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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47일간의 세계여행] 76. 와인샘 공짜 와인에 취해…해·비·바람에 취해
-까미노 데 산티아고 +5:에스테야에서 로스 아르코스까지 21.3km

[헤럴드경제=강인숙 여행칼럼니스트] 에스테야(Estella : 별, 사랑이라는 뜻)라는 이름만큼 멋진 골목길을 걸어서 에스테야를 떠난다. 다리가 뻐근하다. 거의 오전 여섯 시 반쯤 일어나서 대충 얼굴만 씻은 후 전날 준비한 빵, 주스로 아침식사를 하고 7시에서 7시 반 사이에는 출발하게 된다. 몇몇 순례자들이 걸어가는 모습만 보일 뿐 아침 시간의 마을은 조용하다. 예쁜 집의 대문에서도 까미노 표지가 눈에 띈다. 대문은 산티아고 기사단이라도 되는 듯 육중한 철문이어도, 담장은 나무로 조경해 놓은 집, 안뜰의 주인이 누굴까 궁금해진다.



한 시간도 못 걸었는데 벌써 이라체(Irache) 와인샘이다. 옛날 이라체 수도원의 순례자 병원에서 빵과 와인을 나누어주던 풍습을 되살려 이곳 이라체의 와인공장에서 만들어 놓은 것이다. 같은 알베르게에서 묵던 독일인 두 명이 이미 도착해 있다. 체격도 무지 좋은 이 두 사람도 집에서부터 걸었다고 한다. 이탈리아에서부터 걸은 루이스 말고도 집부터 걸었다는 사람들을 또 만난다. 두 달째 걷는 중이라는 말에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큰 체구만큼 배낭도 커서 내 배낭이 무겁다는 말은 꺼내지도 못할 지경이다. 한 사람은 술을 못 마신다고 물병을 들고 웃고 있고 다른 사람은 거나하게 한 잔 하고 있는 중이다.



왼쪽 마개를 돌리면 와인이 나오고 오른쪽은 물이 나온다. 아침이긴 하지만 작은 페트병에 담아서 한 모금 마신다. 까미노에 오기 전 들은 얘기로는 한 여름에 순례자가 많을 때는 이곳의 포도주도 남아나질 않는다고 한다. 지금은 순례자들이 적은 계절이라 어느 곳을 걸어도 여유가 있다. 순례자가 먹을 물을 담아가는 샘이 있는 마을도 있지만, 공짜 와인이라니 신기하다. 예수님의 피와 살이라는 종교적인 의미가 와인에 담겨 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세속적으로 생각하는 술이 공짜인 게 아니라, 목마른 순례자들에게 포도주로 제공되는 나눔과 배려가 바로 이곳의 와인샘이다.



숲길로 접어든다. 비가 뿌리다가 해가 나오다가 하는 날씨라서 계속 우비를 입은 채 이동한다. 빗방울에 촉촉해진 숲은 엄청난 양의 피톤치드를 뿜어내고 있는 듯, 순례자의 기분을 상쾌하게 해준다. 으슥한 숲길이 이어져도 노란 화살표가 길을 잃지 않게 지켜준다. 앞서간 사람들의 발자국으로 만들어진 오솔길 또한 그렇다. 누군가의 발자국을 되짚으며 가고 있다. 그 발자국은 이십 분 전에 지나간 사람의 것일 수도 있고 일 년 전, 혹은 수 세기 전 어떤 순례자의 것일 수도 있다. 순례자들이 걷고 걸어서 다지고 다져진 길에 내 발자국을 하나씩 보태며 걷는다.
상주하지 않는 이상 현재의 계절과 날씨도 여행지의 느낌에 반영이 된다. 오늘은 해가 떠 있는 상태에서 비도 내리고 바람도 세차다. 비는 내리는데 해는 비치고 거기에 거센 바람이 몰아쳐서 젖은 우비가 펄럭인다. 처음 겪어보는 요상한 날씨, 해와 비와 바람을 동시에 만난다.



높은 언덕으로 올라서야 겨우 마른 흙을 밟는다. 진흙을 헤쳐 나온 신발을 털고 아픈 다리를 쉰다. 가방 주머니에 넣어 둔 오렌지와 바나나를 꺼낸다. 이 과일들도 무게로 느껴진다. 옆에 앉은 케이는 짐으로 가지고 가느니 뱃속에 넣어 소화시키는 게 낫겠다며 웃는다. 셋이 함께 출발했는데, 어제 힘찬 발걸음으로 나에게 부러움을 유발하던 진은 오늘은 다리가 많이 아픈지 점점 뒤처진다.
함께 쉬다가 일어섰지만 여기서는 내 발걸음이 더 가볍다. 강풍을 마주하며 이 고요 속을 걷는 기분이 묘하게 좋아진다. 케이도 뒤편으로 사라지고 더 뒤에 오는 진은 아직도 보이지 않는다. 친구 다리가 많이 아픈 것 같더라고 지나가는 순례자가 전해주는 말을 들어보니, 진은 다리가 아파서 천천히 걷는 중인 듯하다. 하긴 까미노에서는 함께 쉬었다가 일어나도 걷다 보면 혼자가 되는 건 마찬가지다. 어차피 혼자 걸어야 하고 자신의 두 발이 아니면 걸을 수도 없는 길이다. 



