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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47일간의 세계여행] 90. 산티아고 길, 그 매력…
-까미노 데 산티아고 +19:비야르데마사리페에서 아스또르가까지 28.5km


[헤럴드경제=강인숙 여행칼럼니스트] 일출을 바라보며 알베르게 문을 나선다. 레온에서 사두었던 파스를 발목에 붙이고 그 위에 압박붕대를 매고 크록스를 신는다. 나름대로 중무장이지만 역시 발상태가 관건이다. 시작부터 뒤뚱거리는 내게 케이가 스틱을 두 개를 다 빌려준다. 나야 처음부터 그냥 걸었지만 항상 스틱을 잡고 걷던 케이인데 스틱을 안 쓰는 것은 불편할 것을 알면서도 거절하지도 못한다. 미안함보다 또다시 아플 것에 대한 두려움이 더 크다. 오늘 목적지가 아스또르가(Astorga)라는 제법 큰 도시가 목적지이니 아무래도거기서 스틱을 하나 사야 할 것 같다. 어떻게든 버텨 보려고 했는데 사람의 일이란 마음대로 되지는 않는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진작에 스틱을 들고 까미노에 들어설 것을 그랬다.



지긋지긋한 메세타의 평원은 계속 이어진다.말로만 듣던 메세타는 백문이불여일견이라는 말을 실감하게 한다. 이 평원 위의 끝없는 밀밭에서 나오는 밀이라면, 어떤 일이 생겨도 스페인 사람들이 굶지는 않을 것이다. 메세타에 들어온 이래, 해발고도 800~900m 사이 고위평탄면을 며칠째 이동 중이다.

연일 이 지역을 걷는 것이 지루한 것은 나뿐만이 아닌 듯, 지나가는 순례자들이 던져 놓은 돌이 커다란 돌무더기 십자가가 되어간다. 자갈을 모아 만든 화살표는 점점 비대(?)해질 것이다. 순례자들이 염원을 담아 만들어 놓은 화살표의 끝이 가리키는 곳을 바로 산티아고다. 그곳에 도착하기 위해 이 많은 날들을 걷고 있는 것이다.



케이는 스틱을 나에게 다 빌려 주고도 걸음에 완전히 적응이 되었다며 속도를 낸다. 오후에 아스또르가의 시립알베르게에서 걸음을 멈추기로 약속하고 앞서 걷는다. 어제 갈림길에서 헤어진 일본인 하루까도 만만찮게 속도가 느렸다며, 혹시 오늘 내가 하루까를 만날 지도 모르겠다고 농담을 던지고는 금세 지평선 너머로 사라진다. 여전히 발이 아파서 걸음이 느린 나도 천천히 그의 그림자가 사라진 방향으로 걷는다.



크록스를 신고 한참 걸으니 발뒤꿈치가 이상하게 아파온다. 벤치를 찾아 붕대를 다시 감고 운동화로 갈아 신고 물 조금 마시고 하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나가 있다. 발가락보다 발목이 더 아프긴 하지만 걷는 것을 포기할 만큼은 아니다. 아프면 아픈 만큼 속도를 낮추면 된다. 여기서 왜 이러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게 아니라, 이곳을 걷는 것이 오늘의 할 일이기에 본분을 다하려고 열심히 걷게 된다. 맑고 건조한 하늘과 막 파릇파릇해지는 들판의 봄내음이 걸음을 반긴다.



한국을 출발해서 인도와 남미를 거치는 70여일의 여행을 거쳐 까미노에 서게 되었을 때에는, 이 길에서 무엇을 만나게 될지 알 수 없었다. 인도에서 만난 다양한 사람의 스펙트럼과 남미에서 마주한 대자연의 파노라마 못지않게, 까미노에서 만나는 것은 다양한 “내 모습”이다. 이미 나일 거라고 생각하던 “나”와 다른, 수많은 내가 길모퉁이를 돌 때마다 툭툭 튀어나온다.

