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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美 대통령의 ‘문고리 권력’과 점성술사, 그들이 ‘최순실’과 ‘문고리 3인방’이 될 수 없었던 이유
[헤럴드경제=문재연 기자] “나는 대통령의 각종 회담과 연두교서, 출장과 대선토론 일정을 짜는 총책임자였다”

최순실의 이야기가 아니다. 1981년부터 1989년까지 미국을 대표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에게 ‘자문’ 역할을 했다는 점성술가 조앤 퀴글리에 대한 이야기다. 퀴글리는 자서전을 통해 레이건 대통령의 일정을 짜는 데 영향을 끼쳤다고 밝혔다.

민주주의 국가인 미국에서도 비선세력은 존재했다.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의 특별보좌관이었던 해리 홉킨스는 ‘대통령의 복심’이라 불리며 연설문 초안까지 작성해왔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절친이자 특별보좌관인 셔먼 애덤스는 미국 백악관 역사상 최고의 ‘문고리 권력’으로 통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최태민이나 최순실, 그리고 이른바 ‘가신 3인방’에 맞먹는 권력을 휘두르지는 못했다. 미국에는 행정부를 견제할 수 있는 ‘양원제도’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대통령의 권력이 항상 이들 ‘위에’ 있었기 때문이다. 뉴욕타임스는 1977년 ‘대통령의 절친이 된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기사로 “이들은 대통령의 영향력 하에 권력을 취할 수 있었다”라고 설명했다.
 
1988년 전 비서실장 도널드 리건은 낸시 레이건 여사가 점성술사 조앤 퀴글리의 별점에 의지해 레이건 대통령의 일정을 짜왔다고 폭로했다 [사진=타임 지]

한편, 낸시 레이건 영부인은 백악관 역사상 영향력이 가장 강했던 퍼스트레이디였다. 낸시 여사는 레이건의 목소리톤, 시선, 동작까지 하나하나 꼼꼼하게 조언했고, 레이건 대통령의 일정과 복장까지 챙겼다. 레이건 대통령의 비서실차장이었던 마이클 디버는 낸시 여사가 하루에 12번 이상 전화를 걸 정도로 귀찮게 했다고 말했다. 백악관 업무에 적극적으로 간섭해왔던 낸시 여사는 자신에 충성하는 기자들에게 정보를 흘려 레이건 대통령에 자신의 뜻을 피력하기도 한 것으로 전해졌다. 기자들이 레이건 대통령에 곤란한 질문을 던질 때도 낸시 여사는 적당한 답을 레이건 귀에 속삭여줬다.

퀴글리 점성술사가 국정운영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었던 것은 낸시 여사의 권력 덕분이었다. 퀴글리 점성술사는 향후 자서전에서 미ㆍ소 핵감축협상에 나설 것을 레이건 대통령에 강권했다고 밝혔다. 평소 미신에 관심이 많았던 것으로 알려진 레이건 대통령도 퀴글리의 지시에 따라 일정을 결정했다. 당시 대법관으로 새로 임명된 앤서니 케네디의 기자회견은 퀴글리가 추천한 오전 11시 32분 25초에 정확히 맞춰서 진행됐다.

‘권력과 사치에 굶주린 영부인’이라는 악담에 시달리기도 했지만 낸시 레이건의 영향력이 상ㆍ하원, 대법원에까지 갈 수는 없었다. 퀴글리 역시 자신과 백악관의 연계를 철저히 비밀로 했고, 자신의 영향력을 ‘세력화’할 수 없었다. 자신의 영향력은 낸시 여사의 권력을 등에 업고 생겨난 것이었기 때문이다. 낸시 여사는 행정부 내에서도 견제를 받았다. 그 정체는 바로 레이건 대통령을 옆에서 보조한 비서진과 보좌관들이었다.

1988년 레이건 대통령의 비서실장이었던 도널드 리건은 레이건 대통령이 점성술에 의존해 정책 결정을 내렸다고 폭로했다. 당시 레이건 대통령을 가까이에서 지켰던 비서진들 4명이 잇달아 회고록을 통해 레이건의 무능을 비판한 상황이었다. 개인적인 정실에 얽매이지 않고 대통령의 치부를 폭로할 수 있는 문화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1981~1985년 재무장관을 지내다가 1985~1987년까지 레이건 전 대통령의 비서실장을 지냈던 도널드 리건 [사진=게티이미지]


미국의 국가발전은 개인에 입각한 자유경제와 삼권분립의 정치체계를 바탕으로 이뤄졌다. 특히 미국의 대통령제는 대통령과 사법부가 거부권이나 위헌 심사권을 통해 입법과정에 개입할 수 있도록 했다. 대중적인 요구에 취약한 입법부의 독주를 대통령과 사법부가 견제한 것이다. 덕분에 미국 대통령제는 대통령의 ‘강한 지도력’ 하에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입법부와 사법부와 권한을 공유하는 동시에 상호 견제하며 제도적 균형을 유지해왔다. 여기에 대통령이 비서진과 보좌관들에 업무를 분담하면서 보좌관들이 대통령과 영부인의 권한을 분산하는 구조가 형성됐다.

