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청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은 2014년 12월~2015 3월 시굴조사를 거쳐 지난해 3월부터 1년간 진행한 월성유적지(총면적 20만 7000㎡) 발굴 결과 왕궁의 중심부인 C지구에서 동서 51m, 남북 50.7m의 담장을 둘러친 일곽 안팎에 총 14기의 건물이 배치된 형태로 나타났다고 30일 밝혔다.
건물과 담장의 건축 시기는 인화문(도장무늬) 토기, 국화형 연화문 수막새 등 관련 유물이 다량으로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8세기 중반 이후로 추정된다.
일곽 건물지군의 성격은, 건물 유구들과 함께 확인되는 생활유물 중 흙으로 만든 ‘토제 벼루’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토제 벼루는 50점(편) 이상 출토되었는데 이는 월성 주변의 동궁과 월지, 분황사 등에서 출토된 양보다 월등히 많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일곽 건물지군에는 문서를 작성하는 중심 공간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초기에는 담장 안팎에 길이 36m(정면 16칸, 측면 2칸) 규모의 대형 건물 등 6동의 건물을 배치하였으나, 이후 내부 공간 확보를 위해 좌우 경계인 동,서쪽 담장을 허물고 건물 8동을 증축하면서 모두 14동의 건물을 갖추어 왕궁 내 시설을 완성해 나간 것으로 추정된다.
이 건물군지가 소속된 C지구 내에서는 ‘정도(井桃)’, ‘전인(典人)’, ‘본(本)’, ‘동궁(東宮)’ 등이 새겨진 기와와 토기가 출토됐다. ‘전인(典人)’은 궁궐 부속관청인 와기전(기와·그릇 생산 담당)에 소속된 실무자, ‘본(本)’은 신라 정치체제인 6부 중 하나인 ‘본피부’, ‘동궁’은 태자가 거처하는 궁궐을 뜻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C지구에 대한 탐색조사에서는 두 개의 통일신라 문화층과 5개의 신라 문화층이 남아 있음이 확인되었다. 현재까지 확보된 유물 분석자료에 의하면 월성은 주로 4세기에서 9세기까지 왕궁 또는 관련 시설이 들어섰으며, 신라 멸망 이후 근대 이전까지는 월성 내에 거의 사람이 거주하지 않은 것으로 보여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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