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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47일간의 세계여행] 104. 0.00km ‘the end’…33일만에, 걸음을 멈추다
-까미노 데 산티아고 +33:올베이로아에서 피스테라까지 35km


[헤럴드경제=강인숙 여행칼럼니스트] 산티아고를 떠난 후 사흘 내내 비가 내린다. 어젯밤 체코아저씨가 날씨가 개일 거라고 귀띔해 줬는데, 일기예보는 엇나가고 여전히 비 오는 아침이다. 옷깃을 단단히 여미고 배낭을 짊어지고 빗속으로 나선다. 일찌감치 문을 연 식당으로 들어가 데사유노를 사 먹고 커피까지 마시고 출발한다. 식당 한 구석 텔레비전 화면에서는 알아듣지 못하는 뉴스가 쏟아지고 음식을 날라 준고 난 주인은 느긋하게 신문을 뒤적인다. 2.5유로짜리 데사유노가 뱃속에 안착한다. 이 든든함이 마지막 발걸음에 힘을 보탤 것이다. 까미노의 마지막 날의 모든 것은 마치 의식처럼 경건해진다.


풍력발전기를 쉬지 않고 돌리는 세찬 바람은 먹구름을 재빠르게 밀어내는 중이다. 젖은 길은 질척해서 걷기도 힘들지만, 어두운 무채색의 하늘 아래 선명한 노란 꽃들이 걸음을 멈추게 한다. 먼 산들은 빗방울에 가려져도 그 사이를 굽이쳐 흐르는 강물은 시원하게 흐른다. 바람은 세지만 빗줄기는 가늘다. 우비를 입고 산길을 걷는 것도 오늘로 끝이 될 거라고 생각하니 우비가 바람에 펄럭이는 소리조차 그리울 태세다.


“To the END”라고 쓰여 있는 표지석이 끝을 향하고 있는 걸음을 확인해 준다. 시야에서 멀어졌던 케이가 표지석 옆에 앉아 그의 마지막 발걸음을 헤아리고 있다. 파란 우비를 입은 그의 뒷모습이 쓸쓸해 보인다. 속도를 내어 걸었는데 내가 금방 따라잡았다고 케이가 깜짝 놀란다. 아닌 게 아니라 발걸음이 얼마나 가벼운지, 발에 날개라도 달린 기분이다. 걷기 시작한 이래, 컨디션으로는 오늘이 최고다.
언덕 너머엔 늘 다른 언덕이나 산, 포도밭이나 밀밭과 함께 가야 할 길이 펼쳐져 있었다. 작은 언덕을 넘어서면 무엇이 보일까 싶은데 갑자기 시야가 툭 터진다. 바다다. 대서양의 푸른 물결이 일렁이고 있다. 바다를 처음 보는 산골 소녀처럼 감탄사가 뿜어져 나온다. 동쪽 내륙에서부터 걸어왔기 때문에 바다를 본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세상을 만나는 기분이다. 먹구름은 빠르게 사라지고 파란 하늘에는 흰 구름이 돌아다닌다. 날이 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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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항구가 보이는 도시로 들어선다. 세상의 끝을 향한 마지막 발걸음이 실감 난다. 열심히 걸었으니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나오는 바에 들어간다. “걷다가 즐기는 커피 한 잔의 여유”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까미노에서의 마지막 까페콘레체를 주문한다. 따뜻하면서 부드러운 이 달콤함을 다시 맛볼 수 있을까?
이곳은 제법 크고 아름다운 해변도시인 세(Cee)다. 커피에 비스킷도 먹었으니 다시 걷는다. 피스테라까지 남은 거리는 13.948km로 표기되어 있다. 인도와 남미 대륙의 해안을 섭렵하며 지구상의 웬만한 바다는 보고 왔다고 생각한 여행길인데 한 달을 걸은 후 마주하는 대서양은 눈시울을 붉어지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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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황량한 산길과 들판을 오가다가 해변도시에 도착하니 기웃거릴 것도 많다. 현지인들의 사는 모습을 보며 걷는다. 도시에서는 자주 길을 잃는다. 오랜만에 사람들을 붙잡고 길을 물어 도시를 빠져나간다. “돈 데 에스따...” 목적지도 말하지 않았는데 사람들의 손가락은 곧바로 어딘가를 가리킨다. 행색만 보아도 피스테라로 가는 까미노를 찾는 순례자라는 것을 감지하는 것이다. 어느 길모퉁이에서 또다시 갸우뚱하고 섰는데, 이층에서 빤히 내려다보던 할머니가 길을 알려주신다. 고마운 마음에 할머니 모습을 사진에 담으려고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 할머니는 자상하게 길을 가르쳐 주시고는 근엄하게 “노 포토”라며 고개를 저으신다. 이 골목에서 길을 묻는 순례자가 나 하나는 아닌 것 같다.
도시에서 나가 피스테라로 이어지는 길은 걷기도 편하고 경치도 좋다. 아름다운 숲길, 평탄한 도로를 지나 바다를 바라보며 걷게 된다. 세(Cee)에서 머무르고 가볍게 피스테라로 향하는 순례자들이 많아진다. 갑자기 순례자들이 정말 많이 나타난다. 그렇게 걷고 있는 순례자 중에는 비야르데마사리페라는 마을 알베르게에서 까미노 첫날이라며 식사를 함께 하던 독일 여자 카린도 있다. 독일인 동행과 함께 걷는 카린의 얼굴에는 마지막 걸음의 즐거움이 가득하다. 만날 수는 없어도 까미노의 어느 모퉁이에서 서로들 열심히도 걷고 있었다. 산티아고부터 걷는 사흘간 내내 비가 내리고 흐렸기에 이 오후의 파란 하늘이 너무나 상쾌하다. 우비를 벗어 들고 가는 발걸음은 소풍이라도 나온 듯 가볍다. 노란 꽃밭, 비췻빛 바다, 흰 파도와 몰려가는 흰 구름 사이로 보이는 푸른 하늘이 마지막 까미노를 축하해 준다.


