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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리즘] ‘졌잘싸’는 이제 그만
“너 진짜 갈 수 있겠니?”

“네, 국외여행허가서만 나오면 반드시 갈 겁니다.”

지금으로부터 딱 20년 전, 지구촌은 1998년 프랑스월드컵으로 축제 분위기에 들떠 있었다.

당시 대학 휴학생이던 기자는 축구국가대표팀 서포터 ‘붉은악마’의 일원으로 프랑스에 갈 계획이었지만, 휴학생은 국외여행허가서가 발급되지 않는다는 규정에 가로막혀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프랑스에 갈 수 없을 게 뻔했다.

신인철 당시 붉은악마 회장이 돌파구를 찾아냈다. 프랑스에 갈 붉은악마 멤버들 중 휴학생 6~7명의 명단을 만들어 ‘이들이 프랑스월드컵 한국팀 응원을 갈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공문을 정부에 보낸 것이다.

당시 DJ정부는 놀라울 만큼 신속하게 반응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찾아간 광화문 정부서울청사에서 우리를 환대하던 한 공무원의 얼굴 가득한 미소를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는 ‘몸 건강히 잘 다녀오시라’는 덕담과 함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명의의 문서를 우리에게 건넸다. 인생에 다시 찾아올까 싶은 프랑스월드컵 원정응원은 이렇게 시작됐다.

현지에 도착한 붉은악마들은 밤 10시까지 해가 지지 않는 프랑스의 백야 현상에 완벽 적응했다. 파리 샹젤리제 거리에서 한 손에는 음료, 한 손에는 태극기를 휘날리며 세계 각국의 축구팬들과 어울렸다.

노틀담 성당이나 에펠탑을 유람하는 한편, 경기장 앞에 새까맣게 몰려든 상대팀 응원단과 유치한 기세 싸움이 벌어지기라도 하면 마치 전쟁터에 나서는 전사처럼 진지하게 얼굴을 붉히고 목청을 높였다.

네덜란드전 시작 직전 마르세유 벨로드롬 경기장 앞에서 오렌지 물결을 향해 ‘너희들은 결국 한국에 무릎 꿇게 될 것’이라고 외치던 붉은악마들의 함성이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하지만 리옹에서 열린 멕시코와의 첫 경기에서 월드컵 사상 최초의 선제골을 넣고도 3:1로 역전패한 여파가 컸다. 최소 네덜란드와 비기고 벨기에에 이겨야 16강토너먼트 진출이 가능했다.

당시 네덜란드는 세계적 명장 거스 히딩크 감독(2002년 한국 감독)의 지도 하에 베르캄프, 클루이베르트, 반데사르 등 세계적 탑클래스 선수들이 즐비해 우승 후보로 평가받고 있었다. 결과는 5:0 패배.

오렌지 물결 가득했던 벨로드롬 경기장에서 실핏줄처럼 외로운 싸움을 벌였던 붉은악마들은 경기 직후 고국에서 타전된 ‘차범근 감독 경질’ 소식에 또 한 번 무너져내렸다.

마지막 벨기에전은 대표팀의 사활이 걸려 있었다. 여기서마저 밀리면 끝이라는 위기 의식이 팽배했다.

선제골을 허용한 한국은 유상철의 극적 동점골로 1:1 무승부를 기록했다. 갑자기 유럽의 강호 벨기에의 16강 진출 좌절이 한국의 업적이 됐다. ‘졌지만 잘 싸웠다’는 것이다. 이게 20년 전 일이다.

이번 러시아월드컵은 20년 전 프랑스월드컵의 데쟈뷰처럼 느껴진다.

멕시코에 아깝게 졌고, 세계적인 강호 독일을 꺾어 16강 진출을 좌절시켰다. 그리고 ‘졌지만 잘 싸웠다’로 마무리한다.

월드컵에서 언제나 한국에 밀렸던 일본은 이번 월드컵에서 아시아 국가로는 유일하게 16강전에 진출했다. 남을 끌어내린 자와 스스로 진출한 자, 역사에 승자와 패자는 누구로 기록될까. 

soo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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