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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희호 여사 별세] 민주화·여성운동으로…DJ 정치적 동지로 ‘큰 족적’
97세로 영면 이희호 여사의 삶…

가택연금 등 숱한 시련 견디며
양심수 석방운동 등 적극 활동
김대중, 대통령 당선 이후에도
가정폭력방지법 제정등 큰 역할
평생을 민주화진영 큰어른으로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 부인 이희호 여사가 10일 별세하면서 각계의 추모의 물결이 일고 있다. 사진은 1987년 12월 평민당 김대중 후보의 제주 유세에서 김 후보의 부인인 이희호 여사가 지원 연설을 하며 여성 유권자들의 지지를 호소하는 모습. [연합]

97세의 일기로 10일 별세한 고(故) 이희호 여사는 ‘대통령의 부인’이 아닌 민주화운동과 사회운동, 여성운동에서 커다란 족적을 남긴 한국현대사의 거목이었다.

1962년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운명적 결혼은 이 여사의 삶에 있어서 커다란 변곡점이었다. 당시 여성계에서는 전도유망한 이 여사가 애 둘 딸린 홀아비이자 잇단 낙선으로 전세방을 전전하던 ‘정치낭인’에 불과했던 김 전 대통령과 결혼하는데 아쉬워하는 목소리가 많았다. 이 여사는 훗날 “꿈이 큰 남자의 밑거름이 되자고 결심하고 선택한 결혼”이라고 회고했다.

주변의 만류가 현실화되기라도 하듯 김 전 대통령과 이 여사 부부의 결혼생활은 출발부터가 험로였다. 결혼 열흘 만에 김 전 대통령이 반혁명 혐의로 중앙정보부에 끌려간 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이 여사는 김 전 대통령이 1972년 미국 망명, 1973년 일본 납치사건, 1973년부터 1979년까지 가택연금과 투옥의 반복, 1980년 내란음모사건, 1982년부터 1987년까지 미국 망명과 가택연금 등 박정희ㆍ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의 탄압이 지속되는 동안 고초를 함께했다.

이 여사는 시련이 이어지는 동안 단지 견디기 만한 것은 아니었다. 1976년 3ㆍ1 민주구국선언사건 때는 김 전 대통령과 함께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초를 겪기도 했다. 사흘 뒤 풀려나서는 독재정권에 맞서다 가족들이 투옥되거나 목숨을 잃은 민주화운동 가족들의 구심점인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의 전신인 ‘양심수가족협의회’를 꾸려 탄압받는 재야인사들의 가족들과 적극적인 석방운동을 펼쳤다.

이 여사는 김 전 대통령이 내란음모사건으로 사형 판결을 받자 지미 카터 미 대통령에게 구명편지를 보내는가하면 망명시절에는 미 전역에서 강연 등을 통해 반독재 민주화운동을 벌였다.

1997년 김 전 대통령이 네 번째 도전 끝에 대선에서 승리하고 15대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이 여사도 ‘퍼스트레이디’로서의 또 다른 삶을 시작했다. 이 여사는 역대 대통령 부인 중 가장 활발한 ‘참여형 퍼스트레이디’라는 평가를 받았다. 가정폭력방지법과 남녀차별금지법 제정, 그리고 여성부 창설 등 김대중 정부 시절 한국 여권이 비약적으로 신장한 배경에는 이 여사가 자리하고 있었다.

2000년 김 전 대통령이 노벨평화상을 받았을 때 국제사회에서 “절반은 부인의몫”이라는 평가가 나오고 같은 해 펄 벅 인터내셔널의 ‘올해의 여성상’ 수상자로 선정된 것도 이 같은 공로를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김 전 대통령도 미국 망명시절 “오늘 내가 여러분과 함께할 수 있는 것은 내 아내 덕분이고, 나는 이희호의 남편으로서 이 자리에 서있다. 나는 그것이 너무나 자랑스럽다”고 말하기도 했다.

강력한 대통령집중제를 채택하고 있는 한국에서 오랫동안 대통령 부인을 부르는 호칭이었던 ‘영부인’이 ‘여사’로 바뀐 것도 이 때부터였다. 이 여사의 “대통령의 부인이기 전에 나 자신이고 나이도 들었으니 여사로 불러주면 좋겠다”는 건의에 따른 것이었다.

이 여사는 청와대에서 나오고 김 전 대통령이 2009년 8월 서거한 뒤에도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을 맡아 묵묵히 남편의 유지를 지켜나가며 민주화진영의 큰 어른으로서 소임을 다했다.

신대원 기자/shindw@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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