마침내 마지막 마을 피스테라(Fisterra)로 진입하는 이정표를 마주한다. 더 이상 피로도 느껴지지 않는다. 끝이 없을 것 같았던 길, 까미노의 끝이 손에 닿을 거리에 있다. 감격하며 걷는 사이에 날씨는 완전히 갠다. 산티아고에 들어가던 날도 내내 비 내리다 오후에 맑아져서 행운이라 생각했는데 마지막 걸음인 오늘도 마찬가지다. 피스테라에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하늘은 맑아진다. 인도에서도, 남미와 스페인에서도 생각해보면 가는 곳마다 행운이 따르는 여행이다. 하늘도 도와주는 내 여행, 나는 크눌프의 운명을 타고난 걸까? 괜히 기분이 좋아져서는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


까미노의 화살표는 바닷가로 순례자를 인도한다. 등산화가 불편해진 케이는 신발을 갈아 신는다고 뒤쳐지고 내가 먼저 해변을 걷는다. 여름이면 사람들로 북적일 해변 풍경을 그려 본다. 여름에 이곳을 지나는 순례자들은 아마 바닷가에 풍덩 빠져들어 한바탕 놀다 갈 것이다. 그걸 상상하면서 고운 모래를 헤치며 걷는 발걸음이 괜히 신이 난다.
걸음을 멈추고 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케이를 기다린다. 홀로 바라보는 대서양의 일렁이는 파도에 마음이 울렁거린다. 걸음이 빠른 케이는 함께 출발해 걷다가 한두 시간 후에는 항상 앞서 걸었다. 혼자만의 걸음을 걷다 보면 어딘가에서 바 앞에서 나를 기다리기도 하고 약속한 알베르게에 먼저 도착해 있기도 했다. 재미있게도 오늘 마지막 발걸음에서는 오히려 내가 먼저 이 바닷가에 도착해서 케이를 기다린다. 세(Cee)에서 나오면서 편해진 아스팔트 길에 신고 있던 등산화가 버거웠다며 한참 후에 나타나는 것이다.


