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사회적 문제가 된 대표적 직업병으로는 W사의 이황화탄소중독, S사 등 전자산업의 원인미상 백혈병 등이 있다. 경제성장과정에서 이러한 직업병을 소홀히 다루어 많은 사회적 희생을 치렀다. 직업병이 발생하면 개인은 소중한 가족을 잃거나 평생 아픔을 가지고 살아가고, 국가는 소중한 인재를 잃어 사회적 비용을 지불한다. 최근 직업병을 유발할 수 있는 작업환경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직업병(업무상 질병)은 원인(작업환경)과 결과(질병)의 과학적 증명이 있어야 인정된다. 최근에는 근로자 보호를 위해 포괄적인 개연성으로도 직업병으로 인정하고 있으나 여전히 과학적 인과관계는 필요하고 이때 정확한 작업환경에 대한 평가는 절대적이다.

우리나라는 50년 전 국민소득 천불 이하의 최빈국에서 이제 3만 불이 넘는 선진국으로 발전했고, 기업들도 전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고 있다. 이는 근로자를 포함한 모든 국민들이 열심히 노력했고, 기업들도 기술개발과 원가절감을 통해 경쟁력을 확보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선진국에 비해 3배 높은 산재사고 사망에서 보듯이 안전보건에 대한 인식과 실천은 아직도 과거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특히 정부에서 근로자 건강보호를 위해 실시하는 작업환경측정제도는 형식적인데다가 측정을 대하는 기업의 태도도 시대에 역행하고 있다.

세계적 기업을 유지하려면 법제도를 잘 준수해야 함은 물론, 제도의 실행에 있어서는 공정하고 투명한 집행절차로 국내외에 신뢰를 쌓아야 한다. 특히 안전보건은 근로자의 생명권이기에 더욱 원칙에 충실해야 한다. 작업환경측정은 우수하고 신뢰성 있는 기관을 선정해 위탁해야 한다. 그런데 아직까지 유수한 대기업에서도 몇 푼 되지 않는 비용절감을 위해 품질과 무관한 저가입찰제를 선호하고 있다. 주로 질보다는 비용절감이 우선이다. 정상적인 비용을 지불하지 않은 측정결과가 신뢰성을 잃게 되는 것은 자명하다. 이러한 측정결과는 정부, 기업, 근로자 모두 신뢰하지 않는다. 그 결과 적지 않은 비용을 들인 작업환경측정 결과를 직업병 조사과정에서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나라 기업의 해외법인은 대부분 임금이 저렴한 개발도상국으로 진출한다. 이러한 나라에도 관련법과 제도가 있으나 직업병을 예방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그래서 일부 기업들은 현지법보다 강화된 기준을 가지고 작업환경측정을 하는데, 국내와 같이 저가입찰방식을 택하고 있다. 기업으로서는 일정 품질의 서비스를 저비용에 구입하는 구매전략이지만, 대부분 품질을 희생한 저비용이다. 측정기관은 일단 수주를 하면, 저비용을 상쇄하기 위해 측정을 소홀히 하거나 낮은 임금으로 전문가를 고용하게 된다. 사실상 부실 측정으로 이어지고, 이에 순응하는 부실한 측정업체만 살아남는 이유다. 이러한 제도 속에서 이익을 보는 측은 기업과 측정기기와 재료를 판매하는 외국회사들이고, 피해를 보는 측은 현장에서 유해물질에 노출되는 근로자와 정상적으로 작업환경측정을 하는 업체들이다.

기업은 최저가가 아니라, 적정 가격을 지불하고 제대로 된 측정업체를 선정해야 하고, 오히려 제도가 강화된 선진국 기준에 따라야 기업이 걸림돌 없이 세계로 성장할 수 있다. 근로자의 건강을 희생하여 만드는 제품은 더 이상 세계 일류나 최고가 아니며, 지속성장의 동인이 될 수도 없다.

정부는 진정으로 직업병 예방을 하려면 측정제도를 개선해야 한다. 생명을 담보로 지금과 같이 무한 시장경쟁에 맡겨 두는 것은 양질의 업체를 도태시키고 편법만 살아남는 생태계를 조성한다. 일부 건설업분야에서 시행되고 있는 건설업 산업안전보건관리비제도와 같이 비용을 일정 수준 보장해 주도록 하는 방식을 도입할 필요가 있다. 가격을 고려하되, 품질을 보장할 수 있는 수준의 적정 가격 이하로는 계약할 수 없도록 하는 방식이다. 더 나아가서 적정가를 고시하고 품질경쟁을 할 수 있도록 개선하지 않으면 근로자의 건강보호, 직업병 예방은 고사하고 제2의 백혈병 사태가 반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