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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47일간의 세계여행] 82. ‘45km’ 자랑스러운 두 다리…낙오자는 버스를 타고
-까미노 데 산티아고 +11:에스피노사 델 까미노에서 부르고스까지 45km


[헤럴드경제=강인숙 여행칼럼니스트] 일찍 눈이 떠진다. 맑은 아침 공기가 저절로 몸을 움직이게 한다. 어제 푹잤기 때문인지 기분이 너무나 좋다. 해가 떠오르는 것을 바라보는 것도 다른 날보다 더욱 상쾌한 아침이다.

가게가 없는 마을이라 아침을 준비하지 못해서 어제 갔던 알베르게 옆의 바에서 데사유노를 먹는다. 로렌조는 과일 몇 개를 사서 먼저 출발한다. “부엔 까미노!” 서로에게 인사를 전한다. 아침을 먹은 후 우리도 까미노의 표식을 따라 걷기 시작한다. 케이도 로렌조도 다들 가벼운 발걸음일 것이다. 3.6km 정도 떨어진 다음 마을까지는 기분 좋은 발걸음으로 케이와 함께 걷는다.

이 마을 비야프랑카(Villafranca Montes de Oca)부터 그 다음 마을인 산 후안 데 오르테가(San Juan de Ortega)까지는 12km의 산길이다. 해발 900m인 현재 시점에서 1200m의 봉우리를 향해 오른다. 말 그대로 커다란 산, 이곳 지명으로 오까 산(Montes de Oca)을 넘어야 한다.

화창한 날씨에 파란 하늘, 그리고 숲길이 풍경을 바꾸며 계속된다. 숲길에 들어서고 처음부터 발걸음이 앞서던 케이의 모습도 어느 샌가 멀어진다. 풍경이라는 것이 보는 사람의 주관과도 관련이 있어서 그날의 컨디션에 따라 더 좋거나 나쁠 수 있다면, 지금 걷는 길은 원래 좋지만 더욱 상쾌하게 느껴진다.

​어제 처음 걸어본 30km의 거리도 걸을 만 했다. 가다 힘들면 멈춰도 되겠지만 오늘 아마도 45km를 걷게 될 것이다. 평소에 걸어본 적이 없는 걷기 초보인 나는 그 거리가 어느 정도인지 잘 모른다. 어제보다 서너 시간을 더 걸어야 한다는 것은 까미노 열흘의 경험으로 알고 있을 뿐이다. 솔직히 말하면 도전이다. 시도해보는 것이다. 


어떤 풍경이 펼쳐질 것인가는 걸어봐야 안다. 그날의 날씨에도 많이 좌우된다. 오늘 들어온 풍경은 고즈넉한 숲길이다. 발 빠른 케이가 사라져 버린 내 눈 앞에 펼쳐진 길들은 고요하기만 하다.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의 고요함은 때때로 공포가 되기도 한다. 중세에는 어두운 숲 속의 도적떼와 산짐승 때문에 순례자들이 두려워하는 길이었다는 것이 이해가 되는 숲길이다. 그러나 지금의 까미노는 평화롭기만 하다. 고즈넉하지만 길을 잃지 않고 안전하게 걸을 수 있어서 좋다.

혼자 걷고 있다고 생각한 것은 오산이었다. 쉬고 있는 서너 명의 순례자들을 만나 “부엔 까미노” 인사를 나누고 지나간다. 경사가 급하지 않은 산이라 산에 오른다는 생각도 없이 걷다가 전망대에서 쉬게 된다. 일찌감치 떠났던 로렌조가 저편에 자리를 잡고 온몸을 대자연에 맡긴 듯한 포즈로 눈을 감고 명상을 하고 있다. 여기서 잠시 쉬고는 방해될까 봐 그냥 지나치려는데 인기척에 눈을 뜬 로렌조가 두 손을 흔든다.


수많은 풍경 속에서 나의 카메라로 들어온 것은 지극히 자의적인 풍경이다. 항상 나를 설레게 하는 “길”과 “하늘”을 이렇게 마음껏 걷고 보고 사진에 담을 수 있어서 좋다. 기념비 같은 게 보인다. 배낭을 내려놓고 쉬고만 싶어서 발걸음을 재촉한다. 이국의 순례자에게는 그저 아픈 다리를 쉴 수 있는 휴게소 역할이지만 이것은 스페인의 가슴 아픈 현대사의 비극인 스페인 내전 기념비다.