1986년 레이건 정권이 이란에 무기를 판매해왔다는 ‘이란 콘트라 스캔들’(Iran-Contra affair)이 터지면서 레이건 대통령은 자신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상원의원의 존 타워(John Tower)에게 특별조사위원회를 구성토록 지시했다. 하지만 타워위원회는 레이건의 지나친 권한위임과 국정에 대한 무관심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에 낸시 여사는 자신에게 충성하는 언론인들을 이용해 사태를 리건 비서실장의 책임으로 돌리고 자신과 리건의 권력투쟁을 표면화시킴으로써 여론의 시선을 돌리려고 했다. 하지만 뉴멕시코 주의 하원의원 윌리엄 리처드슨은 의회 발언을 통해 “일국의 대통령이 자신의 비서실장과 아내의 분쟁조차 해결하지 못하면 소련을 어떻게 상대할 수 있는가”라며 레이건의 리더십을 비난했다.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과 낸시 레이건 전 영부인.

레이건의 통치방식은 언론의 관심을 받게 됐다. 타임 지는 “이란-콘트라 스캔들의 놀라운 점은 레이건의 게으르고 유유자적한 태도가 그를 곤경에 몰아넣었다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그런 식으로 정치를 해왔으면서도 지난 6년간 그토록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인가다”라고 지적했다. 여기에 1988년 조앤 퀴글리의 존재가 폭로되면서 레이건의 무능이 점점 이슈화됐다. 이러한 사태 속에서도 레이건은 대중의 인기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국정운영에서 그의 권한은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민주당의 하원의원들은 정책을 통과시킬 때 공화당과 부딪치면 “왜, 점괘가 나쁘게 나오냐”라고 비아냥댔다.

우리나라의 국가발전은 국가 주도의 계획경제에서 시작됐다. 최태민과 최순실의 ‘비선세력’이 문제가 되는 것은 이들이 재계, 정계, 사법계 등에 두루 걸쳐 자신의 세력을 확장한 정황이 포착되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 주도의 계획 경제에서 독재자는 ‘인사권’이라는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게 된다. 측근들도 마찬가지다. 조금이라도 더 유리한 법안과 판결, 그리고 시장환경이 필요한 이들은 측근들에게 아부할 수밖에 없다. 블라디미르 푸틴의 측근들이 막대한 부를 쌓을 수 있던 것도 이러한 체계 덕분이다.

1975년 8월 14일 매일경제 보도에 따르면 최태민은 육영수 여사의 1주기를 기리는 추모예배를 주최했다. 이후 12월 11일 야간무료진료센터를 개원했는데, 이 개원식에 박근혜 영애가 참석한다. 재경판사들 56명은 최태민이 주최하는 헌혈 운동에 참여하기까지 했다. 일개 사교의 목사와 그의 딸이 기업에 막대한 자금을 요구하고 재단을 ‘사유화’할 수 있었던 배경은 독재자와 그 가족을 중심으로 형성된 수직적인 권력구조에서 탄생했다. 

동아일보 1975년 6월 23일자 기사. 최태민이 창설한 ‘구국선교단 십자군’ 창단식에 박근혜 영애 (현 대통령)이 참석했다고 밝히고 있다. [사진=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막스 베버에 따르면 국가의 본질은 ‘폭력’에 있다. 정부는 군대, 경찰 등을 통해 신체적 폭력을 다루고 금감원, 국세청 등으로 금전적인 폭력을 다룬다. 그리고 두 가지 폭력 위에 군림하는 폭력을 다루는 기관으로는 ‘정보’를 총괄하는 국정원과 검찰 등이 있다.

미국 행정부는 정보를 다루는 기관의 부패를 우려해 정보ㆍ감찰기구를 한 기관에 총괄토록 하지 않았다. 중앙정보부(CIA)와 국가 정보 관리국(DNI), 국방 정보 기구 (DIA) 등이 서로 견제하는 역할을 했으며, 수사과정에서는 연방수사국(FBI)까지 나서서 서로 권력의 균형을 이뤘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중앙정보기관은 국정원 한 곳이다. 이를 감시하는 법무부는 청와대의 권력에 영향을 받고 있다. 지난 2013년 혼외자식 논란으로 채동욱 검찰총장이 주요 언론의 뭇매를 맞고 사퇴할 때 박근혜 정부가 검찰총장의 옷을 벗기기 위해 조선일보를 언론플레이의 도구로 삼았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황교안 국무총리는 청와대와 정부가 우병우 민정수석은 감싸고 채동욱 전 검찰총장은 직어냈다는 야권의 주장에 “대처가 다를 수밖에 없다”라고 항변했다. 황 총리는 자신이 법무장관 재직 중이던 ‘채동욱 스캔들’ 당시 조선일보의 보도가 나간지 일주일 만에 전 총장에 대한 감찰을 지시했다.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

재벌권력은 정부보다 강한 권력이었을까. 금융위원회와 금감원, 그리고 검찰이 투입돼 CJ그룹 이재현 회장의 비리가 파헤쳐졌다. 이명박 정부와 친했던 성완종 전 경남기업의 회장도 검찰의 수사를 받았다. 당시 성 전 회장의 최측근은 헤럴드경제에 “(정부가) 가족까지는 건들지 않겠다고 약속했다고 들었다”라며 성 전 회장과 정부 사이의 모종의 거래가 있었음을 암시하기도 했다. 결국 성 전 회장은 ‘성완종 리스트’를 남기고 자살을 선택했다.

최순실과 최태민의 권력은 결국 관료주도 계획경제에 의지해왔던 기관과 기업들이 중앙권력의 ‘폭력’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탄생할 수 있었다. 문제는 최순실이 아니다. 권력주체의 측근들을 견제할 수 있는 권력 구조가 형성되지 않는 이상, 문제는 반복된다.

munja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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