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시계
실시간 뉴스
  • [147일간의 세계여행] 77. 생기 넘친 산티아고 여정…‘발아픔·배고픔’은 아직도…
-까미노 데 산티아고 +6:로스 아르코스에서 비아나까지 18.5km


[헤럴드경제=강인숙 여행칼럼니스트] 이렇게 화창한 날은 까미노 들어와서 처음이다. 알베르게 주인과 그녀의 고양이의 배웅까지 받으며 기분 좋은 발걸음을 내딛는다. 그야말로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빛깔이 곱기도 하다. 파란 하늘과 스페인 경치가 잘 어울린다. 지난 며칠간 눈이 내리고 길이 젖고 바람이 불거나 비가 오고 무지개까지 뜨더니 드디어 봄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온다. “환희의 송가”가 머릿속에 울려 퍼진다. 



등 뒤에서 빛나는 태양은 그림자를 선물한다. 까미노에서는 언제나 동쪽에서 서쪽으로 이동하기 때문에 해는 등 뒤를 비추다가 한낮엔 왼쪽 얼굴에 쏟아지고 해가 질 무렵 정면으로 사라진다. 청명한 날씨 덕분에 선명한 내 그림자를 오랜만에 만난다.



하루에 20km씩 걷는 걸음은 이미 익숙해졌다. 발이 편한 것은 아니지만 거뜬히 걷고 있는 중이다. 오로지 내 몸만을 움직여서 지난 5일간 이미 100km 이상의 거리를 걸었다. 닷새를 걸었지만 길을 예상하지는 말아야 하는 것도 안다. 세상의 모든 길이 아마 까미노에 있을 것이다.

​​눈과 함께 까미노를 시작해서인지 다른 무엇보다 스페인의 ‘봄’이 반갑다. 그동안 걸어오면서 메마른 나무들이 항상 쓸쓸해 보였다. 



파란 새싹이 움트고 나무에 꽃봉오리들이 피어나는 생동감 넘치는 풍경에 마음이 설렌다. 봄이 오는 풍경이 이토록 사랑스러운 것이라는 걸, 한국에서 그리 오래 살고도 여기 스페인 땅에 와서 깨우친다. 사실 그건 한국과 스페인의 문제가 아니라 하루를 사는 방식의 차이다. 탁 트인 풍경 속에서 걸어가는 일이 하루의 일과인 지금, 나무가 꽃을 피워내는 모습이 그대로 관심사가 될 수밖에 없다. 단순한 하루에 감탄할 게 많다는 게 또 다른 감탄을 불러일으킨다.



두 시간쯤 걸어 산솔(Sansol)이라는 마을에 도착해서 바(Bar)에 들어간다. 바는 잠시라도 배낭을 내려놓고 다리를 쉬며 요기도 하고 화장실도 들르는 일석사조쯤 되는 역할을 한다.

또레스델리오(Torres del Rio)라는 팔각형 모양의 특이한 성당도 지나간다. 12세기에 지어진 성당이고 이슬람의 영향을 받아 팔각형 모양이다. 카톨릭에 이슬람 문화를 얹은 듯한 스페인 건축물이 가지는 독특한 향취가 느껴진다. 



사진을 찍을 때 문득, 저 파란 하늘에 전깃줄이 없었으면 얼마나 더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경우가 있다. 전깃줄이 아니라면 파란 하늘이 더 돋보였을까? 긴 여행을 하면서도 가끔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기적인 생각이다. 잠시 보고 지나치는 풍경의 아름다움을 방해한다고 해서, 전기가 이 마을에 가져다주는 편리함을 비웃을 자격이 내게는 없는 것이다. 전깃줄은 도저히 뺄 수 없는 21세기 지구촌 풍경 중 하나라는 걸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오지가 아니고는, 세계 어디에 가도 전깃줄이 하늘을 가로지르고 있는 게 현실이니 말이다.



오늘은 이제껏 만난 길 중에서 가히 비단길이라 말 할 수 있는 아스팔트 위를 걷기도 한다. 아주 가끔 다니는 자동차를 피해야 하긴 해도 발바닥은 편안한 길이다. 오후가 되자 해는 남쪽으로 기울어서 나무 그림자는 오른쪽으로 가지런히 넘어간다.

화창하고 길도 평탄한데다 신발도 보송보송해서 오늘은 어렵지 않게 걷는다. 반짝이는 봄 햇살을 맞으며 걸으니 기분도 덩달아 좋아진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해도 케이와는 발걸음이 맞는 날이다. 케이와 나는 6일차라 적응이 조금 되고 있는 상태이고 걸은 지 3일밖에 되지 않은 진은 발이 많이 아플 시기다. 진은 뒤로 처져 있다. 까미노 위에선 걸음도 아픔도 자신의 몫이기에 자신이 감내할 뿐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



여행이란 결국 길 위를 떠도는 것이다. 가보지 못한 수많은 길에 대한 로망이 여행으로의 의지를 더욱 부추긴 것은 아닐까? 한국에서 인도로, 인도에서 스페인으로, 스페인에서 페루로, 브라질에서 다시 스페인으로 그 먼 거리를 대륙 사이로 이동할 때는 각각 비행기로 열 몇 시간이면 충분했다. 지난 두 달간 움직인 거리를 환산하면 어마어마할 것이다. 그럼에도 하루에 20km도 채 못 걷는 오늘이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 이동이 온전한 내 동력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고 그것을 스스로가 원했기 때문이다. 이미 걷기의 즐거움을 알고 왔거나 준비를 철저히 하고 이곳에 온 다른 어떤 사람도 지금은 부럽지 않다. 



