국에서 여행가이드의 영어를 해석해 구화와 몸짓으로 남편 김기창에게 설명해 주는 것을 ‘삼중통역한다’고 말했던 것에서 따왔다. 미술관에서는 “회화, 태피스트리, 판화라는 세가지 매체를 넘나들며 연결지었던 그의 예술세계로의 확장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전시내내 엄마로, 아내로, 작가로 살았던 작가의 모습이 삼중통역자로 읽힌다. 워킹맘으로 살아가는 이시대의 많은 여성들에게 그리고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남성들에게 더욱 울림이 큰 전시다. 내년 1월 3일까지. 이한빛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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