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시계
실시간 뉴스
  • [프리즘] 당신, 너무 보수적이야
“인정하지 않겠지만, 당신 너무 보수적이야”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는 걸 간신히 참았다. 미처 생각 못한 일격이었다. “차라리 소리치고 대판 싸우는 사람들이 부러웠어” 이쯤되면 운신의 여지가 없는 거다. 살 맞대고 사는 사람이 한 울분의 토로다. “그래, 그렇다면 난 보수적이지” 칼로 물베기의 전장에서 매가리없이 항복했다. 업보를 치받고 들어오는 송곳 같은 지적이 얄밉기도 했지만, 이건 양심의 문제라서다.

반려자가 쓴 보수라는 단어엔 비겁함이 잔뜩 녹아 있었다. 약점 덮어두기ㆍ사과에 인색하기ㆍ두루뭉술 넘어가기ㆍ돌아서면 잊어버리기…. 정통 보수를 자부하며 교과서적인 삶을 영위하는 부류엔 미안한 말이지만, 일상용어로서 보수의 쓰임새는 이런 범주에 있다고 봐도 무리는 아니다. 한마디로 고집불통이란 얘기다.

4ㆍ13 총선에서 참패한 박근혜 대통령이 선거 닷새만인 어제 입을 열었다. 변화를 하겠다는 건지, 못하겠단 건지 애매한 메시지를 발신했다. ‘민의(民意) 수용’, ‘국회와 긴밀 협력’이라는 키워드가 나왔지만, 구체성이 없고 관념적이다. 레임덕(임기말 권력 누수현상)을 걱정해 떠밀리듯 짧게 한마디 한 걸 두고 여권내 비박(非朴)은 참패에 대한 사과가 없다며 불쾌해한다. 둘 다 보수적이긴매한가지다. 당분간 여권은 맷돌 손잡이가 빠진 처지에서 헤어나오기 어려울 듯하다.

기회의 상당 부분은 야권에 넘어온 듯하지만, 이건 표피적이다. 기업 입장에선 야권도 보수적이다. 변화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다. “선거 결과에 마음 졸이는 기업이 하나 둘이 아닙니다. 규제가 또 얼마나 세질지….”

만나는 기업인마다 정치지형이 여소야대(與小野大)가 된 걸 두고 근심섞인 표정을 짓는다. 성장 우선론의 선봉에서 낙수효과를 이끌어야 할 대기업이 그렇다면 이해하겠는데, 이슈ㆍ규제 측면에서 한참 비껴서 있는 기업인들도 야권 승리로 못살게 되는 거 아니냐고 지레짐작으로 울상이다. 거칠게 얘기하면 기업의 야권 기피증은 전염병 수준이다.

기업의 발목을 잡는 집단으로 이미지가 각인된 탓이다. 시대 흐름ㆍ정신이 분배 쪽으로 변화했어도 야권은 효율적인 국민 설득 수단을 개발하지 않고 실기(失期)해 끌려 다녔다. 이 죄를 누구한테 억울하다고 하소연하겠는가. 


경제민주화에 드라이브를 걸면서도 기업을 끌어안는 운영의 묘를 살려야 한다. ‘야권=기업의 적(敵)’이라는 인식이 깨지지 않으면 총선 승리의 유통기한은 향후 1년 8개월에 불과할 것이다. 2030세대 ‘앵그리 보터(성난 투표자)’의 도움으로 막판 뒤집기를 한 야권은 ‘분노는 움직인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뒷심 부족’의 특질을 가진 진보의 세월은 이를 알고서도 활용하지 못했다. 이 또한 보수적이다.

당장 기업인들은 내년 대선 결과를 점치고 있다. “이만큼 심판했으면 미안하니까 다음엔 새누리 찍을지도 모르죠” 보수와 진보, 여전히 심판의 칼 날 위에 서 있다.
 
hongi@heraldcorp.com
맞춤 정보
    당신을 위한 추천 정보
      많이 본 정보
      오늘의 인기정보
        이슈 & 토픽
          비즈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