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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음식문화의 창시자, 전쟁의 아이러니…
-제갈량의 만두·몽골기병의 육포·영국군의 통조림 등 대부분 전쟁중 탄생

-부산의 밀면·돼지국밥도 실향 아픔·배고픔속 등장



[헤럴드경제=문재연 기자]제 2차 세계대전은 유럽 열강들의 제국주의적 야욕에서 비롯된 끔찍한 사건이었지만 동시에 프랑스와 독일이 와인을 둘러싸고 다툰 사건이기도 하다. 2차 대전이 시작되면서 프랑스는 포도밭 농부들에게 수확을 일찍하도록 특별 명령을 내렸다.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독일군은 독일 고위층에게 공급할 와인을 구해오라는 사명을 받고 프랑스로 진격했다.

음식과 인류사는 뗄레야 뗼 수 없는 관계 속에 있다. 인류에게 음식은 ‘일상’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전쟁 속에서 태어나거나 진화를 거듭한 음식도 각양각색이다. 



제갈공, 밀가루로 만든 人頭로 江神을 달래다

▶제갈공명과 만두= 동양에서 대표적으로 꼽는 ‘전쟁 음식’으로는 만두가 있다. 만두는 삼국지의 수많은 영웅들 중 명석한 두뇌를 자랑하는 제갈공명에 의해 탄생했다. 제갈공명의 군대는 운남 지역을 정벌하고 맹획(孟獲)을 사로잡아 촉나라로 돌아오던 중 ‘여수’라는 큰 강을 지나야 했다. 하지만 군사들이 강을 건너려고 하자 갑자기 광풍이 불고 풍랑이 거세져 자칫 잘못하면 수장당할 위기에 직면했다. 풍랑을 잠재우기 위해서는 49개의 사람 머리와 검은 소, 그리고 흰 양을 제물로 바쳐야한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사람 머리를 제물로 바칠 수 없었던 제갈공명은 꼼수를 발휘했다. 그는 밀가루 반죽으로 사람의 머리 모양을 만들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그 반죽 속을 소고기와 양고기로 잘 다져서 인육 대신 집어넣었다. 사람의 머리 모양 반죽 속에 소고기와 양고기로 속을 채운 음식 49개를 마련해 인간의 머리 대신 제물로 사용했다. 이것이 바로 ‘만두(남만 오랑캐의 머리)’의 기원이다.

제갈공명이 49개의 만두를 강물에 집어던지는 의식을 마치고 나자 강에 휘몰아치던 광풍이 멎고 잔잔해졌다.

‘햄버거의 조상’ 몽골기병대의 전투식량 육포

▶몽골 기병대와 햄버거ㆍ순대의 탄생= 병사들의 먹거리가 또 하나의 음식문화를 창조한 경우도 있다. 13세기 아시아 대륙을 재패하고 유럽까지 진출했던 징기스칸의 몽골 기병대는 오늘날의 ‘순대’와 ‘햄버거’를 탄생시켰다.

몽골 군대의 뛰어난 전투력의 비결은 바로 그들의 기동력에 있었다. 그리고 몽골군대의 기동력은 병사 한 사람당 6마리의 말을 바꿔 타며 유지될 수 있었다. 또 말은 몽골 병사들의 ‘비상식량’이었다.

물이나 먹거리가 떨어졌을 때 몽골 병사들은 말을 잡아 그 피를 마시고 고기는 육포를 만들었다. 이들의 말안장 밑에는 미리 준비한 말고기나 양고기가 들어있었는데, 말을 타면서 적당하게 숙성되어 납작해진 이 날고기를 말 위에서 그대로 먹거나 모닥불에 구워 먹었다. 유럽인들에게 타타르 스테이크라고 알려진 이 요리는 나중에 독일의 함부르크(Hamburg)를 거쳐 미국에 소개되면서 오늘날의 햄버거(Hamburger)로 정착했다.

몽골 군대의 전투식량은 우리나라의 ‘순대’로도 진화했다. 원래 순대는 신선한 채소를 구하기 힘든 초원지대의 몽골인들이 내륙 지방에서 약탈한 채소와 가축을 도축한 뒤 소금을 뿌려 보관한 것에서 유래했다. 약탈한 채소와 다진고기를 보관한 말 혹은 돼지의 창자, 그것이 바로 순대의 기원이 된 것이다. 물론 순대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들이 있기는 하지만, 불교를 숭상하던 고려시대에는 육식이 금기시되었다는 점과 가축의 도살도 아주 드문 일이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순대는 몽골이 고려를 침략했을 당시 들어왔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나폴레옹의 아이디어 진화시킨 영국 통조림

▶나폴레옹과 캔요리= 19세기 초 프랑스의 황제 나폴레옹은 전투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거액의 상금을 걸고 식품 포장 및 저장법을 공모했다. 이것이 바로 ‘캔요리’의 기원이 됐다.

