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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르포] 매일 새벽4시 첫차를 타는 사람들
[헤럴드경제=배두헌 기자] 서울의 수은주가 영하 7도까지 떨어진 지난 17일. 보통 사람들에겐 아직 한밤중인 새벽 4시지만 금천구 시흥2동 ‘호압사입구’ 버스 정류장은 벌써부터 붐빈다. 새벽 4시10분에 출발하는 ‘강남행’ 8541번 버스 첫차를 타러 온 사람들이다.

8541번 버스 승객들이 강남역 인근 정류장에서 내려 잰걸음을 옮기고 있다. 정희조 기자/checho@heraldcorp.com

이 버스의 승객 대부분은 금천과 관악 일대에 살며 강남 일대 빌딩에서 청소ㆍ경비 업무를 하러 새벽에 출근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의 생계를 보장하기 위해 오전 4시10분부터 20분 간격으로 하루 단 세 차례 운행하는 8541번 버스에는 ‘맞춤버스’란 이름이 붙었다.

시계가 오전 4시10분을 가리키자 미리 탑승해 출발을 기다리던 승객 한 명이 “10분이 됐다”며 운전 기사 황차식(66)씨를 재촉한다. 황씨를 포함한 8541번 버스 기사 3명은 은퇴 후 이 버스 1회만을 운행하는 ‘촉탁직’ 기사다. 벌써 수년째 새벽시간 같은 길을 달리고 있다.

첫 정류장부터 10명 남짓한 승객을 태운 8541번 버스가 짙은 어둠을 가르기 시작한다. 금세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승객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수년째 같은 버스에서 매일 만나다보니 친분이 생겼다는 게 이들의 설명이다.

17일 새벽 4시. 서울 금천구 시흥2동 호압사입구 정류장에서 출발을 기다리고 있는 8541번 버스. 배두헌 기자/badhoney@heraldcorp.com

이 버스를 7년째 타고 출근한다는 청소 노동자 임만순(69ㆍ여) 씨는 “다들 몇 년째 같은 시간 같은 곳에서 같은 버스를 타다보니 길동무이자 말동무가 됐다”며 웃었다.

임씨는 “날이 너무 추워서 사람들이 버스가 첫 출발하는 정류장으로 별로 안 왔는데 평소에는 앉아서 가려고 첫 정류장으로 오는 사람들이 많아 금세 자리가 꽉 찬다”고 설명했다. 그는 매일 새벽 2시반에 일어나 집에서 가까운 정류장이 아닌 버스의 첫 정류장까지 30분씩 걸어 올라온다고 한다.

임씨가 ‘앉아서 가기 위해’ 매일 30분씩이나 걸어서 첫 정류장으로 향하는 이유를 확인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버스가 출발한지 15분 정도 지나 관악구청 정류장에서 승객을 태우자 그야말로 발 디딜 틈 없는 만원 버스가 됐다. 어지간한 만원 버스ㆍ지하철을 경험해본 기자도 버티기 힘겨울 정도의 ‘초만원’이다.

올 겨울 들어 가장 추웠던 지난 17일, 마스크와 목도리, 장갑 등으로 꽁꽁 싸매 ‘중무장’한 승객들이 열기를 뿜어내며 부대낀다. 버스가 출발하거나 멈출 때마다 서있는 승객들이 한 쪽으로 쏠리면서 여기저기서 “아이고” 신음소리가 터져나온다. 새벽 4시25분의 진풍경이다.


부지런히 첫차를 탄 이들이지만 여유를 부릴 틈은 없다. ‘아줌마 파마’ 머리를 한 고모(69ㆍ여) 씨는 “출근 시간은 오전 5시지만 우리가 최대한 더 미리 가야 회사 직원들 나오기 전에 미리 청소를 다 해낼 수 있다”며 웃는다. 모두 즐겁게 일을 하고 있단다.

사당역과 고속터미널을 지나면서 승객들이 한 무리씩 내린다. 다른 버스나 지하철로 환승하려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고 한다. 5시가 가까워 강남역 인근 정류장에 다다르자 20~30명 승객들이 우르르 내려 고층 빌딩으로 잰걸음을 옮긴다.

8541번 버스에서 만난 승객들의 소망은 “배차를 1대만 더 늘려달라”였다. ‘초만원’상태에서도 어떻게든 버스에 오르려는 승객들로 버스도 지연되고 매일 힘겨운 출근길이 된다는 것이다.

서울시 ‘맞춤버스’ 8541번 버스의 노선도. 서울 금천구 시흥동에서 출발해 관악구 신림동을 거쳐 강남역 일대를 돌아온다. 이 버스는 오전 4시10분부터 4시50분까지 20분 간격으로 하루 세차례만 운행된다.

서울시는 지금 운행하는 3대의 맞춤버스도 이미 한계치까지 최선을 다한 배차라는 입장이다. 없어질 뻔한 노선이지만 공공성을 위해 예비차를 모두 돌려가며 운행하는 것이라는 설명이다.

서울시 버스정책과 관계자는 “버스 1회 운행당 750~800명의 승객이 손익분기점인데 8541번 버스는 평균 120명이 채 안돼 적자를 보며 운행하는 노선”이라고 했다.

8541번 버스 노선 특성상 승객들이 타고 내리는 순환이 이뤄지기보다는 금천ㆍ관악 지역에서 한번에 타고 강남 인근에 모두 내린 뒤 버스가 텅텅 빈 상태로 차고지로 돌아오기 때문이라고 한다.

오전 4시40분이었던 배차시간 역시 민원에 의해 몇차례 당겨진 것이라는 설명이다. 원래 4시40분부터 5시까지 10분 간격으로 운행하던 버스를 지속적으로 앞당겨 지금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버스정책과 관계자는 “승객들의 불편을 이해하고 있지만 배차 시간을 조정하면 이에 항의하는 또 다른 민원이 들어오기 때문에 이를 조정하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badhoney@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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