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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재연의 다시, 위안부 문제-①] 정대협의 배타성과 사회의 무관심
※ 문제의 본질로 돌아가자. 어떤 접근이 위안부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가. ‘위안부 문제’와 ‘위안부 문제의 해결’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외교’는 왜 해결책이 될 수 없었나.

답은 지난 30년간 발전한 위안부 담론을 추적하면 찾을 수 있다. 본 기자는 그 답을 함께 찾기 위해 이번 기획기사를 준비했다. 운동으로서·외교현안으로서·연구분야로서·국제 여성 인권문제로서 위안부 담론이 발전한 과정을 파헤치고자 한다.

[헤럴드경제=문재연 기자] 정의기억연대(정의연)의 전신인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가 위안부 피해자 위에 군림하는 권력이 됐다는 비판이 쏟아진다. 지난 5월 이용수 할머니의 기자회견을 계기로 정대협의 배타성과 회계부실이 도마 위에 올랐다.

회계부정 의혹은 검찰 수사를 통해 밝혀질 내용이다. 정의연(정대협)과 윤미향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위안부 피해자들을 내세워 받은 기부금을 착복했는지도 마찬가지다. 이 할머니가 불 지핀 논란의 본질은 ‘어떤 사회운동과 외교전략, 그리고 연구가 위안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에 있다.

정대협의 위안부 문제연구는 피해자들의 증언과 그 분석을 중심으로 전개됐다. 이는 위안부 문제를 국제사회에 공론화하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러나 정대협 외부에서 위안부 문제를 다뤄온 국내·국제 전문가들은 오래전부터 정대협의 배타성을 문제 삼았다. 이견을 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산 위안부 기림비에 빠진 피해자 이름이 대표적이다. 서울 중구 남산 ‘기억의 터’ 기림비의 위안부 피해자 명단에는 고(故) 심미자 할머니와 고(故) 박복순 할머니 등의 이름이 빠져있다. 심 할머니는 1990~1992년 고(故) 김학순 할머니와 더불어 위안부 피해 대표증언자 역할을 해온 인물이다. 애초에 무궁화자매회는 심 할머니와 김 할머니가 정대협 산하에 만든 위안부 피해자 자치모임이었다.

무궁화 자매회는 원래 정대협 산하의 피해자 자치모임이었다. [사진=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캡쳐]

일본의 연구실적과 일본군 위안소 제도의 가해구조 등에 대한 연구도 충분히 이뤄지지 못했다. 위안부 협상과정에서 일본이 고수하는 레토릭(서사)를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었다. 이 분야를 파고든 학자들이 있었지만, 대부분 소수의견으로 치부됐다. 위안부 연구는 정대협 소속 학자들을 중심으로 체계를 이뤘다. 지난 2017년 한일 일본군 합의 태스크포스(TF) 구성 당시에도 한 재일조선인 위안부 연구가가 민간위원 물망에 올랐다가 시민단체의 반대의견으로 최종배제됐다는 이야기가 퍼졌다. “정의연(정대협)의 전문가 풀 자체가 배타적이다”라는 말이 나온 이유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위안부 문제를 획일적으로 바라본 건 비단 정대협뿐만이 아니었다. 1997년 일본의 아시아여성기금 지급과정에서 피해 유가족과 피해자, 그리고 단체와의 미묘한 입장 차를 보도한 매체는 없었다. 당시 정대협 총무였던 윤미향 현 더불어민주당 비례의원은 칼럼을 통해 피해자와 단체가 민간기금 수령을 거부한다고 강조했다. 동아일보도 “日국민기금 한푼도 안 받겠다”는 제목과 ‘대부분 피해자 생활고에도 수령 거부’라는 부제로 기금 수령이 이뤄져서는 안 된다는 데에 목소리를 더했다.

1997년 9월 4일자 동아일보 지면. 위안부 피해자 모금은 윤정옥 명예교수의 개인계좌와 법인계좌가 같이 기재됐다. [사진=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캡쳐]

당시 동아일보는 지면에 정대협 대표였던 윤정옥 이화여자대학교 명예교수의 개인계좌와 윤 교수 명의의 정대협 대표 계좌 4개를 후원계좌로 실었다. 개인계좌로 모금 활동을 벌이는 현 정의연의 관행은 사실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이러한 관행을 용인한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 자신이었다.

아시아여성기금을 둘러싼 정대협과 피해자 할머니, 그리고 유족 간의 마찰은 시간이 조금 흐른 뒤 피해자들과 접촉해온 정부 당국자들과 과거사 문제해결 방법론을 두고 정대협과 갈등한 시민단체 운동가들을 통해 소개됐다.

