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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재연의 다시, 위안부 문제-②] 정신대와 일본군 위안부, 그리고 전시 성노예까지
※ 문제의 본질로 돌아가자. 어떤 접근이 위안부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가. ‘위안부 문제’와 ‘위안부 문제의 해결’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외교’는 왜 해결책이 될 수 없었나. 답은 지난 30년간 발전한 위안부 담론을 추적하면 찾을 수 있다.
본 기자는 그 답을 함께 찾기 위해 이번 기획기사를 준비했다.
운동·외교현안·연구분야·국제 여성 인권문제로서 위안부 담론이 발전한 과정을 파헤치고자 한다.

[헤럴드경제=문재연 기자] 1990년 윤정옥 이화여대 명예교수의 특별기획취재를 계기로 한국사회는 일본군 위안소 제도를 전시 성범죄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당시 언론에서 ‘위안부’란 단어는 ‘유엔군을 위해 동원되는 성접대 여성’을 표현하기 위한 용어로 많이 사용하고 있었다.

1992년 8월 1일자 동아일보 기사. 과거 정부와 언론, 시민단체는 위안부의 구조와 운영방식, 피해에 대해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이 때문에 일본군 위안부 명칭도 제대로 정립되지 못했다. 고(故) 김학순 피해자 할머니의 기자회견을 계기로 정부는 위안부 실태를 조사한 보고서를 발표했으나 이때 당시 사용된 위안부의 명칭은 '종군위안부'였다. [사진=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윤 교수의 보도를 계기로 한국사회는 ‘위안부’에 내재된 폭력성과 범죄성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1991년 11월 한국교회여성연합회, 대한YMCA연합회, 이화여자대학교여성학연구회 등 13개 여성단체가 모여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를 발족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정의기억연대(정의연)의 전신이라 불리는 정대협이다.

명칭에 ‘정신대’가 들어간 이유는 당시 정대협조차 위안소 제도의 구조를 확실하게 파악하지 못했으며, 근로여성의 형태로 모집되는 줄 알았다가 팔리는 구조가 확인됐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실제 윤 교수는 자신의 기사에서 “한국 여성들은 ‘슈셍야’(노동중개인)에게 속아 여기(일본 하코다테)까지 오게 되는데, 슈셍야는 여성들을 자기 집에 두고 일자리를 찾지 못하게 외부와 차단시키고 잘 먹이고 시내를 구경시킨 뒤 돈을 듬뿍 받고 유곽에 팔아버렸다고 한다”라고 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 생존자인 이용수 할머니가 7일 오후 대구시 남구 한 찻집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수요집회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며 관련단체를 비난하고 있다. 연합뉴스

정의연은 앞서 지난 5월 이용수 할머니의 기자회견 이후 “1990년대 초 활동을 시작할 당시에는 피해의 실상이 알려져 있지 않아서 일반적으로 상용되는 ‘정신대’라는 용어를 사용했다”고 해명하기도 했다.

과거에는 정신대를 ‘종군위안부’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고(故) 김학순 할머니의 기자회견을 계기로 피해자 증언을 수집한 정부가 발표한 실태보고서의 제목에도 처음엔 ‘종군위안부’라는 표현이 들어갔다.

위안부 피해자는 1930년대 초반부터 발생했다. 일본군이 여성들을 동원해 설치한 시설물을 ‘위안소’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은 1932년 전후였다. 당시 위안소에 수용된 여성을 ‘예기(藝妓)·작부(酌婦)’라 불렀다. 이어 매음부·기녀 등으로 명칭이 다양해졌다가 ‘위안부’라는 말로 수렴됐다. 문서상으로는 1939년부터 위안부로 명시되기 시작했다.

근로정신대는 1940년대부터 강제 동원되기 시작했다. 일본정부가 1937년 중일전쟁 이후 1945년 태평양전쟁이 끝날 때까지 조선 남성의 노동력을 착취하다 이마저도 부족하자 여성들까지 징용하면서 등장했다. 문서상으로는 1944년 ‘여자정신근로령’이 제정되면서 ‘여자근로정신대’로 불리기 시작했다.

이에 위안부는 종군위안부라 불리게 됐다. 그러나 ‘종군’은 자발적으로 따라갔다는 의미가 내포돼 있다는 , 일본 정부가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정치적인 목적도 숨겨져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그래서 ‘일본군 위안부’로 부르게 됐다.

20일 오전 서울 동작구 흑석동에 있는 평화의 소녀상 얼굴 부분이 파손돼 있다. 경찰에 따르면 이날 오전 6시 45분께 20대 남성 A씨가 소녀상을 돌로 찍어 소녀상 얼굴 부위 등 2곳이 파손됐다. 연합뉴스

일본군 위안부를 ‘일본군 성노예’(sex slave)라 한 표현은 유엔 인권위원회의 라디카 쿠마스와미 특별보고관을 통해 처음 제시됐다. 쿠마스와미 특별보고관은 당시 “1926년 노예협약에 규정된 ‘노예’의 정의에 일본군 위안부가 포함될 수 없다는 지적을 이해하지만, 본 보고관은 위안부가 운영된 구조와 방식, 급여체계 등을 고려하면 전시 성노예의 행태와 매우 흡사하다고 봤다”는 의견을 남겼다.

이후 정대협(정의연)과 나눔의 집, 정대협과 연계된 학계에서는 일본군 위안부를 ‘성노예’로 표현하기 시작했으나 일부 피해 당사자들이 불쾌감을 드러냈다. 이 때문에 외교부에서는 ‘성노예’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일본군 위안부’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munja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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