제법 편하게 걷다가 만난 마을은 오스피탈데오르비고(Hospital de Orbigo)다. 멀리 용도를 알 수 없는 둥근 탑이 보인다. 흡사 라푼젤의 성을 연상하게 하는 특이한 건물이다. 들판에는 말들이 뛰어놀고 있다.



고삐 풀린 망아지라는 말처럼 마음대로 돌아다니는 말을 가까이 보는 것은 몇 번 안 되는 경험이라 반갑기도 하다. 사람이 많지 않은 마을을 지나다 보면 거기 있는 동물들에게 말을 걸고 있을 때도 있다. 오늘을 말에게 말을 걸어본다. “부럽다, 너희들!”

잘 정돈되어 있는 스페인의 북부 시골의 삼월 하순은 이제 봄이 완연하다. 날씨가 좋으니 밖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이제부터는 마을에서 사람을 만날 수 있으려나 기대가 된다. 오르비고 강을 가로지르는 오르비고 다리(Puente de Orbigo)는 스페인에서 가장 길고 오래된 중세 다리이기도 하고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에도 영향을 주기도 했다고 한다. 유서 깊은 긴 다리 위를 사람도 건너고 자전거도 지나간다.



지금 봐서는 그다지 수량이 풍부하지 않은 강이지만 로마시대에 만들어졌다는 오르비고 다리는 겉으로만 봐도 견고하다. 중세에 기사들이 몰려와 결투를 하던 다리라는 말이 실감 난다. 그러나 돌로 쌓은 바닥이 울퉁불퉁해서 아픈 발로 걷기에는 난감하다. 앞에서 걷는 아주머니나 앞질러 가는 자전거가 가운데의 넓적한 돌만 밟고 가는 걸 보고서야 나도 길 가운데 편평한 돌만 밟는다. ​

마을을 빠져나가는 길목에서 이정표를 못 보고 지나치게 된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이곳에서 직진하는 길은 도로를 따라 가는 길이고 우회전해서 가는 길은 마을을 둘러 가는 길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먼저 가는 두 명의 순례자들이 직진하길래 먼발치에서 보이는 그들의 뒷모습을 따라 걸었다. 운동화에 갇힌 발이 부어올라서 신발을 한 번 더 크록스로 갈아 신고 벤치에서 쉰다.



총체적 난국인 두 다리를 끌고 걷느라 시간이 지날수록 풍경을 즐길 여유가 사라진다. 설상가상으로 풍경도 황랼해진다. 게다가 도로를 따라 걷다 보니 자동차들만 휙휙 지나가고 다리는 점점 더 무거워진다. 교차로의 버스 정류장에서 붕대를 다시 감는다. 자꾸 신발을 갈아 신다 보니 자주 멈추게 되고 쉬다 보면 시간은 점점 늦어진다. 멍하니 지나가는 차들을 보며 앉았다가 반대편 버스 정류장에 앉아있는 사람과 눈이 마주친다. 눈앞에 보이는 그녀도 순례자다.

자세히 보니 그 순례자는 어제 아쉽게 헤어진 하루까가 아닌가? 그녀도 나를 알아보고는 손을 흔들며 길을 건너온다. 먼저 출발하면서 농담으로 던진 케이의 예언이 적중했다. 기다리던 사람을 만나 것처럼 반갑다. 나도 천천히 걷지만 하루까도 참 느린 걸음이다.

하루까는 아침에 출발해서 30분쯤 잘 걷다가 핸드폰을 알베르게에 두고 온 게 생각나서 되돌아 갔다 와서 늦어졌다고 한다. 자동차 도로를 끼고 걷는 길이라 별로 마음에 안 들었는데 아무튼 이 귀여운 아가씨랑 다시 만나니 지루하지 않아 좋다.

