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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영미 시인의 심플라이프]어렵다고 생각한 일이 가장 쉽더라

1980년대 후반, 우리는 둘 다 실업자였다. 재야단체에서 자원봉사자로 일하다 그만둔 나는 과외지도로 용돈은 벌었지만 이렇다 할 직장이 없었다. 대학원 논문을 써야 할지 다른 직업을 찾아야 할지 방황하던 선배 D와 나는 자취방이나 카페에서 만나 두서없이 떠들며 시간을 죽였다.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막막한 처지를 나누던 그녀가 어느날 사법고시를 준비하겠다고 말했을 때, 솔직히 나는 믿지 않았다.

그 어려운 공부를 어떻게? 언니는 법대도 나오지 않았잖아… 나처럼 놀기 좋아하고 문학작품에 심취하던 그녀가 두터운 법률서적을 끼고 도서관에 앉아있는 모습을 상상하기 힘들었다.

“어렵다고 생각한 일이 가장 쉽더라.”

뭔가 알들 말듯 의미심장한 그 말을 남기고 그녀는 내 인생에서 멀어졌다. 쉽게 돈을 벌 수 있지만 미래가 없는 아르바이트를 때려치고 나는 대학원에 진학했고 몇 년 뒤 시인이 되었다. 선배 D는 몇번의 도전 끝에 고시를 통과해 변호사가 되었다.

출판사를 차려야겠다고 결심한 내게 가장 어려워 보였던 일 중의 하나가 ‘계산서 발행’이었다. 계산서를 발행해야 도서대금을 받는데, 국세청 홈페이지에 들어가기는 했지만 무슨 항목이 이리 많은지. 개인사업을 하는 친구에게 계산서 발행하는 법을 배우기는 했지만 설명을 들어도 그때뿐, 사업자등록을 하고 2달이 지나도록 ‘공급자’와 ‘공급받는 자’가 헷갈렸다.

계산서 발행에 대한 공포가 어찌나 컸던지, 신규계약을 하기 위해 인터넷 서점A의 담당직원을 만났을 때 젊은 그녀에게 나는 부탁했다. ‘나는 늙은 사람이라 기계에 서툴러요. 인터넷과 컴퓨터를 잘 사용할 줄 몰라요. 내가 (홈택스에 접속해) 계산서를 발행하지 못할 수도 있는데 손으로 쓴 것도 받아주나요?’ 나이 육십이 다 되어 1인출판사를 차린 시인이 딱했던지, (내가 늙었음을 강조해 젊은이의 동정을 산다는 나의 전략이 먹혔는지) 그녀는 내게 ‘수기 계산서도 받으니 너무 늦지 않게 우편으로 보내달라’며 날 안심시켰다.

시집 ‘다시 오지 않는 것들’을 출간하고 처음 계산서를 발행한 날, 흥분한 나는 친구들과의 카톡방에 들어가 자랑했다. “어제 동네책방에 5권 책 팔고 거래명세표 쓰고 홈택스 들어가서 계산서 발행 성공!” 처음 책 팔아 받은 돈 3만5천원이 감격스러워 문자를 보내는 나를 친구들은 ‘훌륭한 사업가’라며 축하해줬다.

그렇게 어려워하던 계산서발행이 지금은 식은 죽 먹기다. 첫달에는 밤늦게 새벽까지 책상에 앉아 숫자들과 씨름하던 내가, 1건에 1시간도 더 걸려 (날짜를 잘못 기입해 수정계산서를 발행하고 생난리를 치느라) 거래처들에 계산서를 다 발행하려면 하루로는 모자랐는데, 지금은 한 시간만에 해치우는 내가 나도 놀랍다.

뒤에 0이 제대로 붙었나를 확인하고, 발행하기 전에 미리보기는 필수이고 마지막에 엔터키를 누를 때 틀렸을까봐 가슴이 두근두근해 다음날 서점에 전화해 계산서가 제대로 들어갔나 확인했는데… 세상 참 오래 살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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