막연히 세상의 “길”에 대한 환상이 있었다. 사람들의 발자국으로 이어진 길을 가다 보면 그 끝에서 무언가를 발견하리라는 믿음 같은 게 있었다. 그래서 여행을 좋아한다. 여행이란 그 길 위에서의 여정, 혹은 길 끝에 다다르기까지의 과정이고 목적지에서 발견하는 예기치 못한 즐거움이다. 그냥 걷기도 힘든 길을 카메라를 매고 걷는 것은 길에 대한 이런 로망 때문이다.


중세의 순례자들은 종교적인 신심을 증명하기 위해, 죄를 면죄받기 위해 걸었다고 하지만 지금 걷는 사람들에게선 그런 느낌은 없다. 현대에 있어서 순례란 육체를 움직여 영혼을 비워내는 것이 아닐까? 한 발짝 전진해 갈 때마다 온몸이 근육의 움직임을 느끼는 것이 살아있다는 생동감을 그대로 전한다. 그렇게 모인 발자국들이 발밑을 보게 하고 나무를, 태양을, 시시각각 바뀌는 풍경을 보게 한다. 그렇게 걸음에 나를 맡기며 생각한다. 지금 걷고 있는 나, 이런저런 생각으로 가득한 나, 그런 내 모습을 바라보는 또 다른 나는 모두 나일까?

걷기는 사람의 마음을 단순하게 한다. 외양은 날이 다르게 가난한 순례자의 모습을 갖춰가고 있어도 마음은 점점 충만해진다. 아니모(Animo) 라고 쓰인 노란 화살표가 반갑다. 힘내라는 말이다. 누군가의 낙서가 걷는 사람들에겐 격려가 된다. 세 시간쯤 혼자만의 걸음을 즐기며 걷는다. 


앞서간 케이는 어디쯤에 가 있을까 싶은데 다음 마을에 도착하니 케이가 기다리며 쉬고 있다. 케이도 충만한 길이었을 것이다. 각자의 걸음대로 걷다가 이렇게 만나 함께 걷는 것도 참 좋다.

오늘은 갈 길이 멀어서 들르는 마을도 많다. 해가 머리 위로 떠오르고 있으니 점심 때가 되었다. 아헤스(Ages) 마을의 바는 너무나 깔끔하고 아기자기하게 예쁘다. 바나나 한 개와 귤 하나, 네스티 한 잔을 골라서 계산한 후 점심으로 먹는다. 오늘은 식사도 완전히 순례자 포스다. 위가 가벼워야 더 잘 걸을 수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점심은 되도록 간단히 해결하려고 한다.


걷는 게 일상이니 길가의 벤치가 눈에 쏙 들어온다. 바라보면서 지나가도 쉬었다가는 느낌이 든다. 아스팔트를 통해 다음 마을로 간다. 20km쯤 걸은 지점, 이제 다리가 아프기 시작한다. 오늘 부르고스까지 45km를 걷게 된다면 이제 반도 오지 않은 거리, 아직은 걸을 만하다.

양떼가 까미노 표지석 옆에서 무심히 풀을 뜯는다. 이제껏 마을에서 사람을 만나기가 힘들었는데 날씨가 따뜻해져서인지 이 마을에서는 햇볕을 쪼이고 있는 노인들 몇 명을 만날 수 있다. 


마을을 지나 까미노가 안내하는 방향으로 오르는데, 길이라고도 할 수 없는 돌길이 펼쳐진다. 나의 빈약한 트레킹화가 감당하기엔 너무나 거친 길이지만, 다른 방법이 없으니 어쩌랴, 감당할 밖에…. 아무도 걷지 않을 것 같은 이 길에서 우연히 한국인 여자분 한분을 만나게 되었다. 까미노 표시를 따라 광활한 돌밭을 지난다. 가려고 의도하기만 한다면 길은 어디에도 있다.

드디어 거대한 십자가가 있는 언덕에 오른다. 이 거대한 십자가를 넘어서면 부르고스라는 대도시가 멀리 보인다.

오르는 길이나 마찬가지로 황량한 길을 통해 내려간다. 지평선 끝에 보이는 가물가물한 곳으로 가야 한다. 까마득한 길, 들판을 가로질러 걷고 또 걸어 대도시 부르고스의 위성도시로 들어간다. 위성도 시답게 주택단지들이 모여 있는 도시를 지나쳐 부르고스를 향해 간다.