해변을 낀 아름다운 길을 걷고서야 피스테라에 도착한다. 이 아름다운 풍경을 보며 걷게 하려고 지난 사흘간 그렇게 비가 왔나 보다. 십자가 옆 벤치에서 바다를 보며 다리를 쉰다. 푸른 바다와 파란 하늘이 가슴을 시원하게 한다. 알베르게까지는 몇 걸음 남지도 않았다. 마지막 힘을 다해 걸음을 옮긴다.
​배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작은 항구 근처에 공립 알베르게가 있다. 눈 앞에 펼쳐진 항구 풍경과 갈매기 울음소리가 생소하다고 생각하며 발걸음을 내딛는다. 이제 몇 걸음이면 된다. 순례자 몇 명이 어슴프레 보이는 골목에 바로 알베르게가 있을 것이다. 거의 다 왔다 느끼는 순간, “꺄~악~!!!”하고 나도 모르게 환호성을 지르며 달려갈 수밖에 없다. 폰페라다에서 헤어진 후 일정이 맞지 않아 만나기를 포기했던 하루까가 약속이나 한 것처럼 눈앞에 서 있다. 느닷없는 케이와 나의 출현에 놀란 것은 하루까도 마찬가지다. 무슨 이산가족 상봉처럼 소리치며 껴안고 발을 구르니까 알베르게 주위에 있던 순례자들이 무슨 일인가 놀라서 쳐다본다.


문을 열지 않은 공립알베르게 문 앞에 배낭을 던져두고 주저앉아 수다를 떨면서 오스피탈레로를 기다린다. 우리가 산티아고에서 출발한 날 하루까는 그곳에 도착해서 하루를 묵었다. 이튿날 버스를 타고 피스테라가 아닌 중간 마을에서 내려 알베르게에서 잠을 자고 해변도시 세(Cee)에서부터 걸어서 피스테라로 온 것이다. 케이와 나를 만날 수도 있다는 걸 그녀는 알고 있었지만 약속을 한 게 아니라 확정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가장 극적인 순간, 우연히 세상의 끝에서 다시 만난 우리는 서로에게 뜻하지 않은 선물이 되었다. 이지고잉(?)한 성격대로 하루까는 이미 동행도 여럿이다. 오늘 저녁 7시 버스를 타고 산티아고로 돌아가서 지금 공부 중인 코임브라로 가는 국제버스를 탈거라고 한다.


3시가 되자 오스피탈레로가 온다. 피스테라의 마지막 공립알베르게에서 순례자로서 마지막 등록을 한다. 날마다 찾아오는 감격에 벅찬 얼굴들이 전혀 감동적이지 않은 듯한 오스피탈레로는 사무적인 얼굴로 능숙하게 일처리를 한다. 피스테라에 걸어서 도착했다는 인증서에 이름을 적어 마치 상장처럼 내민다. 크레덴시알에 피스테라알베르게 도장을 찍고는 한국인임을 확인하더니 “참 잘했어요”라는 한글이 찍힌 스탬프를 크레덴시알 뒷면에 무심히 찍는다. 그래도 모국어로 쓰여 있는 “참 잘했어요”라는 한마디는 어떤 찬사보다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지난 33일간 진짜 여권보다 소중하게 간직하던 순례자 여권에는 더 이상 도장을 찍을 빈칸이 남아있지 않다.
우리는 오늘 밤 이곳에 묵으려고 등록을 하고, 어제 이곳에서 머물렀던 하루까는 맡겨두었던 배낭을 찾는다. 공식적으로 알베르게는 하루밖에 묵을 수 없다. 특히 걷지 않고 버스로 이곳에 도착한 사람들에겐 잠자리를 주지 않는다. 하루까는 산티아고에서 여기까지 사흘을 다 걷지 않고 반은 버스를 타고 반은 걷는 편법(?)으로 여기 묵을 수 있었던 것이다.
도미토리에 들어가니 이미 여러 사람이 짐을 풀고 있다. 생장에서 출발해 걸었다는 알바니아 순례자들이 말을 건다. 커다란 덩치에 양 팔에 문신이 가득한 인상 험악한 남자가 말을 건다. 눈 덮인 피레네를 걸어내려 온 고생담을 이야기하는 그는 영락없이 순례자다. 론세스바예스에서 시작한 첫 발걸음도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데, 피레네 산맥의 눈을 헤치고 첫 걸음을 시작한 사람들은 고생이 대단했나 보다. 긴 걸음에 인상적인 일도 많았을 텐데 다들 만나면 그 이야기부터 꺼낸다.