재잘재잘 쉬지 않고 이야기하는 하루까와 함께 걸으니 시간도 잘 간다. 하루까가 어제 묵은 알베르게에서 독일 순례자가 저녁식사를 요리해 줬다고 한다. 그녀는 그 독일 남자가 고마워서 오늘 저녁을 그에게 만들어 주고 싶었다고 한다. 그 독일 남자가 아스또르가(Astorga)간다고 해서 그녀도 그곳으로 가는 것이다. 대략 30km의 거리라서 아직 걷기에 적응되지 않은 하루까에게는 힘이 들 텐데 아직 그녀는 그것도 모르는 눈치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며 한 시간쯤 걷다가 우리는 길을 건너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아까 둘이 만났을 때 건넜어야 할 길이었는데 뒤늦게 건너려니 어쩔 수 없이 풀숲으로 내려와서 대로를 무단 횡단해야만 한다. 도로를 끼고 걷는 일은 진짜 별로다. 서로 만나지 못했으면 둘 다 엄청나게 지루했을 것이라며 길을 건넌다. 건나고 나니 아스트로가까지 6km라는 표지판이 보인다. 이제는 그것이 이곳을 지나는 자동차를 위한 표시임을 감안하게 된다. 걸어서 둘러가는 까미노는 좀 더 먼 길일 것이다.

애당초 이 길로 오는 것이 아니었다. 하루까를 만나기 전, 오르비고 마을에서 우회전해서 자동차 도로가 아닌 마을로 가는 까미노를 걸었어야 했다. 둘 다 도로까지 나와버려서 어쩔 수 없이 버스정류장에서 만나게 된 나와 하루까는 그 바보짓의 여파로 계속 헤매는 중이다. 길을 건너오긴 했는데 먼저 가던 하루까가 돌아서서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이 길이 맞는지 둘 다 확신이 서지 않는 것이다. 지나가는 차를 한 대 세워 길을 묻는다. 누가 차를 세울까 싶었는데, 다행히도 순례자의 손짓에 차를 세워 까미노 방향을 알려 주고는 다시 차에 오르는 친절한 운전자를 만난다. 듣고 보니 원래 걷던 방향이 맞다. 드디어 까미노 표식도 보인다. 표지니 보여야 안심이다. 우여곡절 끝에 제대로 된 까미노에 들어선다.



해발 905m에 위치한 산토 토리비오 십자가(Cruceiro de Santo Toribio)에 도착한다. 오늘의 목적지인 아스또르가가 내려다보이는 이곳에서 한숨을 돌린다. 나는 발이 아파서 늦게 걷고 있고 하루까는 처음이라서인지 빨리 걷지를 못하니 속도가 맞다. 땀을 식히는 동안 하루까는 분주하다. 핸드폰을 꺼내서 나와 셀카를 찍자고 하고 내 사진도 마구 찍는다. 포르투갈 교환학생 중에 우연히 알게 된 까미노를 걸으려고 일부러 수업도 빠지고 왔다며 또다시 수다를 시작한다. 함께 있으면 잠시의 침묵도 필요 없는 귀여운 아가씨다.



여기서부터는 내리막길이라 그나마 수월할 것 같다. 케이는 이미 도착했을 시각이지만 적어도 한 시간 반은 더 걸어야 할 것이다. 옆에서 걷는 하루까는 다시는 30km 이상은 걷지 않겠다고 계속 구시렁댄다. 당연히 그럴 줄 알았지만, 겨우 까미노 이틀째인 그녀의 걸음으로는 견디기 쉽지 않은 거리다. 아스트로가에 진입할 즈음에는 오히려 내가 속도를 내고 하루까는 처진다. 케이가 주고 간 스틱이 진가를 발휘한다.

케이와 만나기로 한 곳은 산타마리아 수도원 자리에 있는 시립알베르게다. 늘 그렇지만 다 왔나 싶어 마음이 풀어질 때 목적지를 찾는 일은 더 힘들다. 심리적으로 도착한 길을 걷는 다리가 더 아프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돌아보아도 하루까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까미노 이정표는 아스트로가의 언덕 위로 순례자를 인도한다. 거의 다 온 것 같은데 언덕을 오르자니 몸도 마음도 지쳐간다.



