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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47일간의 세계여행] 72. 눈 속에 첫걸음…‘순례자 길’은 고난 길
까미노 데 산티아고+1:론세스바예스에서 수비리까지 21.8Km


[헤럴드경제=강인숙 여행칼럼니스트] 첫걸음의 설렘으로 일어나 얼른 문밖으로 나가 본다. 다행히 눈이 그치긴 했지만 밤새 내린 눈이 온 마을에 소복이 쌓여있다. 눈이 내릴 거라고는 예측하지 못했다. 밤에 기온이 많이 내려갔는지 눈이 녹지 않고 생각보다 많이 쌓여 있어 곤혹스럽다. 날씨가 추워서 청바지를 입고 가려고 했는데 눈에 젖을 게 뻔해서 얼른 파타고니아에서 사 온 등산용 바지로 갈아입는다.

오늘이 까미노 첫날인데 눈 속을 걸어야 하다니 난감하다. 옷을 차려입고 신발 끈을 조이고 알베르게 문 앞에 서지만 선뜻 발걸음을 내닫게 되지 않는다. 하지만 오늘 이 눈 속을 걸어야 하는 사람들은 나 하나가 아니다. 어제 함께 잤던 사람들이 하나 둘 깨어 움직이고 있다. 눈길은 먼저 출발한 사람들의 발자국으로 어지럽고, 지금 막 내 옆에서 등산화 끈을 조이고 있는 순례자도 어깨를 으쓱해 보이기는 마찬가지다. 


용기를 내어 눈 속을 걸어서 출발한다. 추울까 봐 패딩을 입고 그 위에 바람막이까지 덧입고 배낭을 메고 나니 몸이 둔해졌다. 아직 다 내리지 못한 눈발이 다시 흩날린다. 길은 때 아닌 설경으로 아름답기는 한데 걷기가 힘들다. 기온이 영하는 아니라서 이미 내린 눈은 사람들의 발걸음에 녹아 진흙범벅이 된다. 앞뒤로 걷는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걷다가 까미노에서 처음 말문을 트게 된 사람들은 콜롬비아에서 왔다는 중년의 부부다. 이럴 때는 샛길로 가지 않는 게 현명하다며 차가 다니는 대로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아저씨를 쫒아 걷는다. 한참 뒤에 따라오는 사람들도 샛길을 피해 큰길로 눈을 맞으며 걸어온다.

하지만 까미노가 안내하는 화살표를 따라가야 하니까 계속 대로로 갈 수가 없다. 결국은 샛길로 들어서야만 한다. 좋은 계절이었으면 걷기 좋고 볼 것도 많은 풍경이었을 길이지만 많은 양의 눈이 녹아서 시냇물이 흐르는 듯 물길이 되어 있다. 


발이 젖는 게 신경 쓰여서 자갈이나 큰 돌을 딛고 가보려 하지만 걷다 보면 어느새 발은 눈 녹은 물에 빠지곤 한다. 신발이 젖기 시작할 때는 더 많이 젖는 것을 막아보고자 요리조리 피해 걸어보지만 등산화도 아닌 가벼운 트레킹화인 내 신발은 다 젖어버린다.

또 하나의 낭패는 옷이다. 추울까 봐 챙겨 입은 패딩에, 바람막이에, 눈이 내린다고 우비까지 쓰고 걸었더니 시간이 지날수록 몸에서 열불이 난다. 걷는 걸음이 몸에 온기를 지펴주고 한 낮으로 가면서 기온자체도 오르는 중이라 그런 것이다. 많이 걸어본 경험이 없는데다 다른 여행 준비하느라 사전 지식도 없이 와서 이런 사태가 발생한다. 일상에서 나의 두 다리는 걷는 것보다 식물처럼 몸을 지지하는 역할로 많이 사용하긴 했다.

걷다가 만난 작은 마을에 바(Bar)를 발견하고 재빨리 들어간다. 아침에 만난 콜롬비아 부부도 여기에 들어와 있다. 까미노에선 이런 식으로 만나는 게 비일비재 한 듯하다. 아침도 챙겨먹지 않고 걸어서 배도 고프다. 패딩을 벗어 배낭 속에 넣고 젖어버린 운동화 속 양말도 벗어 놓고 요기를 한다. 레스토랑이 아니라서 음식이라곤 바게트 빵 사이에 음식을 채워 먹는 보까디요(Bocadillo)와 커피가 전부다. 참치 보까디요와 까페콘레체(Cafe con Leche : 밀크커피)한 잔을 주문한다.


