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시계
실시간 뉴스
  • 생활고에 가족 살해하는 비정한 가장들
‘생활고 발생→해결모색 포기→가족살해→자살(시도)’
나약한 이 시대의 ‘못난이 아빠’ 씁쓸한 자화상


[헤럴드경제=서지혜 기자] 생활고에 찌든 이 시대 가장들이 나약해지고 있다. 90년대 직장을 잃고 가족을 등지고 노숙자로 전락한 아빠가 ‘몰락한 가장의 전형’이었다면, 최근에는 생활고에 가족을 살해하고 스스로 고단한 삶을 청산하는 극단적 선택을 하는 못난 아빠들이 늘어나는 것.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부모의 가족살해 사건이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지난 7일 서울 강서구 내발산동의 한 빌라 1층에서 말기암 환자인 아내와 특목고에 다니는 10대 딸을 살해한 이모(58) 씨는 ‘생활고 발생→해결모색 포기→가족살해→자살(시도)’라는 올해 발생한 크고작은 가족살해사건의 경로를 그대로 답습했다.

경찰에 따르면 이 씨는 하루 전 날인 6일께 아내와 딸을 살해한 것으로 보인다. 경찰은 “딸과 아내에게서 목졸린 흔적은 보이지 않았지만, 수면제로 숨지게 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특히 딸인 이모(16) 양이 사건 당일 오전 시험기간인데도 학교에 가지 않아 담임교사와 이씨가 통화를 한 것으로 보아 이씨는 가족들을 살해한 다음 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보인다.

이씨가 남긴 6장 가량의 유언장에는 말기암 환자였던 아내를 비난하는 내용이 상당부분을 차지했다. “아내가 돈을 많이 쓰고 남편을 속인다” “아내의 경제관념으로 집이 어려워졌다”는 내용이었다. 이씨는 이 유서를 조카에게 보내고 집 열쇠 위치까지 알려준 후 자살했다. 하지만 “혹시 딸이 죽지 않고 깨어나면 병원에 데려다달라”는 부정(父情)도 잊지 않았다. 암 환자였던 이씨의 아내는 사망 직전 혼자서 거동하지도못할만큼 상태가 악화됐던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유서에는 아내의 암 투병에 관한 내용은 적혀있지 않았다.

이 씨의 유서는 가족에 대한 죄책감보다 원망을 주로 드러냈다는 점에서 기존의 가족살해사건과 차이가 있다. 실제로 상당수 생활고를 비관한 가족살해사건에서는 가해 부모가 유서에 대개 ‘미안하다’는 말을 드러내고 있지만, 이번 사건에서 이씨의 유서에는 돌봐야 할 대상인 아내의 씀씀이에 대한 원망만이 가득했다.

이수정 경기대학교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이에 대해 “아버지에게 정신적 취약함이 있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이 사건은 미안한 마음보다는 돌아봐야 할 암환자 아내를 탓하는 심정이 더 컸고, 딸을 걱정하면서도 딸을 줄이고 하루 뒤에 자살했다는 점이 다른 동반자살사건과 다르다”며 “가해자가 냉철한 판단력이 없거나 정신적으로 판단착오를 할만한 취약한 상황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이런 아버지의 성향은 지난 1월 서울 서초동에서 발생한 ‘서초 세모녀 살해사건’에서도 나타난다. 두 아버지의 빈부에는 상당한 격차가 있지만, 서초 세모녀 사건의 범인 강모씨는 삶을 영위할 수준의 재산이 있었다는 점에서 그런 극단적 선택을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하지만 강씨는 딸들과 아내를 살해함으로써 경제적 불안감을 해소하고자 했다.

전문가들은 이처럼 책임감의 대명사였던 가장이 오히려 가족을 살해하고 삶의 끈을 놓아버리는 상황을 ‘낙담한 가장의 잘못된 책임감’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물질사회에서 타인과의 비교로 인한 박탈감은 더욱 커졌고, 빈곤을 대물림해주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부정적 방향으로 책임감을 표현하는 가장이 늘고 있다”며 “내가 낳은 아이니까 책임지겠다는 가부장적 소유의식과 자살이 흔해진 현 사회현상이 맞물리면서 비슷한 사건이 전염적으로 발생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gyelove@heraldcorp.com
맞춤 정보
    당신을 위한 추천 정보
      많이 본 정보
      오늘의 인기정보
        이슈 & 토픽
          비즈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