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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내면 죽을 것 같아 시작한 그림책…벌써 40년”
“그림책은 칠드런북 아닌 인문교양서이자 순수 예술”
일본작가 다다히로시의 책‘사과가 쿵’55쇄 찍기도
전문출판사 권종택 보림대표의 ‘그림책 연가’




“이걸 못내면 죽을 것 같았어요.”

그가 간절한 눈빛으로 이렇게 말할 때 그의 얼굴은 환하고 미세하게 떨렸다.

그 남자를 홀린 책은 ‘레베카의 작은 극장’이란 그림책이다. 책값이 무려 6만원이다. 그림책의 새로운 쟝르를 연 것으로 평가받는 이 그림책은 섬세한 레이저컷팅으로 한장 한장 입체적으로 펼쳐지고 겹쳐지면서 마치 인형극을 보는 듯한 재미에 앨리스의 신비한 동굴로 들어가는 듯한 마법으로 이끈다.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만 90명. 프랑스 출판사는 10개국으로부터 선주문을 받아 그림책을 제작했다. 
‘사과가 쿵’이란 그림책이 있다. 보림출판사에서 낸 일본작가 다다 히로시의 책이다. 이게 100만부 이상 나갔다. 96년도에 출간한 책은 55쇄를 찍었다. 지난해 보드북으로 만든 책도 잘 나가고 있다. 이 그림책을 냈던 일본출판사가 비법이 뭔지 물었다. 일본은 훨씬 그만 못했기 때문이다. 왜 유독 한국에서 잘 팔리는 걸까. 권 대표는 한번 읽어보라고 책을 건넸다. 윤병찬 기자/yoon4698@heraldcorp.com

이 책을 낸 그림책 전문출판사 보림의 권종택 대표(70)는 눈에 가장 잘 띄는 곳에 놓고 틈틈이 펼쳐보고 있다. 6만원이나 되는 그림책을 살 사람이 있을까 싶지만 이 책은 3000부를 찍어 모두 나갔다. 인도의 화가 람바로스 자가 작업한 ‘물속 생물들’이란 그림책은 한장 한장이 판화인 예술작품이다. 책은 에디션이 붙어있다. 가격은 4만3000원.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부인’을 환상적인 그림책으로 만들어낸 벤자민 라콩브의 동명 그림책은 책값이 5만원이지만 초판 3000부가 모두 팔리고 다시 1000부를 찍었다.

이쯤되면 그림책을 아이들이나 보는 책이란 편견은 무지임을 알게 된다.

“지향하는게 예술적인 그림책이라면 팔리든 안팔리든 내야한다는 생각이에요. 손해를 따지지 않고 내자했는데 좋아해주는 독자들이 있더라고요.”

이런 그림책은 2012년부터 보림의 ‘더 컬렉션(The Collection)’이라는 시리즈로 19권이 나왔다.



희귀 그림책으로 가득찬 그의 방

권 대표는 그림책만 40년동안 내왔다. 그림책과 사랑에 빠진 이 남자의 방은 국내외 희귀 그림책들로 가득하다. 쉬고 싶을 때는 팝업북 ‘나무늘보가 사는 숲’을 펼치고, 머리가 복잡할 때는 마리옹 바타유의 ‘에이비씨’를 꺼내 평면에서 입체로 바뀌는 그림책 놀이를 즐긴다.

누군가에게 그가 빠져있는 것이 왜 좋은지 묻는 건 어리석은 일이지만 그래도 물어봤다.

“그림책은 마력이 있어요, 한권 한권 기발하고 독창적이고 의미있고…”

그림책의 좋은 점을 줄줄이 열거하던 그가 벌떡 일어나 2층으로 뛰어올라가더니 이런 저런 그림책을 한아름 들고 왔다. 구차한 설명 대신 직접 눈으로 보라는 뜻이다.

그렇게 그가 들고 온 책들은 한마디로 그림책의 신세계였다.

“그림책은 아이들만 보는게 아니에요. 그림책은 평생 세 번 읽는다고 말합니다. 어렸을 때 엄마가 읽어주고 나중에는 자신의 아이한테, 그리고 만년에는 내 자신을 위해 보는 거죠. 나이든 사람이 그림책을 보면 너무 좋아요. 무한한 가치가 들어있거든요.”

그림책을 보다 가슴 찡한 감동에 뭉클해하며 울기도 했다는 그는 열정적인 그림책 강의를 이어갔다.

“한 권의 그림책은 평생을 두고 보거든요. 좋은 그림책은 볼 때마다 새롭죠. 그림책은 칠드런 북이 아니라 그냥 픽쳐북이에요.”

그의 출판인생은 우리나라 그림책의 역사와 같다. 70,80년대 그림책은 비행기, 자동차와 같은 사물과 한글을 알려주는게 전부였다.

“70년대에는 그림책이란 용어도 없었어요. 도안이라 불렀죠. 동화책안에 그림이 들어가는 정도였죠.”

순수한 그림책이 나오기 시작한 것은 8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였다. 보림, 시공사, 재미마주 등 몇몇 출판사들이 시장에 뛰어들었다. 유아문학이란게 가능한지 2년여 고민 끝에 권 대표가 내놓은 첫 작업은 ‘위대한 탄생’이란 전집이다. 전세계 유명한 그림책 108권, 국내 창작그림책 36권 등 모두 144권으로 구성했다.