5km마다 마을을 만날 수 있어서 음료를 마시거나 화장실도 갈 수 있었는데 산을 넘고 나서 남은 길 13km 정도는 마을이 하나도 없는 외진 길이다. 주위는 그저 푸른 들판이 끝도 없는 평원뿐이다. 비바람이 몰아치다가 해가 번쩍 나왔다가 하는 도깨비 날씨에, 자잘한 자갈 섞인 흙길이 이어진다. 거대한 한 폭의 그림 속에 작은 점인 내가 걷고 있다. 작은 점일 뿐인 나의 머릿속에서 끝없을 듯한 이 길보다 더 긴 기억의 편린들이 하나 둘 흘러나온다. 다리는 점점 아파오지만 이상하게도 걸음걸이에 묘한 쾌감이 깃든다. 그림 안의 한 점이 되어 걷고 있는 지금 이 상황을 좀 더 즐기고 싶다. 이 그림 안으로 누구라도 들어오는 게 싫다. 발의 통증은 존재를 알려주는 사이렌처럼 느껴지고 발걸음은 생각의 리듬에 맞춰 빨라진다.



아주 먼 기억들, 어떻게 그런 기억이 아직 남아있을까 싶은 아주 소박한 기억들 까지 샅샅이 떠올려진다. 내딛는 한걸음이 다른 발걸음으로 이어지듯, 하나의 기억은 다른 기억을 부른다. 젖은 신발, 배낭의 무게, 아픈 다리 같은 현실은 어느새 잊히고 이 그림 안에서 일생이 리와인드되는 기적이 행해지는 중이다.
오른발을 딛고 왼발로 나아가면서 다시 오른 발의 받침대가 되어주는 보행의 규칙이 새삼스럽다. 한 발로는 전진이 힘들다는 것, 두 발이 있기에 잘 걸을 수 있다는 걸 오늘에서야 알게 된다. 두 발이 서로를 위해 희생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별의별 생각을 다하면서 두어 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쉴 곳이 없어서 계속 걸을 수밖에 없기도 했는데 뜻하지 않게 공터의 벤치를 발견한다. 목적지에 거의 다 왔으니 다리나 주무르면서 케이와 진을 기다려 보기로 한다. 곧 케이가 도착하고 다른 순례자들 몇 명이 지나가고 나서도 한참이나 지나고 나서야 진이 나타난다. 길이 들지 않은 등산화가 속을 썩인 모양이다. 휴식 후 셋이 함께 출발한다. 비는 완전히 그쳤고 목적지인 로스아르코스(Los Arcos)는 저기 보이는데 갑자기 발목이 이상하게 통증이 느껴져 걷기가 불편하다. 케이와 진이 앞서가고 오래 쉬었던 나는 오히려 뒤쳐진다. 걷는 김에 쉬지 말고 계속 걸어야 했을까? 족히 한 시간은 쉬었는데 발이 왜 이 모양인지 모르겠다.



알베르게가 세 군데나 있지만 처음에 가려고 했던 곳을 지나치는 바람에 가지 못하고 두 번째 들른 곳은 너무 협소해서 들어갔다가 나온다. 마지막으로 들른 알베르게는 사설알베르게인데 손님을 처음 받는 듯 정리가 덜 되어있다. 까미노에도 성수기가 있어서 비수기인 겨울에는 문을 닫았다가 3,4월쯤 시작하는 곳이 많다고 하더니 오늘 묵을 곳이 그런 사설알베르게다. 한 여름엔 사람들로 붐볐을 마당이 정돈도 되지 않아 휑하다. 하지만 주방이 넓은 데다 많은 순례자가 올 것 같지 않아서 사람 없는 알베르게에 한국인 셋이 묵어보기로 한다.
따뜻한 샤워로 피로를 풀고 발목엔 압박붕대를 감고 크록스를 신고 마을로 나간다. 짐만 없어도 훨씬 걸을 만하다. 목적지에 도착하는 시간이 보통 3시 전후라 시에스타 시간과 겹치는 경우가 다반사다. 오늘도 이 경우라 고요한 마을의 골목을 누빈다. 규모가 큰 마을이어서인지 문을 열어놓은 곳이 있다. 반가워서 얼른 들어가 보니 수제 과자를 파는 가게다. 단맛이 마구 당겨서 맛있는 비스킷을 사서 게 눈 감추듯 먹어버린다. 아무도 없는 조용한 골목길을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몇 명 되지도 않지만 다들 걷다가 한 번 쯤은 만난 순례자들 이어서 서로 웃게 된다. 어젯밤 같은 곳에 묵었던 순례자들은 마을 초입에 있는 알베르게를 잘 찾아서 거기서 머물고 있다. 이산가족이 된 듯 괜히 아쉬워진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점심도 과일로 때우고 제대로 못 먹었으니 오늘 저녁은 한국식으로 먹어보기로 한다. 냄새 풍기는 삼겹살을 구워먹기엔 주방을 쓰는 사람이 없는 오늘이 제격이다. 시에스타가 끝난 가게에서 양파, 상추, 마늘까지 구입한다. 이곳에서 마침 정육점 위치를 아는 콜롬비아 부부의 남편을 만나 스페인어가 모국어인 아저씨가 정확히 주문해 주는 생삼겹도 살 수 있었다.


고기를 좋아한다는 케이가 굽는 삼겹살에, 진이 한국에서 가져왔다는 허브솔트를 뿌려, 내 가방에 두 달 이상 모시고 다닌 튜브 고추장과 스페인에서 구한 상추로 쌈을 싸서 먹는다. 주인도 집으로 돌아간 알베르게의 주방에선 밤늦게까지 지글지글 돼지기름 타는 냄새가 풍기고 피로와 알코올기운과 과식으로 벌건 얼굴이 된 페레그리노 세 명이 웃고 있다. 오늘 하루도 열심히 걸은 당신들을 위하여 건배! 그리고 까미노를 걷게 된 이야기, 오늘 걷던 이야기를 무협소설처럼 와장창 쏟아 놓고 까르르 웃어대는 밤, 별이 반짝이는 걸 보니 내일은 날씨가 맑을 것 같다.

정리=강문규기자mkkang@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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