2004년 심 할머니와 32명의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세계평화무궁화회를 조직해 비판성명을 냈을 때도 그랬다. 심 할머니의 호소를 다룬 매체는 없었다. 동아일보와 중앙일보가 심 할머니와 인터뷰한 군사평론가 지만원 씨의 글을 보도했을 뿐이었다. 지 씨가 ‘증인’이라고 주장한 심 할머니의 생각과 의도를 취재한 매체는 없었다. 절박한 심정으로 심 할머니는 위안소 제도의 구조를 지 씨에게 설명했지만, 지 씨는 “위안부 다수는 매춘부였다”고 했다. 심 할머니가 ‘일본 국민기금을 받으면 공창을 인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윤 교수의 발언에 분노해 정대협과 갈라선 배경을 간과한 채 말이다.

‘일본군에 끌려가 10대 소녀’ 이미지는 어떻게 만들어졌나. 이를 이해하려면 일본의 프레임 전략부터 이해해야 한다. 일본은 피해자들의 다양한 진술 내용을 일본군 주도의 ‘강제연행’이 없었다는 근거로 제시했다. 1990년대 초 피해자들의 진술내용은 다채로웠다. 처음부터 공출된 피해자도 있었고, 취업 사기를 당한 피해자도 있었다. 위안부 연령대도 일본군과 미군 자료에 의하면 점령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었고, 전반적으로 10대 후반~20대 초반이 많았다.

위안부 피해의 핵심은 일본군 주도의 성착취 제도 그 자체에 있었고, 일본 정부 역시 위안소 제도 자체의 강제성을 인정했다. 하지만 담론은 ‘강제연행’에 쏠려있었다. 일본을 규탄하기 위해 위안부 피해를 단적으로 묘사하는 ‘강제로 끌려간 10대 소녀’ 이미지가 강조됐다. 이 과정에서 1990년대 초 위안부 피해자들의 진술 내용과 2000년 이후 진술 내용에 변화가 생겼다. 시간이 지나면서 통념적인 ‘위안부 이미지’와 다른 얘기를 하는 학자, 외교 전문가, 피해자 할머니들은 외면당하거나 이따금 재판까지 가는 상황에 직면해야 했다. 일본의 프레임 전략에 공격적인 프레임으로 이기려고 했던 운동전략이 부작용을 낳은 것이다.

최근 도마 위에 오른 이른바 ‘정대협식 일감 몰아주기’는 2000년~2010년대 정대협 중심의 시민운동을 키워가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관행이었다. 김복동 할머니 명의로 마련된 장학금을 시민단체 간부 자녀들에게 지급했을 때도 정의연은 별다른 문제의식 없이 보도자료를 냈다.

분명 1990년대까지만 해도 정대협의 예산은 피해자 지원에 주로 사용됐다. 정부예산으로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지원이 이뤄지자 단체는 시민운동과 국제활동에 투입하는 예산비중을 키워나갔다. 이 과정에서 이따금 협력 시민단체와 상호지원하는 현금흐름이 눈에 띄기도 했다. 위안부 문제를 공론화하기 위해서는 협력 시민단체와의 연대를 키워야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연대의식은 일본 아시아여성기금이 출범했을 당시 추진된 모금활동에서 시작된 측면이 있다. 정대협은 1996~1998년 범국민 모금운동을 벌여 위안부 피해자들의 생계를 지원하려고 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돈이 모이지 않았다. 정부 지원금과 합쳐 피해자 1인당 4300만 원의 생활안정지원금이 지원될 수 있었다. 당시 정대협은 기금에 적극적으로 나서준 시민단체에는 고마움을, 소극적이었던 대기업에는 불만을 토로했다. 여기에 정부는 아시아여성기금을 수령한 피해자들을 지원대상에서 모두 배제했고, 정부 지원금을 수령한 피해자들에게는 각서를 받아냈다. 정대협은 정부의 방향에 따랐고, 고립된 아시아여성기금 수령 할머니들은 정대협의 대처에 분노했다.

갈등 없는 운동은 보기 드물다. 정대협도 당연히 운동 과정에서 피해 할머니들과 유가족, 다른 시민단체 등과 충돌하고 의견대립을 경험했을 것이다. 중요한 건 그 이견과 마찰을 어떻게 해결하느냐다. 정대협은 피해자 당사자들을 이따금 고립하는 방식으로 갈등을 봉합했고, 이 과정을 지켜본 사회 구성원들은 침묵했다. 정대협의 배타성을 인정한 건 다름 아닌 무심한 우리 언론과 대중, 그리고 정치권이었다.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이 있기 전에도 사회는 일본군 위안부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1950~60년대 태평양전쟁과 일본 식민지배 시절을 그린 영화나 소설에서 조선인 위안부는 조연으로 등장했다. 유엔군을 위해 정부가 동원한 여성들도 ‘위안부’라고 불렸다. 1970년대 일본 마이니치 신문 센다 가코 기자와 일본인 위안부 시로타 스즈코 씨가 일본에서 위안부 피해를 폭로했을 당시에도 우리 사회는 침묵했다.

정대협과 정의연의 방법론에는 분명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개선된 방법론을 논의하려면 그동안 이 문제를 묵인해온 우리들 스스로도 성찰해야 한다.

munja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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