대도시를 걸어서 들어가는 것은 쉬운 일이 결코 아니다. 도시 초입의 공장단지와 자동차와 화물트럭 씽씽거리는 대로를 끼고 걸어야 한다. 걷기 쉬운 보도블럭이 깔린 길이 계속되어도, 횡단보도를 지나 길을 건너 이어지는 도시의 소음과 매연 앞에서 질색을 하게 된다. 숨이 턱턱 막히는 도시의 지루한 길을 걷는 게 바로 고행이었다. 참을 인(忍)자를 수십 번 새기고 걸어간다. 몇 시간 전까지의 아름다운 명상들, 상쾌한 기운들이 휘발되고 온종일 걸은 두 발은 땅위에 붙어버릴 것만 같다.


드디어 부르고스 입성! 이제 다 왔다고 생각하면서 힘을 낸다. 대도시의 일상이 저무는 시각이라 세련된 복장의 도시인들이 돌아다니는 거리를 피로에 지친 순례자 두 명이 걷는다. 대도시라 까미노 안내표지는 너무나 자상하다. 화살표를 따라 이리 가면 저쪽으로, 저리 가면 또 다른 쪽으로 순례자를 유도한다. 까미노 표지가 순례자들을 위해 부르고스의 명소들을 다 안내해주는 것을 모르고 피곤에 쩔은 얼굴로 부르고스의 거리를 헤맨다.

시립알베르게를 찾아 걷는 마지막 삼, 사십 분 동안은 다리가 걷는 것이 아니라 정신력이 몸을 이동시킨다. 도저히 못 걸을 것 같은데 발을 떼고 있는 스스로가 신기할 지경이다.

알베르게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여섯 시, 아침 여덟 시경에 출발했으니 거의 10시간을 길 위에 있었던 것이다. 알베르게에 도착해서 겨우겨우 침대에 짐을 풀고 있는데 아는 얼굴들이 인사를 한다. 아침에 먼저 떠났다가 산에서 명상 중이던 로렌조는 중간에 버스를 타고 왔다며 겸연쩍게 쳐다본다. 며칠 전 헤어진 랄스와 진도 버스를 타고 오늘 부르고스에 왔다고 어색하게 인사를 한다. 대도시에 걸어오는 것이 힘드니까 그런 방법을 쓴 사람들이 많은 것이다.

순례길, 걷기로 작정한 길이라 그런 편법을 생각해보지 않아서 편히 부르고스에 온 그들이 부럽지는 않다. 다만 영적인 체험을 추구한다는 로렌조가 걸음을 멈추지 않고 버스를 탄 것은 실망스럽긴 하다. 나름의 변명이 있을 것이지만 나와는 상관도 없는 일이긴 하다. 까미노에선 각자의 길을 걸을 뿐이니까.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나니 정신이 든다. 어둠이 한참 내려앉은 거리에 나가 알베르게에서 멀지 않은 레스토랑에 얼른 들어간다. 순례자 메뉴를 파는 곳이어서 들어가긴 했는데 너무 크고 깨끗한 곳이라 괜히 주눅이 든다. 걱정과는 달리 시골마을의 메뉴 델 페리그리노 가격과 같은 10유로를 내고 만찬을 즐긴다. 멋진 식당에서 좋은 와인에 샐러드, 파스타, 스테이크에, 후식으로 아이스크림까지 하나도 남김없이 먹는다. 파노라마 같았던 하루를 이야기하는 케이의 눈빛이 반짝인다.

알베르게에 돌아가니 아까 십자가 언덕 오르기 전에 만난 한국 여자분도 늦게 도착을 했다고 하고, 눈 내린 피레네 산맥부터 까미노를 걸어서 어제 이곳에 도착해서 하루를 쉬었다는 한국인 ‘주’라는 사람도 만나게 된다. 대도시라 시립 알베르게도 크고 쾌적해서 아는 얼굴들도 많다. 아침에 떠나온 에스피노자 델 까미노 풍경이 눈에 선하지만 이제 그곳은 이 걸음에서 멀어져간다.

오늘 나는 인생 최고의 거리를 걸었다. 10시간을 길 위에서 수고한 내 발에는 커다란 물집이 훈장으로 남았다. 그야말로 발이 부르트도록 걸었다. 일생의 하루쯤 45km를 걸었다고 해서, 발이 좀 부르텄다고 해서 크게 바뀔 일은 없지만, 오늘 같은 날은 꼭 일기를 써야 할 것만 같다.

정리=강문규기자mkkang@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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