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시계
실시간 뉴스
  • [프리즘] 가방 속 컵라면과 여유 - 홍성원 소비자경제섹션 부동산팀장
고우나 곱지 않다. 허름한 담벼락에 줄지어 서 있는 장미가 내키지 않는다. 코를 쳐박듯해도 그들에겐 향기가 없다. 검붉음과 가시로 존재를 알릴 뿐이다. 미(美)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사랑한 소년 아도니스. 아프로디테가 소년을 구하려다 가시에 찔려 애초 흰색에서 벌겋게 물들었다는 장미엔 쓰라림이 없다. 허울 좋은 식자층이 각색해 구전되게 했을 신화란 데에 생각이 닿으면 이 꽃은 가식적이고, 인간은 영악할 뿐이다.

‘가방 속 컵라면’을 생각한다. 그건 치열한 삶을 대변한다. 사는 게 버거워 철로(鐵路)에 몸을 던지는 사람을 막는 용도인 스크린도어. 이 물건을 끼니 때울 시간이 부족할 정도로 숱하게 고쳤고, 또 손보려던 열아홉 청년이 희생됐다. 그에게 컵라면은 꿈을 위한 인내였으리라. 제 때 밥을 먹지 못하더라도 성실하게 일하면 정규직이 될 수 있다는 희망으로 가방 속에 그걸 넣어 뒀을 것이다. 고인의 유족 얘기로 짐작하는 그의 성정(性情)으론 컵라면은 창피함을 느낄 소지품일 수 없다. 


하지만 우린 그의 죽음에 안타까움을 더하는 유품으로 컵라면을 든다. 그만의 사고가 아닌 우리 모두의 현실이 될 수 있다는 불안과 공포, 동정 때문이다. 생명보다 돈ㆍ경영효율을 앞세웠던 사회를 너나 없이 질타한다. 자발적인 추모 열기에 더해 사방에서 불합리를 고쳐야 한다는 목소리를 낸다. 그 청년이 맞닥뜨린 참사는 더 이상 생기지 않을 것이라 믿고 싶지만, 불안하다. 우린 의식의 후진국에서 살아왔고, 개선의 여지는 잘 보이지 않아서다.

안철수 국민의 당 공동대표의 ‘여유’를 고민한다. 그가 품었을 위로의 선의(善意)는 퇴출됐다. ‘조금만 여유가 있었더라면 덜 위험한 일을 택했을지도 모릅니다’라는 문제적 문장 탓이다. 적지 않은 이들이 ‘안철수의 생각’이 고작 이 수준에 머물러 있는지를 묻는다. 해법을 찾기 힘들기에 재론하기도 버거운 양극화 사회에서 여유는 어느 쪽의 전유물처럼 돼 있는가. 모든 걸 포기하고 사는 젊은이들에게 선택적 여유를 아쉬워하는 용기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가. 안 대표는 이 문장을 SNS에서 지우고 다른 글귀로 대체함으로써 구차해졌다. 논란이 확산하자 3자를 통해 ‘부모님의 마음, 안타까운 심정을 표현했던 것…’이란 식으로 주어없던 (최초의) 문장을 변명하느라 모양이 빠졌다.

따지고 보면, 그만을 몰아세울 일도 아니다. 청년이 희생된 현장으로 정치인들은 우르르 몰려갔다. 재발방지ㆍ진상규명…. 너무 익숙한 용어들은 또 재생됐고, ‘네 탓’ 공방도 변하지 않았다. 공감능력이 빈약한 이들이 리더인양 행세하는 장면이 도처에 넘친다. 평소에 그늘진 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겐 관심 보이지 않던 인물들이 해결사처럼 행동하는 걸 보는 건 거북하다.

그저 그런 하루들을 싣고 달린 지하철에서 내려 또 한 번 장미와 마주했다. 여전히 향기가 없다. 그러나 장미에 죄를 물을 순 없다. 사람 냄새 풍기지 못하는 인간이 유죄이며, 나 또한 그런 부류에 속하려 아등바등해왔음을 부인할 수 없어 아리다.

- 홍성원 소비자경제섹션 부동산팀장 hongi@heraldcorp.com
맞춤 정보
    당신을 위한 추천 정보
      많이 본 정보
      오늘의 인기정보
        이슈 & 토픽
          비즈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