마지막 안간힘을 다해 언덕에 올라 순례자 동상을 보면서 지나쳐 정처 없이 광장까지 갔다가 길을 잃는다. 거의 다 왔는데 알베르게가 보이지 않는다. 다행히 메르까도에 다녀오는 다른 순례자를 만나게 되어 길을 돌아온다. 지칠 대로 지쳐있는 초면의 나를 다독여주는 그가 고맙지만 제대로 인사할 기운도 없다. 되돌아오는 길에서 간발의 차이로 광장에 나와 나를 기다리던 케이도 만난다. 두 시간이나 일찍 도착해 알레르게에서 낮잠을 자다 늦게 나왔다는 케이의 부스스한 얼굴도 고맙다. 잊고 있었지만, 기다려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피로회복제가 되어준다.

알베르게에 들어가 재빠르게 짐을 풀고 샤워를 마치고 나서야 비로소 도착한 하루까가 도미토리 바닥에 주저앉는다. 겨우 까미노 둘째 날인 그녀에게 오늘은 얼마나 길었을까? 방글방글 웃는 얼굴이지만 얼굴은 지친 기색이 역력하다.

그나마 오늘 걷기 수월했던 것은 케이가 아침에 빌려준 스틱 때문이었다. 케이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다. 아스또르가는 제법 큰 마을이어서 등산용품 매장에 들러 스틱을 산다. 



언덕 위에서 내려다보이는 어둑해지는 아스또르가의 풍경을 바라보면서 하루까, 케이와 맥주를 마신다. 동양인이 많지 않은 길에서 우연히 두 번이니 마주치게 된 하루까에게는 케이와 내가 큰 위안이 되는 것 같다. 닮은 사람에게서 친근감을 느끼기도 한다더니, 서양인이 많은 이곳에서 만난 동양인이라 그런지 다른 국적의 순례자들보다 왠지 더 정이 간다. 거기에 오늘의 예기치 않은 재회와 하루까의 스스럼없는 성격이 더해져 시너지 효과를 일으킨 것도 사실이다.

저녁식사는 방을 함께 쓰는 바스크 지방 출신의 스페인 남자들이 만들어 주겠다고 한다. 바스크는 스페인과 언어도 문화도 다르다면서 열변을 토하는 그는 말할 필요 없이 바스크 분리독립 지지자다. 저녁 메뉴는 스페인식 볶음밥 빠예야(Paella)와 홍합탕이다. 맥주, 와인, 치즈까지 더한 식사는 더없이 맛있고 유쾌하다. 



발목이 아파 트레킹화와 크록스를 세 번씩이나 바꿔 신고 걸었다. 발가락은 나아가지만, 물집 때문에 걸음걸이가 이상했던 탓인지 발목이 붓고 있다. 레온에서 산 붙이는 파스는 얼마나 센 건지, 그걸 떼고 샤워할 때면 피부가 덴 것 같이 아프다. 산티아고 길을 걸으면 걷기의 달인이 될 줄 알았는데 이렇게 아프다는 말을 입에 달고 걸을 줄이야….

그럼에도 산티아고 길에는 묘한 매력이 깃들어 있다. 이 길에 한 번 발을 들여놓은 사람은 어떻게든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를 향해 가게 되는 것이다. 때로는 아프거나 힘들거나 지루하다는 이유로 버스나 히치하이킹을 선택하더라도, 아예 며칠을 쉬어가는 한이 있더라도 순례자의 발걸음은 결국 산티아고를 향한다. 힘들면 길을 이탈해서 다른 여행을 해도 될 텐데, 그런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절뚝이며 걷는 나 역시 그런 매력을 알게 되었다. 인생이 힘들다고 어디로 숨을 수 없는 것처럼 까미노에 온 이상 걸어야 한다. 태어났으니 살아가는 것처럼, 까미노에 들어섰으니 걷는 것은 이유가 필요 없는 숙명이기 때문이다.

정리=강문규기자mkkang@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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