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시계
실시간 뉴스
  • 노동과 실존의 줄타기…경계의 삶, 그 끝은
“삼십오 년째 나는 폐지 더미 속에서 일하고 있다. 이 일이야말로 나의 온전한 러브 스토리다. 삼십오 년 째 책과 폐지를 압축하느라 삼십오 년간 활자에 찌든 나는, 그동안 내 손으로 족히 3톤은 압축했을 백과사전들과 흡사한 모습이 되어버렸다.”
체코의 국민작가 보후밀 흐라발의 대표작 ‘너무 시끄러운 고독’은 이렇게 시작한다.
이 소설은 작가 본인이 “나는 이 작품을 쓰기 위해 세상에 나왔다”고 선언할 정도로 그의 정수가 담긴 작품. 소설의 화자인 한탸는 삼십오년간 폐지 압축공으로 일해온 인물이다. 바퀴벌레와 쥐가 들끓는 어두침침하고 더러운 지하실에서 맨손으로 압축기를 다루며 끊임없이 쏟아져 내리는 폐지를 압축한다. 매일 인류가 쌓은 지식과 교양이 가득 담긴 책들이 쏟아져 내리는 속에서 그는 책을 읽으며 뜻하지 않게 교양을 쌓게 된다. 또 귀한 책들은 따로 모아 그의 집은 수톤의 책으로 무너질 지경이다. 힘들지만 매력적이라고 느끼며 그는 죽는 순간까지 그 일을 할 생각이다. 그런데 어느 날 도시에 나갔다가 신식 시설에서 유니폼을 입고 장갑을 끼고 그리스 휴가를 꿈꾸는 압축공들을 보며 그는 위기감을 느낀다.
고된 일상에도 또 압축일을 반복하는 시지포스의 신화를 모티프로 한 이 소설의 끝은 비극적이다. 한탸는 끝내 압축기 안으로 걸어들어감으로써 생을 끝낸다. 근대의 종말, 광기어린 발전지상주의에 대한 작가의 우화다. 책이 그저 종이쪼가리로 취급받게 된 사회에서 살아가는 한 인간의 경계의 삶을 섬세하게 그려낸 소설은 중간중간 유머러스한 에피소드들에 진한 페이소스가 느껴진다.
이윤미 기자/meelee@heraldcorp.com
맞춤 정보
    당신을 위한 추천 정보
      많이 본 정보
      오늘의 인기정보
        이슈 & 토픽
          비즈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