샤워하고 빨래를 해서 널고 알베르게의 주방으로 내려가니 기다리고 있던 하루까는 그 사이 중대 결심을 했다. 오늘 저녁 버스로 산티아고에 가는 일정을 변경해서 다른 사설알베르게에서 하룻밤을 더 잔 후 내일 우리와 함께 산티아고에 가겠다는 것이다. 케이와 내가 그녀를 반기는 것만큼이나 그녀도 우리가 반가운 것이다. 이심전심이다.
신이 나서 하루까가 오늘 묵을 새 알베르게까지 구하고 나니 그제야 허기가 진다. 작은 해변 마을이지만 걸어서 도착하든 버스를 타고 방문하든 순례자들이 꼭 찾는 피스테라린지라 해물을 파는 식당과 바들이 꽤 많다. 포르투갈어 전공이라 비슷한 언어인 스페인어 의사소통도 잘되는 하루까를 시켜 조개구이를 주문한다. 그러나 정작 서빙된 것은 생선구이다. 뭘 헷갈린 건지 이 덜렁이 아가씨는 사고를 치고도 미안하다며 방실거리기만 한다. 덕분에 오랜만에 모둠 생선구이를 배 터지도록 먹는다.


오지랖 넓은 하루까는 일곱 시가 되자 식사를 하다 말고 버스정류장에 나갔다가 돌아온다. 그녀와 함께 오늘 저녁 산티아고 가기로 했던 동행들을 배웅하는 것이다. 이렇게까지 하면서 우리와 있고 싶어 하는 마음을 ㅇ해할 수 있다. 하루까와 우리 사이에는 다른 순례자들보다는 훨씬 끈끈한 유대감이 있다. 처음에는 동양인이라는 단순한 동질감에서 비롯되었지만 우연한 만남과 헤어짐이 반복되면서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인간적인 친근감이 돋아난 것이다. 하루까의 꾸밈없는 성격이 시너지 효과를 내기도 했고 그런 그녀를 좋아하는 마음이 전달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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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에서 나와 캔맥주를 사들고 서쪽 끝 등대로 간다. 하루까가 이미 다녀왔던 길이라 더 쉽게 간다. 등대로 가는 길도 3km가 넘는다. 아직 까미노는 끝난 게 아니었다. 하지만 배낭도 없이 하루까, 케이와 장난치고 사진 찍으며 걷는 길은 재미있기만 하다. 중간에 버스와 택시, 히치하이킹 등 다양한 교통수단을 이용한 하루까도 대부분의 시간은 걸었을 테니 이만한 길을 걷는 것은 순례자들에게는 아무 일도 아니다. 바다를 향하고 있는 순례자의 동상 아래서 멈춰서 사진을 찍는다. 이곳을 향하던 바로 우리의 모습이다. 멀리 피스테라의 파로(Faro : 등대)가 보인다.
드디어 마지막 표지석이 나타난다. 남은 거리 0.00km, 더 이상 걸을 곳이 없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한다. 33일간의 시간, 900km의 거리를 걸었다. 그토록 오고 싶었고 그렇게 걷고 싶었던 까미노데산티아고, 하나의 소망이 이뤄지는 순간이다. 지난 한 달 간의 걸음은 하루가 이토록 고되고 변화무쌍하다는 것을, 그 하루하루들이 모여 까미노가 완성되는 것임을 머리가 아닌 몸과 마음으로 깨닫게 했다. 무사히 도착했다는 것만으로도 더없이 감사한 일이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산티아고에서 멈추지 않고 여기까지 걸어오길 정말 잘했다. 이 명료한 끝맺음은 후회를 남기지 않는다. 피스테라의 등대에서 신발을 태우며 순례를 마무리하기도 한다는데, 비수기이기도 하고 다른 순례자들과 타이밍이 맞지 않는 건지 사람이 별로 없다. 먼발치서 우리에게 손을 흔드는 사람이 보인다. 다가가 보니 마지막 삼일 동안 까미노를 함께 한 체코아저씨다. 그는 미리 도착해서 기다렸다는 여자 친구와 등대에 와 있다. 수도자 같던 아저씨의 얼굴에는 이제 생기가 가득하다.
일몰의 시간이 다가온다. 아침까지 비를 뿌리던 하늘은 맑게 개여서 흰 구름만 피어오른다. 빠르게 움직이는 구름 사이로 태양이 바다 저편으로 사라져가는 모습을 바라본다. 까미노에 오기 전 유일하게 상상할 수 있었던 마지막 장면이다.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하루까와 케이를 뒤에 두고 바다를 마주 보며 자리를 잡는다. 캔맥주를 따서 한 모금을 마시고 이어폰을 낀다. 케이와 하루까의 말소리도, 파도소리도 아스라이 사라진 귓가에 이 순간 듣고 싶던 음악의 재생목록이 플레이되기 시작한다.
끝 없을 것 같았던 길이 끝난다. 원래 가던 길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까미노 위에 남은 것은 발자국뿐일까? 순례길을 무사히 걸어온 것처럼, 남은 여행길과 더 많이 남은 인생길도 그렇게 잘 걸어갈 수 있을까? 먼 길을 걸어온 나를, 이 걸음을 결정하고 마지막 등대에서 기다리던 내가 토닥인다. 커다란 안도감이 파도를 따라 밀려왔다가 약간의 허무함을 더해서 바다로 밀려간다.
옛 순례자들이 이곳을 세상의 끝이라 여긴 것은 더 이상 걸을 수 없는 바다를 마주했기 때문이다. 이미 지나온 남인도의 땅끝 깐야꾸마리, 세상의 끝이라 불리는 우수아이아에 이어 피스테라, 세 번째 “끝”에 닿았다. 이번 여행은 어쩌면 세상의 끝으로의 여행인지도 모르겠다. “끝”이 의미를 가지는 것은 그 마지막 한계에서 어떤 식으로든 매듭이 지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까미노라는 이름의 매듭을 짓는다. 해가 진다.


