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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한론…마지막 사무라이’ 사이고 다카모리, 야스쿠니에 합사된다
[헤럴드경제=문재연 기자] 일본 국회의원 70여 명이 야스쿠니(靖国) 신사에 ‘메이지 유신 3걸’이자 ‘마지막 사무라이’로 꼽히는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의 합사를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조선을 정복해 부국강병을 도모하자는 이른바 ‘정한론’(征韓論)을 펼친 인물이다. 흥선대원군이 일본의 국서(서계)를 거부한 사건을 놓고 ‘무력정복’보다는 ‘외교적 교섭을 통한 점진적 통치’를 추구하자고 주장해 일본에서는 최근 견한론(遣韓論ㆍ개국을 권하는 사절을 파견하자는 주장)자였다고 평가받고 있다.

일본 슈칸 포스트(週刊 ポスト)는 5일 보수성향이 강한 일본 국회의원들이 메이지 정부에 저항했던 막부ㆍ아이즈(会津)군과 서남전쟁 사이고 일본 세이난(西南)전쟁의 주역이었던 다카모리의 야스쿠니 신사 합사를 신사측에 요청했다고 보도했다. 발의자는 가메이 시즈카(亀井静香) 자민당 중의원 의원으로, 개헌파 인사로도 꼽힌다. 모리 요시로(森 喜朗) 전 총리와 후쿠다 야스오(福田 康夫) 전 총리를 비롯해 니카이 도시히로 자민당 간사장, 그리고 여야 의원 70여 명이 동참한 것으로 나타났다. 

사이고 다카모리가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지 못한 이유는 그가 메이지 신정부에서 실각한 이후 세이난(西南)전쟁을 주동했기 때문이다. 세이난 전쟁은 다카모리를 옹립하고 신정부에 저항하기 위해 일본 무사들이 1877년 일으킨 반란이다. 야스쿠니 신사는 ‘일왕이 곧 국가다’라는 신조로 일왕을 위해 전사한 이들의 ‘영혼’을 추모하기 때문에 일왕의 정권에 대항한 사이고는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될 수 없었다. 오로지 ‘일왕’만을 위해 목숨을 잃은 병사만이 ‘살아있는 영령’이 될 수 있다는 논리다.

하지만 지난 2013년 8월 19일 11대 궁사로 도쿠가와 마고토(德川康久)가 취임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도쿠가와 마코토는 에도(江戸) 막부 정권시대에 15대 쇼군이었던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의 증손자로, 그의 조상은 에도시대를 연 1대 쇼군인 도쿠가와 에이야스(徳川家康)이다. 시즈오카(静岡)신문과 쥬고쿠(中國)신문은 지난 6월 도쿠가와 궁사가 오는 2019년 야스쿠니 신사 창립 150주년을 앞두고 메이지유신 이전의 막부와 쇼군에 대한 인식의 전향을 향후 야스쿠니 신사가 안고 있는 과제이자 미래상으로 제시했다고 보도했다.

그는 “메이지유신 이전에는 일본의 문명이 후퇴했다는 인식은 잘못된 것이다”며 “에도시대는 기술이 발달하고 친환경적이었다”고 주장했다. 이어 “막부군과 아이즈군도 일본을 위해 생각하고 있었다. 다만, 가치관이 달라 전쟁이 되어 버렸다”고 발언했다. 도쿠가와 궁사의 발언을 보도한 매체는 쥬고쿠 신문과 시즈오카 신문 둘뿐이었다. 하지만 포스트 지는 이 보도로 정계는 물론, 종교계가 발칵 뒤집혔다고 설명했다. 도쿠가와 궁사의 발언은 ‘일왕을 위한 전쟁이야말로 성전이요, 일왕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 병사들은 성스러운 영혼’이라고 강조하는 야스쿠니 신사의 근본사상’ 뒤흔들고 있기 때문이다.

도쿠가와 궁사의 발언 이후 조슈 번 이외의 막부세력 출신의 의원들은 ‘막부도 일본을 위해 희생한 영웅이었다’며 야스쿠니 신사에 제신(祭神)해줄 것을 요구하고 나섰다. ‘사가(佐賀)의 난’이 발생한 사가 현의 하라구치 가즈히로(原口一博ㆍ민진당) 중의원 의원은 “‘사가의 난’에서 ‘난’이라는 표현은 지배자 측의 관점으로, 사가현민은 에도의 반란을 ‘사가의 난’이라고 하지 않고 ‘사가의 역(役)’이라고 부른다”고 말했다. 사가의 난을 일으킨 에토 신페이(江藤新平)가 정적인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 利通)의 음모 때문에 반란군으로 몰렸다는 주장이다. 그는 “지배자의 일방적인 견해가 아니라 ‘일본의 번영’을 위해 목숨을 잃은 이들을 재평가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영령을 추모하는 장소인 야스쿠니에 패자를 합사하는 것으로 평화를 도모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보신전쟁에서 일왕의 관군과 맞서 싸운 아이즈 번 출신, 아구마 신지(小熊慎司) 민진당 중의원 의원도 “합사에 찬성한다”며 “보신전쟁에서 아이즈 측의 전사자가 장기간 방치되는 등 비인도적 행위가 있었다”며 “1864년 ‘하마구리 고몬(蛤御門)의 변’(금문의 변)에서 아이즈와 사쓰마가 황궁을 지켰고, 조슈가 황궁에 발포를 한 패군이었다”고 주장했다. 이어 “그런데도 메이지유신 이후 공로도 없는 조슈 번의 인물까지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된 건 이상하다”고 지적했다.

본래 야스쿠니 신사는 1868~69년에 걸쳐 보신(戊辰)전쟁을 계기로 설립됐다. 일왕체제(일본에서는 ‘천황체제’라고 부른다)가 확립되기 직전 막부ㆍ아이즈 번 군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사망한 병사들의 영혼을 위로하고자 세워진 것이었다. 이후 야스쿠니 신사는 국가신도(國家神道)로서 메이지 일왕에서부터 지금의 아키히토(明仁)일왕까지 일왕을 위해 싸우다 목숨을 잃은 군인들을 ‘신격화’해왔다.

하지만 일본이 2차 세계대전에서 패하면서 야스쿠니 신사는 국가기관에서 민간 종교법인으로 바뀌었다. 이후 일본은 미국의 신탁통치를 받아 도쿄재판에서 A급 전범을 ‘신격화’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난 1978년 10월 후쿠다 다케오(福田赳夫) 당시 총리가 태평양 전쟁 A급 전범 14명을 야스쿠니 신사에 비밀리에 합사를 추진하고, 이때 마침 신사 책임자로 우익 성향이 강한 마쓰다이라 나가요시(松平永芳)가 부임하면서 A급 전범들의 합사가 이뤄질 수 있었다.

munja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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