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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문인의 삶’ 60여년…한국언론사에 큰 발자취 남기다
방우영 조선일보 상임고문 별세
“재정적 독립해야 언론자유 지켜”
각계각층 인사 조문행렬 줄이어


“지난 55년은 신문과 함께 하루는 웃고 하루는 울던 시간들이었다.“

8일 타계한 방우영<사진> 조선일보 상임고문은 2008년 펴낸 회고록에서 자신의 신문인으로서의 삶을 이렇게 적었다. 88세를 일기로 타계한 방우영 상임고문은 60여 년간 조선일보에 재직하며 한국언론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발행부수 6만여 부의 조선일보를 한국 최대의 신문으로 성장시킨 성공신화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1928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난 고인은 일제강점기 조선일보를 인수해 사장을 지낸 계초 방응모 선생의 손자이자 방일영 전 회장의 동생이다.

서울의 경신고,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 상과를 나와 52년 조선일보 공무국 견습생으로 입사한 고인은 8년간 편집국 사회부·경제부에서 기자로 뛰기도 했다. 60년 방계회사인 아카데미극장 대표를 거쳐 62년 조선일보 상무로 복귀한 그는 6·25전쟁 당시 조부가 납북되고 사옥마저 불타버린 회사를 재건하는데 힘을 쏟았다. 직접 신문발송 차량을 몰고 극장과 약국을 돌며 광고영업을 뛴 일화는 유명하다.

1970년 사장직을 맡아 1993년 조카 방상훈 현 대표이사 사장에게 자리를 물려줄 때까지 23년간 그는 조선일보의 성장을 주도했다. ‘제호만 빼고 다 바꾼다’는 혁신의지로 조선일보와 지면을 개혁하고 ‘월간조선’, ‘월간 산’, ‘월간낚시’ ‘스포츠조선’ 등을 잇따라 창간하거나 인수하면서 사세를 넓혔다.

고인은 스스로를 ‘언론인’이 아니라 ‘신문인’으로 불렀다. 그의 신문 경영철학은 무엇보다 신문의 재정적 독립이었다. 그는 회고록 ‘나는 아침이 두려웠다’에서 “재정적 독립 없이는 언론의 자유를 지키기 어려웠고 정치권력과 싸우지 않고는 신문을 지켜낼 수 없었다”며 “재정의 독립과 권력과의 투쟁이라는 양면의 전선에서 하루는 웃고 하루는 우는 그런 시절을 살았다”고 돌아봤다. 이는 70년대 중반 유신정권의 동아일보 광고탄압 사태를 목격한 것이 큰 계기였다.

고인은 1975년 조선일보 기자 30여 명이 회사를 떠나야 했던 ‘3·6사태’에 대해선, “이 일은 여전히 내 마음의 멍에로 남아 있다”고 회고록에 썼다.

고인은 다섯 살 손위의 형과 돈독한 우애로도 유명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읜 내게 형님은 아버지와 같은 존재”라며 평생 그 앞에서 담배도 물지 않았다. 편집국장이 되고 싶었다는 그가 기자 생활을 일찍 접은 것도 형의 뜻에 따른 것이었다.

방우영 상임고문의 타계 소식이 전해지면서 각계각층 인사들의 조문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정대철 국민의당 고문은 “그의 큰 족적이 조선일보를 만드는데 큰 몫을 했다. 영원히 우리 후배들 마음속에 새겨져 있을 것”이라고 애도했다.

고인은 한국언론연구원 초대 이사장, 신문협회 부회장, 연세대 재단이사장, 한독협회 회장, 대한골프협회 회장, 고당조만식선생기념사업회 이사장 등을 지냈다. 국민훈장 모란장(70년)과 무궁화장(92년), 금관문화훈장(98), 독일 1등십자공로훈장(2001년) 등을 받았다. 유족으로 부인 이선영 여사와 아들 성훈(스포츠조선 대표이사 발행인 겸 조선일보 이사), 딸 혜성·윤미·혜신씨, 사위 서영배(태평양개발 회장)·정연욱씨(경남에너지 대표이사 부회장)등이 있다. 빈소는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에 차려졌다.

이윤미 기자/mee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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