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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라이프칼럼] 한국영화 ‘기생충’
지난 10일 모두 6개 부문 후보에 올랐던 우리 영화 ‘기생충’이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최고상인 작품상을 비롯해 모두 4개를 수상했다. 정작 한국영화 ‘기생충’의 성공에 놀란 것은 미국사람이 아니라 한국사람이다. 우리 스스로 자문한다. 왜?

우리나라 최초 흥행영화는 1919년 10월 27일 단성사에서 상영한 ‘의리적 구토’다. 연극 속에 영화가 있는 활동사진 연쇄극이었다. 첫 장편극영화는 1923년 조선총독부 체신국이 기획하고 윤백남이 제작한 ‘월하의 맹서’다. 같은 해 우리나라 최초 발성영화 ‘춘향전’을 개봉했다. 최초의 순수 조선영화 ‘심청전’을 윤백남 프로덕션이 만들어서 개봉한 것은 1925년이다. 그러나 일제가 1928년부터 영화검열을 시작하고 1940년 1월에는 ‘조선영화령’을 공포하면서 한국영화는 사라진다.

한국영화를 재건한 것은 한국전쟁 직후다. 주한미군 502부대가 보유한 최신 영화제작 장비와 이승만 정권의 한국영화 지원정책에 힘입었다. 1955년 15편 제작에 이어서 이듬해에는 42편, 1957년에는 28편, 1958년부터는 매년 100편 넘게 만들었다.

그러나 유신시대는 한국영화를 또다시 위기로 몰았다. 독재정권의 치적을 홍보하는 수단으로 전락한다. 1987년 7월 1일 영화수입을 자유화한다. 1988년 1월 미국 주요 영화사는 UIP 직배를 시작한다. 미국의 통상압력에 굴복한 것이다. 1968년 일 인당 연간 관람횟수 5.8회로 정점을 찍었던 한국영화는 1976년 2회 이하로 떨어졌다가 1996년에는 0.9회까지 떨어진다. 한국영화 관객점유율도 1968년 50.3%로 최대를 기록했지만, 1987년에는 20%대로 하락하고 1992년에는 10%대까지 내려간다.

1993년 집권한 민선민간정부는 1996년 영화진흥법을 제정한다. 소재 제한을 철폐하고 검열제를 폐지함으로써 자유롭게 영화를 제작할 수 있도록 제도화한다. 복합상영관을 도입함으로써 영화시장을 키운다. 1997년 7월 1일 영화를 비롯한 문화생산물에 대한 지식재산권을 전면 보장한다. 같은 날 홍콩이 본토에 반환되면서 홍콩영화가 붕괴한다. 아시아 영화시장에 커다란 공백이 발생하면서 한국영화가 해외로 뻗어나갈 수 있는 시장을 얻는다.

1993년 ‘서편제’가 한국영화 역사상 처음으로 100만 관객을 돌파한다. 2003년 ‘실미도’, 2013년 ‘변호인’ 등 무수한 천만 관객 돌파 영화들이 쏟아져 나온다. 2014년 ‘명량’은 관객 1761만3682명을 동원하고 역대 흥행 기록을 경신한다. 성공한 영화들은 한결같이 한국인만 만들 수 있는 한국적인 정서를 형상화했다.

‘기생충’도 예외는 아니다. 산동네 빌라와 반지하 월세방 그리고 치열한 일상 등 가장 한국적인 이야기와 영상으로 세계인의 공감을 이끌어냈다.

2019년 한국영화는 우리 영화시장 51%를 점유하고 있다. 우리 국민 1인당 연간 4.37회 관람한다. 근대화를 통해 일본과 미국의 앞선 영화제작기술을 터득했다. 일제와 독재정권의 탄압을 이겨냈다. 민주화를 통해 소재제한을 철폐함으로써 자유롭게 영화를 제작할 수 있는 영화진흥 정책을 폈다. 세계화를 통해 가장 한국적이면서 세계적인 영화로 거듭났다. 한국영화가 걸어 온 근대화·민주화·세계화 100년 역사다.

아카데미 최고상이라는 작은 상을 받았다. 시작에 불과하다. 김지운에게 놀라고 박찬욱에게 감동할 날이 머지않았다.

최석호 한국레저경영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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