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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재연의 외교탐구] ‘빅딜’의 함정
[사진=미 국무부 제공]
[헤럴드경제=문재연 기자] “(북미 간) 빅딜은 12일에 있을 것.”


‘빅딜’(Big deal). 월가(街)의 큰손들이 산업동향에 큰 영향을 끼칠 수준의 거래 혹은 구조조정을 펼칠 때 사용하면서 유래한 용어다. 투기적 성향과 함께 전체 시장의 흐름을 바꿔놓을 ‘대규모 거래’로 통용되던 이 용어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6ㆍ12 북미정상회담을 앞두고 사용하면서 북미 간 비핵화-상응조치를 둘러싼 협상의 성패를 가르는 용어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톱-다운’접근 함의하는 빅딜…미뤄지는 ‘디테일의 악마’=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의 방북을 앞두고 매스컴의 가장 큰 관심사로 떠오른 것은 북한의 비핵화 초기조처와 미국의 상응조처 사이의 ‘빅딜’ 성사여부였다. 폼페이오 장관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비핵화 의지를 재차 확인하고 제2차 북미정상회담 개최를 위한 여건을 조성하기 위해 방북한 자리인 만큼, 비핵화와 상응조처를 둘러싼 북미 정상 간 의견이 조율될 것으로 기대됐기 때문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 위원장이 비핵화와 상응조치를 둘러싼 빅딜을 성사시킨다면 긴장과 평화를 오가던 한반도 정세는 평화를 향해 한 발자국 더 가까이 진전할 수 있다. 문재인 정부가 과거 북미협상 접근방법과 달리 정상 위주의 ‘톱-다운’(하향식) 접근법을 택한 것도, 정상 간 빅딜이 한반도 정세를 보다 극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빅딜의 문제점은 디테일에 대한 협상을 뒤로 미룬다는 것이다. 정상 급에서 이뤄지는 합의는 모호하고 포괄적일 수밖에 없다. 구체적인 협상의 이행시점과 방식, 그리고 순서 등을 다루는 것은 정상이 아닌 실무진이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상 간 빅딜이 성사된다고 하더라도 실무단계에서 합의가 이뤄지지 않으면 실질적인 이행은 뒤로 미뤄질 수밖에 없다.

김 위원장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지난 6월 약속했다는 ‘동창리 미사일 엔진시험장 파괴’가 대표적인 사례다. 트럼프 대통령은 김 위원장이 이같이 약속했다고 했지만, 현재 동창리 미사일엔진 시험장에 대한 해체작업은 중단된 상태인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은 9월 평양공동선언을 통해 유관국의 참관 하에 동창리 미사일엔진 시험장을 파괴하겠다고 공식밝혔지만, 폼페이오 장관이 방북했을 때에는 지난 5월 이미 영구적으로 폐기했다고 밝힌 풍계리 핵실험장에 대한 사찰 문제를 논의했다. 동창리 미사일엔진시험장 등 비핵화 조치 방식과 순서에 대한 북미 실무진 간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북한 실무진은 여러 채널을 통해 미군 유해송환에 대한 상응조치로써 종전선언이 먼저 이뤄져야 비핵화 초기조치를 진행하고, 이에 대한 제재 완화가 이뤄져야 한다는 주장을 밝혀왔다. 반면 폼페이오 장관을 필두로 한 미국 실무진은 북한의 비핵화 조처가 먼저 이뤄진 뒤 종전선언을 ‘검토’할 수 있다는 입장을 내비쳐왔다. 

[사진=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 트위터 제공]
▶‘빅딜’의 함정, 도사리는 디테일의 악마=지금까지 북미는 이 이행과 관련된 ‘디테일의 악마’를 뒤로 미뤄왔다. 북미가 택한 ‘전략적 모호성’이 마냥 잘못됐다고 할 수는 없다.

전략적 모호성은 협상 초반 양측의 신뢰가 부족해서 포괄적 합의가 성사되는 것조차 어려울 때 유용하게 쓰이는 전략이다. 협상 당사자 간 신뢰가 구축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뤄진 모호한 합의들은 신뢰가 쌓일 때까지 관계를 유지하도록 하는 장치 역할을 할 수 있다. 실제 프랑스와 독일의 관계정상화를 촉발한 ‘엘리제 조약’도 전략적 모호성을 취했다. 어느 정도의 모호성은 협상 초반에 양 당사자가 모두 주저하지 않고 ‘조건없이’ 협력을 추진할 수 있는 유연성을 제공한다.

그러나 전략적 모호성은 핵심 쟁점 및 이행사안에 적용되면 협상뿐만 아니라 그나마 유지됐던 국가간 관계를 악화시킬 수 있다.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은 이집트와 이스라엘을 중재해 역사적 ‘캠프 데이비드 협상’을 성사시켰다. 중동에서의 빅딜이 성사된 순간이었다.