주위가 급격히 어두워진다. 서둘러 마을을 향해 걷다가 하루까의 제안으로 등대에 다녀가는 현지인의 차를 히치하이킹한다. 이젠 까미노도 끝났으니 기꺼이 승용차에 오른다. 흔쾌히 태워준 스페인 부부도 너무 고맙기만 하다. 차는 마법처럼 떠오르더니 금세 마을에 쿵하고 내려앉는다. 헬륨가스라도 실컷 먹은 듯, 마음이 그렇게 둥실 떠 있는 기분이다. 마을에 도착해서는 메르까도에서 맥주와 안주거리를 사서 하루까의 사립알베르게로 간다. 사람 좋아 보이는 헝가리인 주인아줌마에게 부탁해서 주방을 빌려 간단히 음식을 만들고 자리를 잡는다. 부드러운 산미구엘이 잘도 넘어간다. 밤이 깊어갈수록 까미노의 이야기들이 수북이 쌓인다.
10시면 문을 잠그는 일반적인 알베르게와는 달리, 피스테라에서는 공립알베르게도 늦게 들어가는 것을 허용한다. 오스피탈레로가 이미 대문의 비밀번호를 미리 알려주었다. 내일 버스정류장에서 하루까와 만나기로 약속을 하고 늦은 밤이 돼서야 알베르게로 돌아간다.
도미토리 안은 이미 잠든 순례자들의 숨소리로 가득하다. 달빛인지 가로등인지 모를 불빛이 잠자는 순례자들을 은은히 비추고 있다. 까미노에서의 마지막 밤이다. 조심스레 침대에 누워 가슴에 두 손을 얹는다. 특별했던 33일, 그날들을 걸어 여기까지 온 나에게 한 마디를 건넨다. “수고했어….”
이것으로 까미노의 모든 여정이 끝난다. 여기서 걸음을 멈춘다.

정리=강문규기자mkkang@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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