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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민족 피톨 속 의병정신 발현…5·18은 인간존엄·저항의 역사”
‘광주아리랑’의 작가 정찬주 인터뷰
계엄군의 무자비한 진압에 맞닥뜨리면
광주가 아니었어도 광주처럼 싸웠을 것
‘죽기를 각오’했던 봉기…방향성 찾을 때
‘광주민중항쟁’이 적확한 표현, 개정 필요
부채의식에 감히 시도하지 못했던 주제
집필 과정 심신 탈진…몸무게 7㎏ 줄어
18일 만난 정찬주 작가가 자신의 거처인 전남 화순군 이양면 ‘이불재’글방의 정문 앞에서 책을 들고 서 있는 모습. 나무를 엮어 토속적인 느낌을 물씬 풍기는 낮은 문에 ‘집필중’이란 팻말이 붙어 있다. 박대성 기자

“5·18은 한마디로 광주시민들이 계엄군의 야만적인 그 폭력에 굴하지 않고 맞서 투쟁했던 항쟁입니다. 인류보편 가치인 인간에 대한 존엄성, 불의에 저항하는 시민의식이 발현한 역사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5·18 당시 의로운 항쟁에 대동단결한 평범한 광주시민들의 이야기를 논픽션으로 엮은 ‘광주 아리랑’(전 2권·도서출판 다연)을 출간한 정찬주(67) 작가는 “우리 민족 피톨(Phytol) 속에는 잠재된 의병정신이 들어있는데, 계엄군의 만행을 보면서 광주시민들이 5·18을 통해 발현한 것”이라며 “계엄군의 무자비한 진압에 맞닥뜨렸을 때 만약 대구,인천 등 다른 지역이었다고 해도 광주처럼 시민들이 저항했을 것”이라며 한민족 근저에 깔린 저항의식을 부각했다.

5·18 당시 서울에서 교편을 잡았다는 정찬주 작가를 만나기 위해 18일 그가 교직 생활과 ‘샘터’ 잡지사에서 퇴직한 뒤 낙향해 글을 쓰고 살고있는 전남 화순군 이양면 ‘이불재(耳佛齋)’ 글방을 찾았다.

이 곳 이불재는 신라 천년고찰 쌍봉사(雙峰寺)를 내려다보고 있는 공기 좋은 곳에 터를 잡고 있다. 20년 전 이곳에 집을 지을 때 쌍봉사를 내려다보는 것은 무례하다는 생각이 들어 방향을 북향으로 틀어 지었다는 일화는 자연에 대한 그의 철학을 엿볼 수 있다.

쌍봉사는 또한 5·18 당시 ‘시민학생투쟁위원회’ 홍보부장을 맡아 신군부의 수배를 받고 도피생활 후유증으로 간암을 앓다 마흔다섯 살에 요절한 죽마고우 박효선의 ‘49재’를 지낸 곳이다. 정 작가는 낙향한 후 이 소식을 전해듣곤 ‘친구가 고인은 됐지만, 날마다 영혼과 만나고 있구나’라는 생각에 더욱 이 땅에 애착을 느낀다 한다.

‘광주 아리랑’은 5·18의 전야라 할 수 있는 5월 14일부터 같은 달 27일까지를 70개장으로 나눠 집중기술한 작품이다. 시민군의 주류를 이룬 대학생과 교사, 노동자, 도시빈민 등 시민학생투쟁위가 계엄군의 폭압에 맞서 저항하는 실화를 자료와 증언을 바탕으로 쓴 5·18 최초의 다큐소설이다.

전라도사투리를 그대로 옮긴 노력이 깃들었다. 정 작가는 장편소설 ‘이순신의 7년’(전 7권)을 집필할 때도 이순신 장군은 충청도사투리를 썼을 것으로 여기고 그 언어를 살려 서술했다. 그는 사투리를 ‘향토언어’라고 표현했다.

작년 초 5·18 소설을 쓰겠다고 결심하고 수십년 모아온 자료와 신문기사 등을 뒤적였다. 전남대 5·18연구소에서 5·18증언자료집 등을 제공받아 40주년에 맞춰 책을 발간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는 “5·18 소설을 써야겠다는 생각은 오래 전이었지만, 무고한 사람들이 죽어갔을 때 항쟁에 가담하지 못했다는 부채의식에 다른 작가들이 오월을 소재로 시와 소설을 쓰던 때도 감히 시도하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그래도 “5·18을 직·간접 경험한 세대가 이를 경험하지 못한 젊은 세대에 온당하게 알려줄 책무가 있구나 해서 쓴 책”이라고 소개했다.

