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시계
실시간 뉴스
  • “숙식 제공할게” 노숙자 유인해 대포통장 개설ㆍ유통한 30명 재판에
-노숙자가 세운 유령회사 명의 대포통장 1031개 개설
-보이스피싱 조직에 대포통장 팔아 5년간 7억원 수익
-노숙자 1명당 최대 120만원에 거래…점조직 운영

[헤럴드경제=김현일 기자] 서울 등지에서 노숙생활을 하던 엄모(31) 씨는 어느 날 식사와 잠자리를 제공해주겠다는 말에 이끌려 어디론가 따라나섰다. 거기서 만난 손모(48) 씨는 엄 씨에게 숙식은 물론 약간의 돈도 쥐어주며 호의를 베풀었다. 대신 엄 씨에게 “법인 1개를 설립하면 100만원을 주겠다”며 ‘검은 제안’을 해왔다.

엄 씨는 결국 손 씨의 제안에 넘어갔다. 손 씨는 엄 씨가 설립한 법인 명의로 대포통장을 만들었고, 그 대포통장을 불법 스포츠토토 사업자와 보이스피싱 운영자에게 내다팔아 수익을 올렸다. 손 씨는 범행사실을 감추기 위해 엄 씨가 건실한 사업가처럼 보이도록 합숙훈련을 시키는 치밀함도 보였다.

[사진=헤럴드경제DB]

서울중앙지검 강력부(부장 이용일)는 이 같은 방법으로 대포통장을 개설해 유통한 ‘총책’ 손 씨를 비롯해 노숙자를 모집ㆍ관리하고, 대포통장 유통을 알선한 일당 30명을 재판에 넘겼다고 19일 밝혔다. 이 중 16명은 구속기소, 14명은 불구속 기소됐다.

검찰에 따르면 이들은 2012년 5월부터 올해 3월까지 노숙자 47명의 명의로 유령법인을 세우고, 유령법인 명의로 발급한 대포통장을 인터넷 도박이나 보이스피싱 집단에 제공한 혐의를 받는다. 이렇게 세운 유령회사만 119개, 대포통장은 1031개에 달했다.

이들은 각자 역할을 철저하게 분담하고, 서로 실명도 공개하지 않는 점조직 형태로 움직였다.

‘노숙자 모집책’ 양모(62) 씨와 오모(59ㆍ여) 씨는 서울역과 강남고속버스터미널, 수원역 등에서 유인한 노숙자들을 1명당 80만원~120만원을 받고 총책 손 씨에게 넘겼다.

손 씨는 사전에 노숙자의 주민번호로 신용상태를 조회한 후 회사 설립이 가능한 노숙자만 넘겨받아 원룸에 합숙시켰다. 이후 노숙자가 세운 회사 명의로 개설한 대포통장을 1개당 50만원~150만원에 팔아 월 140만원의 수익을 올린 것으로 나타났다.

노숙자 중에는 총 4개의 유령법인을 설립하고 69개의 대포통장을 유통한 이도 있었다. 검찰 관계자는 “고등학교 졸업 후 취업 실패로 생활고를 겪던 20~30대 노숙자도 이번 범행에 가담했다”고 설명했다.

[사진=헤럴드경제DB]

이번 사건은 총책 손 씨가 검거되면서 실체가 드러났다. 앞서 손 씨가 데리고 있던 노숙자 관리책과 노숙자 등 22명이 2013년과 2015년 경찰에 검거됐지만 손 씨는 이를 피해갔다. 그러나 검찰은 이번에 손 씨와 나머지 노숙자 관리ㆍ모집책, 대포통장 유통 알선책 등을 검거하는 데 성공했다.

손 씨는 금융당국이 최근 대포통장 유통 방지를 위해 개인 명의 계좌 개설요건을 강화하자 법인 명의 대포통장으로 눈을 돌린 것으로 드러났다. 법인 명의로 여러 개의 통장을 만들 수 있는 데다 이체 금액도 큰 점을 이용한 것이다.

검찰은 손 씨가 5년간 범죄수익으로 챙긴 7억원을 전부 추징할 예정이다.

검찰 관계자는 “법인설립 등기신청 대행에 대해선 아무런 규정이 없어 최소한의 절차 준수의무를 관련 법령에 신설하고 그 의무를 위반할 경우 징계 등 강한 제재를 규정할 필요가 있다”며 아울러 “계좌개설 심사를 강화하고, 의심거래 계좌로 판단되면 금감원과 수사기관에 통보해 계좌거래를 정지하는 절차가 마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joze@heraldcorp.com
맞춤 정보
    당신을 위한 추천 정보
      많이 본 정보
      오늘의 인기정보
        이슈 & 토픽
          비즈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