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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건 X파일 - 독거노인 덮친 보이스피싱범] “팔십 평생 모은 돈 지켜준다길래…‘고맙다’ 절하며 당했죠”
서울 종로구에서 만난 보이스피싱 피해자 김순례(가명ㆍ82) 할머니. 그는 보이스피싱에 속아 전재산 3억5000만원을 날렸다. 정세희 기자/say@heraldcorp.com
세상 물정 어두운 80대 할머니
형사 사칭 보이스피싱에 속아
3억 5000만원 인출해 냉장고 보관
교회서 기도하는 동안 털어 가

남은 돈 욕심낸 피싱범 다시 접근
인출책 검거했지만 돈은 못 찾아
사건 이후 폐암 발병 수술까지…
“이런 사기가 있는 줄도 몰랐어”


3억 5000만원. 김순례(가명ㆍ82) 할머니가 지난해 1월 형사를 사칭한 보이스피싱범에게 속아 넘겨준 돈이다. 폐지를 줍고 청소 일을 하며 한편생 모은 전재산이었다. 20대에 자궁암 진단을 받았던 그는 “3개월밖에 못산다”는 의사의 말에 결혼도 포기하고 일생을 홀로 살아왔다. ‘죽으면 천국에 가야지’ 하는 생각으로 남는 시간은 모두 교회에서 보냈다. 기적처럼 건강은 얻었지만 외로운 삶이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그에게 친구는 사치였다. 부모와 형제들 마저 세상을 떠나고 그는 철저히 혼자였다. 물론 ‘보이스피싱을 조심하라’고 알려주는 이 하나 없었다.

22일 오후 서울 종로구 자택에서 보이스피싱 피해자 김 할머니를 만났다. 그는 사건 당시 이용했던 통장 5개를 쓰레기통에서 꺼내 보였다. 비닐봉지에 싸인 통장에는 ‘보이피싱 사기통장’이라는 메모지가 붙여있었다. “이미 날린 돈이지만 그래도 버리기 그래서…,” 말끝을 흐렸다. 차마 버리지 못한, 그의 한평생이었다.

“은행원장, 형사라고 하니까 그냥 믿었지”=사건은 지난해 1월 12일로 돌아간다. 이날 오후 김 할머니는 자신이 은행원장이라는 사람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그는 “할머니 조카를 사칭하는 사람이 할머니 돈을 빼가려고 하고 있다”면서 겁을 줬다. 범죄에 연루됐다는 말에 그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몇분 뒤 형사라는 이가 다시 전화를 걸어 “우리가 위험에 빠진 당신의 돈을 안전하게 지켜주겠다”고 말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묻자 형사라는 이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단 은행에 가서 갖고 계신 5000만원을 5만원권으로 찾아서 안전하게 냉장고에 넣어두세요. 그럼 저희 형사가 찾아가 지문감식을해서 범인을 잡겠습니다.”

형사가 도와주겠다니 그렇게 든든할수 없었다. “아이고 형사님 감사합니다.” 그는 한걸음에 은행으로 달려갔다. 집에 돌아온 할머니는 그들의 지시대로 돈을 비닐봉투에 넣어 냉장고에 뒀다. 말도 안 되는 얘기였지만 할머니는 믿을 수밖에 없었다. 세상 물정에 어두운 80대 노인은 형사라는 사람이 다급한 목소리로 당신의 돈이 범죄에 연루됐다고 하는 순간 머리가 하얗게 정지됐고 ‘그저 ‘형사님들’ 말에 따라야 한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피해자 농락…돈 빼가면서 “교회서 기도하고 있으라” 지시= 순진한 할머니는 그들에게 좋은 먹잇감이었다. 이튿날 그들은 다시 “1억을 현금으로 찾아 냉장고에 넣어두라”고 요구했다. 할머니는 몇군데 은행에서 적금을 깨 1억원을 모두 현금으로 바꿨다. 5만원권으로 바꾼 1억원은 박카스 한 박스를 꽉 채우고도 남았다. 낑낑거리며 돈을 들고 귀가한 할머니는 냉장고 오른쪽 한 켠에 이를 넣었다. 그들의 요구는 계속됐다. 3일 뒤 그들은 다시 전화를 걸어 “나머지 2억도 범죄에 연루된 것 같다”면서 “현금으로 모두 찾아 달러로 바꾸고 냉장고에 있는 1억과 함께 넣어두라”고 요구했다. 할머니는 돈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으로 청량리, 동대문 등 은행을 돌아다니면서 2억을 모두 달러로 바꿨다.

그들은 악질이었다. 돈을 빼가는 동안 할머니를 집 밖으로 유인하기 위해 “오후에 형사가 집으로 갈 테니 할머니는 교회에서 잘 되게 해달라고 기도나 하라”고 했다. 할머니가 교회에 열심히 다닌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할머니는 보이스피싱범이 집에서 3억을 가져가는 동안 교회에서 ‘형사님들이 돈을 잘 지켜달라’고 기도를 드렸다.