‘광주아리랑’은 ‘광주민중항쟁 40주년 회심작-80년 5월, 따뜻한 가슴들이 살고 있었네’라는 부제에서 볼 수 있듯이 광주사람이 공유했던 ‘정(情)’을 끄집어냈다.

1980년 당시 광주는 인구 80여만명으로 아직 산업화가 안 된 근대도시로 농촌인구가 많이 유입돼 한 집 건너 형제자매 사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는 연대의식으로 뭉치는 토대가 됐고, 80년 5월 광주시민들의 따뜻한 가슴과 정과 합쳐졌다. 민주화에 대한 열망으로 아낙네들은 주먹밥이라도 내놨고, 형편이 안 된 집에서는 골목 끄트머리에서 말간 냉수라도 내놓는 것을 보고 정말 따뜻했구나 생각했다고 정 작가는 말했다.

‘5·18민주화운동’이라는 명칭 대신 시종일관 ‘광주민중항쟁’으로 기술한 정 작가는 민주화운동이라는 명칭이 5·18을 가리키는 적확(的確)한 언어라 생각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민주화운동이란 명칭은 서로다른 양쪽의견을 봉합한 평준화시킨 어정쩡한 용어로, 광주시민들이 플래카드나 들고 가두시위나 한 게 아니라 죽기를 각오하고 계엄군과 맞서 싸웠지 않았느냐”고 반문한 뒤 “부마항쟁, 4·19 의거로 부르는데 5·18도 이제 잃어버린 명칭을 되찾을 때가 됐다”고 명칭 변경을 제언했다.

광주시민의 희생이 바탕이 된 5·18이 이후 현대사에 적지않은 기여를 한 것은 분명하다. 전두환 정권 말기 87년 ‘6·10민주항쟁’ 때 대학생과 전국민이 ‘독재타도, 호헌철폐’ 시위를 벌일 때 정권이 강경진압을 못하고 직선제 개헌요구를 수용한 것은, 광주에서 뜨거운 맛을 본 때문이다.

5월14일부터 27일까지 14일간의 광주시민들이 저항했던 처절한 얘기를 쓰면서 작가의 심신도 편할 수 없었다. 200자 원고지 2400여매 분량을 탈고한 후 완전방전된 듯 탈진했다.

“이건 엄청난 에너지가 있어야만 쓸 수 있는 소설입니다. 왜냐 하면, 그 때 당시 참혹했던 생지옥으로 내가 들어가야 쓸 수 있거든요. 편하게 쓰는 소설이 아니기에 이거 쓰면서 몸무게가 7㎏이나 빠지고 허리띠 구멍을 2개나 줄일 정도로 괴로웠던 시기였어요.”

일부 수구보수 세력에서 아직도 제기하는 북한군 지령설에는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한다. 그는 “이 소설은 실명과 실화를 바탕으로 한 다큐소설로 미화할 필요도, 이유도 없다. 젊은사람들이 5·18의 실상을 분명히 봤으면 한다”며 “민초들이 의병이 돼 들불처럼 일어난 동학, 4·19와 5·18까지 형태와 모습만 달라졌을 뿐 근저에는 불의에 저항하는 저항정신 의병정신이 있었다”고 거듭 강조했다.

책으로 먼저 출간한 ‘이순신의 7년’이 책전남도청 홈페이지에서 무료 연재된 것도 지역사회에서는 화제가 됐다.

그는 “이낙연 전 총리가 2014년쯤 전남지사 선거를 앞두고 호남 ‘의향(義鄕·의로운 고장)’의 정체성을 고민하길래 이순신 장군의 얼이 서려있는 서남해안 일대를 주목하라고 했더니, 도지사 취임 이후 문화예술국장을 불러 ‘이순신의 7년’을 도민들이 볼 수 있게 홈페이지에 연재하자고 제안했다”며 “이 전 총리의 문화마인드에 탄복했다”고 회고했다.

그의 이야기를 한참 듣고나서보니 ‘이불재’ 대문에 ‘집필중’이라는 팻말을 걸어놓은 것이 눈에 띈다. 그를 만나러 오는 사람들을 위한 일종의 신호인 것 같다. 도예가 아내와 단출하게 살고 있는 그는 새벽 3시반이면 일어나 글쓰기에 몰입한 뒤 오후 시간에는 이 곳을 찾는 손님과 얘기꽃을 피우는 것이 낙이라고 했다.

정 작가의 스승인 법정스님을 비롯해 이해인 수녀, 임권택 감독, 박완서 소설가, 최인호 소설가 등 수많은 문인과 독자들이 찾아와 감흥을 얻고 기를 받는 곳으로도 이름을 얻고 있다. 박대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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