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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쉼표] 경운궁
정동(貞洞)은 한국 근대사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곳으로 그 중심에 경운궁이 있다. 덕수궁으로 이름이 바뀐 경운궁의 역사는 놀랍도록 드라마틱하다.

경운궁은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사저였으나 임진왜란으로 의주로 피난 갔던 선조가 환도해 임시 행궁으로 삼아 16년간을 경운궁에서 기거하게 된다. 이 때까지만 해도 정릉동 행궁으로 불렸다. 선조 사후 즉조당에서 즉위한 광해군은 경운궁이라는 정식 궁호를 붙인다. 1611년 창덕궁으로 어가를 옮긴 광해군은 창덕궁이 자신에게 이롭지 못하다는 말에 홀려 경운궁으로 다시 옮겼다가 1615년 창덕궁으로 돌아간다. 광해군은 후에 인목대비를 이 곳에 유폐시키고 서궁이라 불렀다. 인조반정 이후 경운궁은 잊혀진 궁이 됐다. 경운궁이 다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건 고종 때. 경운궁은 고종과 명운을 같이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으로 아관파천했던 고종이 1897년 2월 경운궁으로 돌아오면서 경운궁은 제국의 궁궐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고종은 대한제국의 위상을 보여주기 위해 경운궁 보수에 나섰다. 국내 내로라하는 도편수와 건축자재들이 전국 방방곡에서 모였다. 당시 경운궁의 규모는 현재의 3배에 달할 정도로 컸다.1902년 중화전이 완성됐으나 2년 후 화재가 난다. 1905년에는 중명전에서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이토오가 초대통감으로 부임하게 된다. 고종이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헤이그 특사를 접견한 곳도 중명전이다. 이 사건으로 고중은 강제 퇴위를 당하고 이 곳에서 순종이 황제에 오른다. 서울 중구청이 오는 29~31일 정동 일대에서 ‘정동야행(貞洞夜行)’ 축제를 연다. 영국대사관과 성공회 성가수녀원 등 일반에 첫 공개되는 곳들이 여럿이다. 깊어가는 가을과 함께 역사속으로 걸어들어갈 수 있는 시간이다. 



이윤미 기자/mee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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