예배를 마친 뒤 오후 4시께 집에 도착했을 때 할머니는 한 낯선 남성과 마주쳤다. 할머니는 반가운 마음에 그를 붙잡고 “형사님이세요?” 물었다. 중국인 현금 인출책이 대답할 리가 없었다. 다시 “형사님, 제 돈 관리 잘 되는 거죠?” 묻자 남성은 가방을 가슴 앞으로 맨 채로 황급히 집을 빠져나갔다. 조금 이상했지만 할머니는 ‘바쁘게 공직을 수행하는 형사인가 보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보이스피싱에 이용된 김 씨의 통장에는 ‘보이피싱 사기 통장’이라는 메모가 붙여있다. 그는 “이미 없어진 돈이지만 차마 버리지 못했다”고 털어놨다.
경찰, 48시간 잠복근무 끝에 검거=할머니가 계속 속자 그들은 마지막 재산까지 모두 빼앗아갈 작정이었다. 보이스피싱범은 며칠 뒤 할머니에게 “나머지 재산 5000만원을 모두 은행에서 찾고, 이번엔 지하철 경복궁역 물품보관함에 넣으라”고 지시했다. 결국 꼬리는 직원에게 밟혔다. 80대 할머니가 은행에서 계좌에서 많은 돈을 찾겠다고 하자 이를 수상하게 여긴 은행직원이 경찰에 신고를 한 것이다.

집으로 출동한 서울 종로경찰서 지능팀 수사관들을 보고서도 할머니는 보이스피싱에 속았다는 사실을 믿지 못했다. 보이스피싱이라는 말 자체를 몰랐다. 경찰은 48시간 잠복근무에 돌입했다. 또 다시 보이스피싱 전화가 걸려올 것을 염두에 두고 수사관 두명은 집을 지켰고 나머지 12명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밖에서 잠복근무를 서며 CCTV를 확보했다. 그러던 중 전화기가 울렸다. 보이스피싱범이었다. 그들은 “왜 5000만원을 안 보내느냐. 이번엔 강남역으로 가져오라”고 요구했다.

즉시 수사관은 종이에 “너무 멀어서 못나간다”고 썼고 할머니에게 그대로 읽게 했다. 이때부터 할머니와 경찰은 한 팀이 됐다. 그때서야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한 할머니는 경찰의 지시를 잘 따랐다. 할머니는 “몸이 안 좋아 멀리 못나간다”며 보이스피싱범을 집에서 가까운 역인 경복궁역으로 유인했다. 할머니는 은행에서 돈을 찾는 척을 한 뒤 미리 준비한 종이로 만든 가짜 돈을 들고서 지하철역 물품보관함에 돈을 넣었다. 약 4시간 뒤 경찰은 물품보관함에서 돈을 꺼내려는 인출책 유모(24) 씨를 검거했고 뒤이어 수거책 문모(49)씨와 송금책 유모(31) 씨를 모두 붙잡아 구속시켰다.

사건 이후 폐암 발병해 수술…“어리석은 내 잘못” 자책만=전자금융거래법 위반 혐의 등으로 검찰로 넘겨진 유모 씨 등 3명은 지난해 서울중앙지법에서 징역 6월을 선고 받았다. 그러나 중국 총책 손에 들어간 3억원은 돌려받을 수 없었다.

이 돈은 할머니가 한평생 식당 설거지, 고아원 보모, 가정부, 폐지 줍기 등을 하며 모은 전재산이었다. 여윳돈이 있어도 검소한 생활이 몸에 배어 1000원 한번 맘대로 쓰지 못하고 차곡차곡 모은 돈이었다. 할머니는 이 재산을 하늘나라에 갈 때 교회에 어려운 이웃을 위해 기부를 할 계획이었다.

평생 모은 돈이 순식간에 사라지자, 할머니는 “심장이 끊기는 듯” 했다고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최근 폐암 판정을 받고 수술을 받았다. 의사는 술 담배를 안 하더라도 급격한 스트레스로 암에 걸릴 수 있다고 설명했다.

생활은 더욱 궁핍해졌다. 당장 난방비 걱정에 시달려야 했다. 이날 할머니는 추운 방에서 패딩을 입고 목에 스카프를 두르고 있었다. 그는 “폐암이 감기에 취약하다고 해서 조심해야 하는데 보일러 틀기 겁난다”고 털어놨다.

세상과 동떨어져 살아온 할머니에게 ‘보이피싱인지 보이스피싱인지 하는 것’은 너무나도 생소한 것이었다. 할머니는 이번 일을 겪을 때까지 이러한 사기가 있는지 조차 몰랐다. 그는 “평생 거짓말 한번 안하고 살았으니 남들도 다 그런 줄만 알았다. 내가 어리석었다”며 자책했다. 그러면서 “그래도 주변에서 누군가가 알려줬다면, 대화할 이웃이라도 있다면 그런 게 있구나 생각할 수 있었을 것 같다”고 했다.

의지할 곳 없는 할머니를 지탱해주는 것은 지금도 기도뿐이다. 그는 “남은 날까지 심하게 아프지 않고, 남에게 폐 끼치지 않고 천국으로 가게 해달라고 빌면서 하루하루를 버틴다”고 말했다.

정세희 기자/say@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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