이차선 도로를 따라 걷는 코스도 있어 당황스럽지만 차는 몇 대 없다. 이런 길을 비단 길이라며 좋아한 게 후회막급이다. 순례자들의 발길이 다져놓은 오솔길이 훨씬 낫다. 발바닥이 불편해도 시야와 마음이 편안한 길이 좋다.

아스팔트가 끝나는 길에서 아침에 먼저 출발한 이안 할아버지를 만난다. 이번이 네 번째 까미노라는 역대급 전설의 주인공인 66세 이안 할아버지의 배낭은 너무도 작다. 가리비 껍데기를 단 작은 배낭과 지팡이 하나를 들고 유유자적 신선의 걸음으로 걷는 분이다. 네 번째 이 길을 걷는다 해도, 신선의 걸음이어도, 다리가 평온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연륜의 깊이만큼 노하우가 있겠지만 순례자로 까미노를 걷는 한 평등한 고통이 수반되는 것은 확실하다. 까미노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서로를 존중하는 가장 큰 이유는 서로가 동병상련의 처지임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



드디어 비아나(Viana)가 보인다. 멀리 성당의 첨탑이 보이는 곳으로 가야 한다. 비교적 큰 마을이라 외곽에는 연립주택단지도 보인다. 네모난 창문이 달린 똑같은 연립주택보다 아까 또레스델리오를 지나며 봤던 팔각형 성당이 더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공통의 시각일 텐데, 사람의 공간은 효율성만을 추구해서 그런 건지 현대로 올수록 사각형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게 안타깝다. 규모가 커지고 집단화되고 현대화된 풍경에는 감각이 반응하지 않는다.

일주일 다 되어가는 순례길 위에서의 일상은 단순해져만 간다. 자연을 벗 삼아 걸으며 나를 뒤돌아보고 싶었는데 단순한 일상에서 발 아프고 배고픈 것에만 익숙해지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오늘 비아냐의 알베르게는 특이하다. 무니시팔 알베르게(Municipal albergue)라고 부르는 시립알베르게를 찾아들어왔는데 오스피탈레로 가 없다. 없는 게 아니라 근처의 경찰관이 오스피탈레로를 겸임한다. 아직 문이 열리는 시간이 아니라서 근처 바(Bar)에 배낭을 내려놓고 커피를 마시며 기다린다. 이젠 다리가 아픈 시간, 커피를 마시고 일어나는 것도 힘들다. 제복을 입은 오스피탈레로는 크레덴시알에 도장을 찍어주고 알베르게 요금을 받고 문을 열어주고는 다시 업무로 돌아간다. 순례자는 한국인 세 명과 영국인 이안, 미국인 헤더, 독일인 랄스 그리고 오후부터 내내 침대에 누워있는 캐나다인 이렇게 소박하게 일곱 명이다.

54명을 수용할 수 있는 곳인데 달랑 일곱 명이 머물게 되니 비수기엔 이런 식으로 관리를 하는 것 같다. 방 하나 열어주고 샤워룸과 화장실도 한 군데만 열어 준다. 문제는 순례자들끼리 알베르게에 머물러야 해서 밖으로 나갔다 들어오려면 안에 있는 사람이 알아서 문을 열어주어야 하는 것이다. 밖에 나가면 벨도 없는 알베르게의 문을 두드려야 하고 안에 사람이 문 가까이 있어야 들어올 수 있으니 불편하긴 하다.

게다가 큰 알베르게를 덩그러니 일곱 명이 쓰게 되니까 휑한 분위기다. 한국인 달랑 셋이서 삼겹살 구워 먹으며 순례자 회식(?) 같은 분위기였던 어제와는 다른 고요함이 감돈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고요함도 나름대로 훌륭하다. 사람이 적으니 아이패드나 카메라 충전도 쉽고 샤워도 편하다. 조용한 분위기에 아이패드에 저장해 둔 책을 읽는 소소한 즐거움이 생기는 건 더욱 좋다. 까미노에 와서 펼친 책은 공짜로 다운로드받은 ‘그리스인 조르바’다.

샌님 같은 책벌레 “나”와 구시렁거리는 “조르바”의 목소리가 귀에 들려오는 듯하다.

“.... 결국 당신은 내가 인간이라는 걸 인정해야한다 이겁니다.”

“인간이라니요?”

“자유라는 거지!”

원래 좋아하는 책이지만 피로에 지쳐 읽다 잠들어도 까미노에서 읽는 조르바는 더 실감 나게 멋지다. 이제부턴 조르바도 함께 까미노를 걷는다.

정리=강문규기자mkkang@heraldcorp.com
맞춤 정보
    당신을 위한 추천 정보
      많이 본 정보
      오늘의 인기정보
        이슈 & 토픽
          비즈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