파리 변두리 식당의 요리사 ‘니콜라스 아페르(Nicolas Appert)’는 조리한 식품이 신선한 것보다 오랫동안 저장된다는 사실을 알아내 ‘음식을 고열 처리하여 병에 넣어 밀봉하는 것’이라는 명칭으로 자신의 연구결과를 나폴레옹의 공모에 제출했다. 프랑스군은 아페르의 병조림법을 채택해 나폴레옹 군대에 대량보급했다. 하지만 프랑스 병조림의 단점은 깨지기 쉽다는 것이었다. 총탄이 오가고 포탄이 터지는 전쟁터에서 유리병은 치명적인 단점이었다.

이러한 단점에 주목해 영국군은 ‘캔요리’를 탄생시켰다. 영국군은 프랑스의 기동력에 크게 밀리는 상황이었다. 프랑스군의 행군속도가 음식의 조리에 걸리는 시간을 개선했기 때문에 단축될 수 있었다고 믿은 영국은 나폴레옹처럼 아이디어를 공모했다. 런던의 기계공 피터 듀란드(Peter Durand)가 주석 깡통(Tin canisterㆍ우리가 ‘캔’이라고 부르는 통조림은 여기에서 비롯된 단어)을 이용한 통조림 개발에 성공했다. 듀란트가 개발한 통조림은 이후 군용 식품의 대명사가 됐다.



아편전쟁후 청나라온 영국인 입맛 맞춰 탕수육 개발

▶아편전쟁과 탕수육= 돼지고기 튀김을 새콤달콤한 소스와 버무려 먹는 탕수육은 세계인이 즐기는 중국의 대표 요리지만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18세기 청나라 시대에 중국과 영국은 활발한 무역을 벌이고 있었다. 하지만 중국이 일방적으로 흑자를 기록하자 영국은 인도에 막대한 양의 양귀비를 재배해 중국인들에게 아편을 팔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중국 전역에 아편 중독자들이 늘어나자 청나라 황제가 영국 상인들의 아편을 빼앗아 구덩이에 묻어버리고는 무역을 전면 중단하고 나섰다. 이 일을 계기로 영국과 청나라는 전쟁에 나서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아편 전쟁’이다.

하지만 영국에 대패한 청나라는 이후 강제적으로 항구를 개방해야 했다. 이때 중국으로 이주한 영국인들은 자신들의 입맛에 맞지 않는 중국 요리에 불만을 표현했다. 청나라 사람들은 이에 육식을 좋아하는 영국인들의 입맛에 맞을 뿐 아니라 서툰 젓가락질에도 쉽게 먹을 수 있는 돼지고기 요리, 바로 탕수육을 개발하게 됐다. 돼지고기를 한입 크기로 썰어 튀겨내고 달콤한 소스를 뿌린 탕수육은 영국인들뿐만 아니라 외국인들의 사랑을 받게 됐다. 



한국전쟁의 아픔 오롯이 담긴 밀면·돼지국밥

▶한국 전쟁의 아픔이 담긴 밀면과 돼지 국밥= 동족상잔의 비극을 담고 있는 음식도 있다. 1950년 발발한 6ㆍ25 전쟁 당시 부산은 임시수도로 북부지방의 피난민으로 바글거렸다. 전쟁의 아픔 속에 탄생한 수 많은 요리 중 밀면과 돼지국밥은 분단의 아픔을 나눈 북한 피난민들과 경상도민들의 슬픔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한국 전쟁 당시 부산으로 모인 이북 피난민들은 북한에서 먹던 냉면이 그리웠다. 하지만 메밀은 구하기 힘들었다. 대체제로 생각해낸 것이 바로 ‘부산밀면’이었다.

갑자기 늘어난 피난민으로 먹을 것이 부족하자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돼지 뼈를 이용해 국밥을 만든 것이 오늘날의 돼지국밥이다. 돼지국밥은 부산에서 쭉 살아온 사람에게 대부분 익숙한 음식이지만, 다른 지역에서는 먹기 힘든 음식 중 하나다. 쇠고기 뼈를 이용해서 만든 설렁탕과 달리 돼지 뼈를 이용해 만들었다는 점도 다르다. 

/munja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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