하지만 빅딜의 영광을 오래가지 않았다. 캠프 데이비드의 치명적 약점은 팔레스타인 문제를 포함한 쟁점들은 모호하게 처리했다는 데에 있었다. 최종합의문에는 요르단 서안, 가자지구, 골란고원 등 이스라엘이 전쟁을 통해 얻은 영토에 대한 조치가 언급되지 않았다. 이스라엘이 시나이 반도에서 철수해 이집트와 이스라엘 사이에 평화가 온 듯 했지만, 새로운 분쟁이 잉태됐고, 중동에 평화는 오지 않았다.

빅딜에는 언제나 위험, 즉 리스크가 따르기 마련이다. 빅딜이 문제없이 이행만 된다면 한반도는 약 70년 간 유지했던 정전체제를 탈피하고 전쟁 걱정없는 평화의 시대를 열 수 있다. 그러나 이행과정에서 마찰이 생긴다면, 혹은 이행이 제대로 추진되지 않는다면 한반도는 갈등을 반복하고 살얼음판을 계속하는, 현상유지보다 더 위험한 국면을 직면할 수밖에 없다.

▶‘영변핵시설’ 아닌 ‘풍계리 핵실험장’ 논의한 북미=

“같은 차를 또 파는 행위다.”

미국의 핵확산 전문가들은 폼페이오 장관의 방북결과에 대해 이같이 밝혔다.

폼페이오 장관은 김 위원장으로부터 ‘풍계리 핵실험장 사찰’ 등을 받아낸 것을 성과로 내세우고 있다. 기대했던 빅딜에 대한 내용은 아니었다.

하지만 작은 진전도 진전이다. 풍계리 핵실험장 사찰을 둘러싼 북미간 협의는 향후 비핵화 협상 과정에서 생략될 수 있는 ‘디테일’들을 채우는 방법에 대한 여러가지 의제를 던져준다는 데에 있어 그 의의가 있다.

예컨대, 북한은 앞서 유관국 전문가와 취재진의 참관 하에 풍계리 핵실험장을 폭파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5개국 취재진이 참관한 가운데 지난 5월 풍계리 핵실험장을 폭파했다. 거의 6개월이 지난 후에 같은 제안을 한 것이다. 풍계리 핵실험장에 투입된 핵 물질의 양에 대한 신고가 이뤄지지 않아 국제원자력기구(IAEA) 전문가가 사찰단에 포함돼도 핵 물질을 검증(verify)할 방법이 없다는 한계도 있다.

그러나 만약 북한이 풍계리 핵실험장에 대한 사찰단의 시설 접근을 허용한다면 미국은 더 이상 김 위원장의 비핵화 의지를 의심하기 어려워진다. 미국이 종전선언 등 상응조치에 대한 구체적 의사를 밝히지 않은 상황에서 북한이 핵무기 및 핵무기에 대한 투명성을 제고하는 것은 향후 미국이 적절한 상응조치만 취한다면 핵물질ㆍ핵무기 전반에 대한 신고 및 폐기에 대한 검증이 이뤄질 있다는 북측 주장에 힘을 실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빅딜에서 탈피해 디테일 효율적으로 논의할 방법 찾아야= 문재인 정부가 ‘톱-다운’ 방식의 빅딜을 중심으로 한 신속한 합의를 중요시 하는 이유는 시간 때문이다. 정권의 지속성이 보장되는 북한의 체제와 달리 미국과 한국정부는 정책의 지속성이 보장되지 않는다. 문재인 정부가 9월 유엔총회 계기 남북미 종전선언을 추진했던 이유도 11월 중간선거 이후 트럼프 행정부의 대북정책이 바뀔 수 있다는 불안 때문이었다. 이 불안이 근거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불안한 협상은 언젠가 깨지기 마련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개인의사에 따라 북미협상 판과 한반도 정세가 흔들린다면 그것 자체만으로 한반도 정세는 큰 리스크를 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트럼프 행정부 이후에도 미국이, 그리고 북한이 협상을 지속할 지도 불투명하다.

이러한 리스크를 줄여주는 것은 정상간 빅딜과 ‘스테디 스테이트’(steady state), 즉 정책을 이행하는 실무진 간 합의가 박자를 맞출 때다. 정상 간 빅딜이 이뤄지고 그 빅딜에 대한 순서(이른바 시퀀스), 방식, 그리고 정의에 대한 합의가 이뤄져 실질적인 이행이 이뤄졌다면 그 합의 자체를 부정하거나 깰 명분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지난 25년 간 북한의 비핵화를 둘러싼 합의가 이행되지 않은 이유는 단순히 합의의 ‘급’이 낮았기 때문이 아니다. 비핵화 정의와 방식, 그리고 순서에 대한 합의가 미숙했고, 이에 따라 비핵화 조처와 상응조처에 대한 이행이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폼페이오 장관의 4차 방북은 그 과제에 대한 해결방법에 대해 논의할 틈을 만들었다. 당장 ‘영변핵폐기-종전선언’에 대한 빅딜을 성사시키는 것보다는 북미가 ‘비핵화-상응조치’에 대한 디테일을 효율적으로 협의하고 ‘디테일의 악마’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해야 이 작은 진전이 ‘실질적 진전’으로 발전하지 않을까. 빅딜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머리를 맞대보자.

munja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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