日 서점가에 있는 전세계 원서 보고 전율

“80년대 중반 쯤 일본 서점에 가보니까 전 세계 그림책이 원서로 다 들어와 있는 거에요. 전율을 느꼈죠. 이게 그림책이구나.”

전집이 얼마간 성공을 거두자 권 대표는 창작그림책에 도전했다. 뭔가 의미있는 작업을 해보고 싶었다. 90년대 당시 사회적 분위기는 전통의 새로운 발견에 초점이 모아지고 있었다.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라는 말이 누구나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우리 아이들이 처음 책을 접할 때 전통문화를 소재로 한 우리 그림책이 있으면 좋지않을까 생각했어요.”

그렇게 나온 책이 ‘전통문화그림책 솔거나라’시리즈다. 신화, 한지, 항아리 등 우리 전통문화를 다룬 이 책들은 지금도 꾸준히 나가고 있다.

그림책 단행본은 공이 많이 들어가는 작업이다. 전집을 하다가 단행본으로 전환하는게 쉽지 않다. 창업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말이 나온다. 기획에서 출판까지 3,4년은 기본. 보림의 지식그림책 ‘작은역사’시리즈의 경우 5권 만드는데 5억원이 들어갔다.



‘작은역사’ 시리즈 5권 제작에 5억 들어

‘작은역사’시리즈 중 하나인 ‘한양 1770년’을 보면, 고증의 꼼꼼함이 놀라울 정도다. 사대문이 열리면서한양의 아침이 깨어나고 아침 일찍 길에 나서는 이들, 북촌의 아침풍경, 육조거리 풍경, 사대문 밖, 종로시전 등 집과 거리, 옷차림, 당시 풍속 등을 고스란히 재현해 놓아 1770년으로 시간여행을 떠난 듯한 착각이 들 정도다. 이 그림책은 국내에선 드문 포맷 수출책이기도 하다. 대만 출판사에 정가의 3%를 받는 조건으로 수출했다. 그림과 책의 구성, 기획이 그만큼 빼어나다는 얘기다.

이 시리즈의 또 다른 책 ‘달리는 기계, 개화차, 자전거’는 독일에 수출돼 올해 책이 나왔다. 내년 자전거탄생 200주년을 앞두고 독일에서 출간된 이 책은 개화차 부분만 독일 얘기로 바꿔 나왔다.



獨·佛 등 20여권 저작권 수출 쾌거도

이렇게 저작권을 수출한 책만 20여권에 이른다. ‘그림책 왕국’으로 불리는 프랑스를 비롯, 일본, 중국 등이 주요 대상이다. 국제적인 그림책 상도 여럿 탔다. 조은영 작가의 ‘달려라 토토’가 세계 3대 그림책 상의 하나인 BIB 상에서 한국최초로 그랑프리를 차지했다. 유주연 작가의 ‘어느날’은 BIB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흔히 90년대 후반에서 2000년 중반까지를 그림책 호황기로 부른다. 베이비붐 세대, 특히 인문학에 관심이 많은 386세대들이 아이들을 낳기 시작하면서 그림책 시장은 폭발했다.

우리 아이들에게 좋은 책을 보게 하자는 뜻에서 교사들이 중심이 돼 만든 ‘어린이 도서연구회’가 일반에 개방되자 386세대 엄마들이 뛰어들어 학교도서관을 바꾸기 시작했다. 질 낮은 책들을 모두 걷어내고 좋은 책으로 대체하면서 그림책 시장은 빠르게 성장했다. 이에 따라 많은 훌륭한 작가들도 생겨났다. 최근 국내 작가들이 해외에서 유명한 그림책 상을 휩쓸고 있는 건 그 여파다.

그런데 2000년 후반부터 그림책시장은 썰렁해졌다. 386세대의 아이들이 자라 청소년문학으로 옮겨간 것이다.

“요즘 젊은 엄마들은 너무 실용적이죠. 당장 도움이 되는 것에 관심이 많잖아요. 아이들 책이라면 생활습관을 좋게 해준다든지 학습에 도움이 되는 것만 찾죠.”



요즘 엄마들 너무 실용서에만 관심

그는 엄마들이 진정한 그림책의 가치를 모르는 것 같다며 안타까워 했다.

“그림책의 가치는 그런게 아니에요. 본 것이 아이들의 속에 내재돼 살아가면서 삶의 순간 순간 동반하는 거죠. 어렸을 때 내재된 것이 중요한 것을 판단해야 할 때 큰 도움을 준다고 생각해요. 내재된 것에서 나와야만 좋은 판단을 할 수 있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그는 그림책을 인문교양서, 순수 문학, 순수 예술로 부른다.

이런 가치에 기반한 그림책, 그림의 예술성을 강조한 그림책이 바로 2012년부터 내오고 있는 ‘더 컬렉션’시리즈이다. 최근에는 기술이 가미된 아트 그림책으로 확장해가고 있다. 또 예술놀이 그림책인 액티비티 그림책에도 관심이 많다. 그림책을 갖고 놀면서 자연스럽게 예술적 감성을 키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좋은 그림책이란 어떠해야 할까. 그는 주저하지 않고 그림의 예술성을 꼽았다.

“그림책은 아이들이 가는 첫번째 갤러리에요.” 

이윤미 기자/mee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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