오늘의 목적지는 수비리(Zubiri)라는 마을이다. 까미노를 걷다 보면 어떤 식으로든 방향을 알려주는 표시가 있다. 때로는 작은 비석에 조개 모양이기도 하고 건물에 표식이 붙어 있기도 하다. 노란 화살표를 그냥 그려놓은 곳도 있다. 어쨌든 노란 화살을 따라가면 되니 길을 잃을 염려는 별로 없다. 하지만 오늘 까미노가 처음인 순례자들은 그 표시도 잘 찾지 못한다. 바(Bar)에서 나오자마자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을 잃는다. 눈은 내리고 사람도 별로 보이지 않는 마을을 헤매고 있자니, 어느 집 이 층에서 고개 내밀고 쳐다보던 할머니가 웃으면서 마을을 나가는 방향을 알려준다. 우리를 한참 동안 지켜보신 것 같다.

이 길을 걷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힘이 들다는 생각을 하면 저 앞에서 걷고 있는 사람의 뒷모습이 내 모습이겠구나 싶다.


그 와중에도 지나가던 모두를 웃게 한 것은 어떤 표지판이다. 오솔길에서 나와 도로로 연결되는 곳이라 차들에게 우선 멈추라고 경고하는 “STOP”표지판에 순례자의 낙서가 위아래로 덧씌워져 있다. “Don‘t stop walking!” 한 사람이 그걸 가리키며 읽으니 나머지 순례자들의 웃음이 동시에 터져 나온다. 오전 내내 눈밭을 헤치며 걷다 보니 어디라도 멈추어 쉬고 싶지만 목적지까지 걸어야만 하는 운명을 지닌 순례자들에게 그 말은 맞는 말이면서도 왠지 서글픈 말이다.

신발이 완전히 한번 푹 젖고 나서는 운동화 안으로 물이 들어오든 말든 아예 신경을 쓰지 않고 걷게 된다. 그리고 곧바로 그것이 오히려 편한 방법이었음을 깨닫는다. 진작 포기했다면 걷는 게 조금은 수월했을 텐데…. 결국엔 젖을 걸 알면서도 조금이라고 덜 젖게 하겠다고 조심해봐야 걷기만 더 힘든 노릇이었다. 포기하니 오히려 쉬워진다.

평소에 걷는 것과는 담쌓고 지내는 나는 7.5km 남았다는 표시를 봐도,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앞으로 몇 시간을 더 걸어야 하는 건지 전혀 가늠이 되지 않는다. 계속 까미노를 걷다 보면 거리감도 생기겠지만 오늘은 예상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다. 


방에는 이미 도착해서 보송보송한 침대에 누워서 쉬고 있는 사람도 있다. 미국, 영국, 이탈리아, 스페인, 그리고 한국 사람까지 국적도 다양하고, 20대부터 60대까지 연령도 다채로운 사람들이 한 방에서 머물게 되었다.

2시가 넘어 도착해서 짐을 풀고 있는데 먼저 와 있던 영국 여자가 하는 말이 가게에 갈 거면 지금 빨리 가라고 한다. 시에스타(Siesta)가 2시30분부터라서 이제 가게가 막 문 닫으려 한다고 말이다. “앗, 진짜 여기가 스페인이구나.” 하고 무릎을 친다.

먼저 도착해서 쉬고 있던 순례자 중에 미국에 사는 한국교포 부부가 있다. 한국을 떠난 지 오래된 교포들이지만 한국인으로서의 동질감은 당연히 생긴다. 게다가 서로 까미노에서 처음 만난 한국인이니 더욱 그렇다.

저녁을 먹으며 부부의 이야기를 듣는다. 한 달간의 휴가 동안에 남편은 자동차나 렌트해서 편하게 스페인과 포르투갈로의 여행을 꿈꿨고 부인은 산티아고 순례를 원했다고 한다. 천방지축 캐릭터의 남편을 굳이 까미노에 데리고 와서 티격태격하면서 걷고 있는 부인이 힘들어 보인다. 지금이라도 순례를 그만두고 여행을 떠나자는 남편과 계속 이 길을 걷자는 아내는 내내 토닥거린다.

“걷기 시작한다. 계속 걷는다. 그리고 멈춘다”라고만 쓰게 될 것 같았던 까미노의 첫날은 이렇게 지나간다. 쌓인 눈에, 종일 내리던 빗방울에, 젖은 신발에 쉴 새 없이 떠밀려 걸은 듯한 까미노의 첫날이 끝난다. 누군가 도마토리의 전등을 끄자마자 곯아떨어지는 사람들의 숨소리가 들린다. 모두들 눈밭을 헤치며 걷느라 힘든 하루였을 것이다.

정리=강문규기자mkkang@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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