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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정의 문란 드러난 조선군 명부, 섬마을 폐가의 벽지로..
19세기, 군역자-군역자가족 돌보는 ‘보인’ 한쌍 편제
국립해양문화재硏 “군포(軍布) 걷기위한 게 주목적”
군정의 문란 중 악질적인 인징, 동징, 족징의 흔적
2인갹출 군포半낸뒤,1인 군역,1인은 두집 재정책임式
1843년 작성, 잇단 저항, 1876년 패망의 강화도조약

[헤럴드경제=함영훈 기자] 16세기 이후 300여년 이어진 조선 정치의 실패와 경제질서의 혼란은 ‘삼정의 문란’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고교생이상 국민이라면 모두가 알 것이다.

알다시피 ▷전답의 소출량 측정을 수령과 토호가 제 멋대로 해서 세금을 과하게 메기거나 뇌물을 받고 깎아 주는 전정(田政) ▷춘궁기 빌려준 곡식을 돌려받을 때 받는 이자를 극심하게 부풀리는 환정(還政) ▷군역 의무 대체 수단인 군포의 부과를 제멋대로 하는 군정(軍政)을 ‘삼정의 문란’이라 이른다.

군포(軍布)는 군 복무를 직접하지 않는 병역 의무자가 그 대가로 납부하던 삼베나 무명이다.

여기서 군정의 문란은 재정의 문란, 백성의 궁핍, 국방력의 약화를 한꺼번에 초래했다는 점에서 가장 심각했다.

요즘도 ‘필부(畢夫)필부(匹夫)’들은 군역 비리가 나오면 펄쩍 뛰는데, 그런 절박함이 당시에는 더 컸는지, 어떻게 해서든 군역을 치르지 않고, 어떻게 해서든 군포를 내지 않으려고 꼼수를 부리는 자들이 많았던 것 같다. 모범이 되어야 할 양반은 아예 내지않도록 스스로 법제화했다.

극도로 피폐해진 국방력 속에, 조선 군인들이 힘 한 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나라를 빼앗긴 계기였던, 일본의 첫 침탈, 운양호 사건은 1875년에 있었고, 병합의 원인이 된 강화도 조약은 이듬해 초 강제 체결됐다.

치욕의 사건 30년 전인 1843년 작성된 수군 군적부(軍籍簿)가 태안 신진도 섬마을 폐가 벽에, 벽지로 발라져 있던 상태로 최근 발견됐는데, 이 군적부에 군정의 문란 중에서 지독한 여러 유형 중 하나인 ‘인징(隣徵)’, ‘동징(洞徵)’의 흔적이 나타나 있다.

인징이란 군역대상자 이웃에게 군포를 물리는 것, 동징은 개개인에 군포를 충분히 걷기 어렵자 마을 전체에 일정한 양의 군포를 부과하는 것을 말한다.

1943년 작성된 태안 안흥진 주둔 수군의 명부. 수군-보인 편제가 나타나있다. 보인은 군역중인 파트너 수군의 가계살림살이까지 책임진다. 필요한 경우 임무를 교대하기도 한다. 2인1조 편제이지만 늘 1명만 근무하는 것이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이 군적부는 군포를 거둬들일 목적의 명부라고 단언했다.

탐관오리들이 흡족할 만큼 세금을 거둬들이기 위해, 인징을 강요한 뒤, 두 가구는 각각 없는 살림을 긁어보아 관리들의 요구하는 군포의 절반을 납부한 다음, 한 사람은 군역 살고, 다른 한사람은 자기 생업 뿐 만 아니라 군역 사는 집의 생계까지 돌보는 것이 인징이다. 동징은 인징이 마을 전체로 확대된 개념이다. 인징을 부과받은 사람들은 농사지을 정도의 체력이면 두 집 생계를 책임지는 역할을, 빡센 군생활을 할 수 있는 체력이면 군역을 하는 식으로 분장했을 것이다. 만약 군포 납부 품앗이를 한 파트너들이 대가족 관계라면 족징(族徵:다른 가족에게 대신 군포 징수)이다. 이들 모두 악질적 군정의 문란 유형이다.

문화재청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충남 태안군 신진도의 산림청 산림수련관 시설관리인이 인근 옛 가옥 벽지에 ‘水軍(수군)’이라는 표현 등을 보고 신고하자, 이를 분석한 결과, 조선 후기 수군의 명단이 적혀 있는 군적부(군역의 의무가 있는 장정 명단과 특징을 기록한 공적 문서)였음을 확인했다.

5일 연구소에 따르면, 이 군적부엔 신진도 내 안흥진 소속 60여명의 군역 의무자를 전투 군인인 ‘수군(水軍)’과 ‘보인(保人)’으로 2인1조로 해서, 이름, 주소, 출생연도, 나이, 신장을 부친의 이름과 함께 적혀 있었다. 당신 현감 직인도 찍혀있다.

연구소는 수군(水軍) 1인에 보인(保人) 1인으로 편성된 체제였다고 밝혔다. 보인(保人)이란 직접 군역에 종사하지 않고 보조적 역할을 하는 병역 의무자를 말한다. 보충 설명을 덧붙이면, 직접 군복무를 하는 사람의 남은 가족을 재정적으로 돕는 사람이다. 둘 중 하나는 인징이거나, 둘이 합쳐 군포 절반 내고 역할 분담하는 식으로 인징에 갈음한 것이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이 군적부의 용도는 작성 형식이나 시기로 미루어 수군의 징발보다는 18~19세기 군포(軍布)를 거두어 모으기 위한 것이 주목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주지하다시피 양반과 일정한 직분에 있는 자는 군역 면제는 물론 군포 납부 의무도 없었다. 군포 기피, 군역기피는 뇌물로도 가능했고, 양반은 아니라도 힘 깨나 쓰거나 빽이 있는 자들은 서원의 원생, 향직 직원으로 가짜 등재하는 ‘빌 공’ 자, ‘공명첩(空名帖)’의 수법을 썼다.

탐관오리들은 장정 모두가 군역을 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군포 거둬서 착복하는 것이 더 좋았기 때문이다. 악질적 군포 징수는 인징(隣徵), 족징(族徵), 동징(洞徵) 뿐 만 아니라, 어린 아이에게까지 군포를 징수하는 황구첨정(黃口簽丁), 이미 죽은 자의 이름으로 군포를 징수하는 백골징포(白骨徵布) 등도 있었다.

삼정 중 군정의 문란 흔적이 노출된 조선후기 군적부는 이 폐가의 벽지로 발라져 있었다. 삼정의 문란 중 군정의 문란은 부정부패는 물론 국방력 약화를 초래해 머지않아 힘 한번 못써보고 일본에게 먹히는 결과를 초래하는 중대 원인으로 작용한다.

삼정의 문란, 조선의 부패를 척결하려는 저항, 홍경래의 난(1811년), 농민의 난(1862년) 등이 잇따라 터졌지만, 군정의 문란 등으로 인한 국방력 저하를 자초한 조선은 1875년 일본의 소소한 시비에도 손쉽게 굴복해 나라를 잃고 만다.

이번에 발견된 군적부는 조선수군의 편제, 수군진 유적 연구의 귀중한 사료가 된다는 의미도 있지만, 국방력과 조세 정의가 나라의 핵심 근간임을 일깨웠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반면교사가 된다.

abc@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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