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시계
실시간 뉴스
  • [147일간의 세계여행] 57. 산행은 고행… 토레스델파이네 ‘삼봉’서 말을 잊다
[헤럴드경제=강인숙 여행칼럼니스트] 새벽 4시 반, 알람이 울린다. 해도 떠오르기 전, 새벽의 어둠이 깔린 산장을 나선다. 모자와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짐이라고는 작은 가방 속에 생수와 약간의 간식이 전부다. 카메라조차도 들고 가지 않는다. 여기 칠레노 산장에서 토레스델파이네(Torres del Faine)의 세 개의 봉우리가 있는 정상까지 하루 트레킹을 할 예정이다. 여행 떠나온 지 벌써 두 달이 다 되어 가지만 이처럼 본격적인 산행은 처음이라 걱정이 된다.

산장을 빠져나오지만 미명의 어둠은 그대로여서 방향감각도 없다. 어제 봐 둔 산길은 저 멀리 어디쯤인 것 같지만 낮에 보는 풍경과 어둠에 가려진 그것은 전혀 다른 것이어서 분간할 수가 없다. 어둠을 더듬어 가다보니 공동묘지 같은 봉분이 보인다. 여긴 남미라 그런 건 없을 텐데 의아해 하면서 다가가니 그곳은 산장 근처의 캠프장이다. 아직 입구에도 들어서지 못했는데 주위가 밝아온다. 이제야 가야할 길이 보인다.


천천히 전망대를 향해 오르기 시작한다. 전망대가 보이는 것은 아니다. 다만 거기로 안내하는 길을 따라 걸을 뿐이다. 일출을 보며 벌건 얼굴로 산을 오른다. 걷다보니 어느 순간부턴 아무도 말을 하지 않는다. 함께 걷기 시작한 사람들은 각자의 발걸음에 맞춰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고 있다.

많이 올라왔다고 생각한 지점에서는 어김없이 내리막길이 나온다. 길은 생각보다는 평탄해서 걸을 만하지만 산을 둘러가는 길이라 길옆은 낭떠러지다. 산을 왼편에 끼고 오른쪽 아래로 강을 굽어보며 햇살을 받으며 흙먼지 이는 길을 걷는다. 발걸음은 고달픈데 경치는 좋다.

자갈길을 걷다보니 숲길이 나온다. 싱그러운 바람이 부는 숲 속 트레킹 코스는 더워진 몸을 식혀준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고 자갈길이 나오다보면 어느새 숲이 이어진다. 숲에서 계곡을 만난다. 빙하가 녹은 물이 콸콸 쏟아져 내린다. 다리를 건너니 산장이 하나 있다. 산장 앞 테이블에 앉아 간식을 꺼내 먹으며 몸을 쉰다. 이 산장 옆에도 아니나 다를까 역시 텐트들이 누워있다. 천천히 트레킹하는 사람들의 여유다.


이제부터는 오르막이다. 트레킹 코스로 정비 되었다 해도 여기는 안데스 산맥의 일부다. 숲길은 숲길이라 튀어나온 나무뿌리나 바위들도 엄청나다. 발걸음이 빠른 동행 한 명은 앞으로 성큼성큼 나아가고, 시작할 때부터 헐떡이며 먼저 가라고 뒤쳐지던 다른 동행은 돌아봐도 보이지 않는다. 혼자서 힘들면 쉬고 쉬다가 닷 걷는다. 누가 강제한 것도 아닌데 여길 오르는 것은 토레스델파이네의 삼봉을 가까이 봐야만 하는 이유는 아니다. 여기에 왔고 이걸 하고 싶었으니 시도하는 거다.

경사가 점점 급해지고 등산로에 물이 같이 흐르는 경우도 있어서 망설이다가 뒤에서 올라오는 사람들에게 길을 양보하기도 한다. 얼마나 일찍 산에 오른 건지, 아니면 두 번째 산장에서 오르기 시작한 사람들인지 모르겠지만 하산중인 사람들도 만난다.

숲을 벗어나 거의 올라왔다고 생각한 지점에서 다시 한 번 좌절(?)하게 된다. 아직도 갈 길이 남은 것도 모자라 지금부터는 그저 화강암 돌덩이의 산이다. 그늘이 되어 주던 숲은 끝나고 해가 하늘위로 떠올라 그림자는 점점 짧아지는데 이제부터는 따가운 햇살아래 올라가야 한다. 무수한 바위를 건너 자갈에 미끄러지면서 네 발로 기다시피 오른다. 


하얀 돌덩이들만 바라보며 오르는 데 지치고 얼마나 더 가야하는 지도 알 수 없다. 슬슬 짜증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흐르는 땀을 훔치며 한 발을 내딛어 오르는 순간, 파란 하늘 아래 무려 1200만 년 전 화강암으로 형성되었다는 세 개의 거대한 봉우리가 병풍처럼 둘러쳐진 푸른 호수가 시야를 가득 채운다. 말을 잊는다. 여기가 전망대다! 다리에 힘이 풀린다. 풀썩 주저앉아 모자를 벗고 있는데 저만치서 먼저 도착한 동행이 손을 흔든다.

힘들게 올랐으니 이제 할 일이야 아무 바위에나 걸터앉아 이 풍경을 감상하고 빙하의 호수에 발이나 담그는 것이다. 세찬 바람이 머리를 흩날리지만 덕분에 쉴 새 없이 흐르던 땀은 마르고 있다. 그사이 여기 오르지 못하고 중도에서 되돌아갔을 것으로 예상했던 동행도 홀연히 나타나 우리의 박수갈채를 받는다. 여행의 기운 때문이기도 하고 아름다운 자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정도에 스스로에게 지고 싶지 않다는 오기도 한몫해서 운동부족이던 한국여자들이 남미에 와서 선전하고 있다.


카메라가 없으니 오히려 느긋한 마음으로 풍경을 바라보게 되고 덕분에 토레스델파이네 전망대에서 동행이 찍어준 소중한 사진 한 장도 얻는다. 구름 한 점 없는 새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병풍처럼 서 있는 화강암의 봉우리들과 그 아래 녹지 못한 눈이 쌓여 있고 빙하가 녹아든 물은 초록색 호수가 되어 풍경을 완성 시킨다.

바람이 세서 땀은 빨리 식지만 몸은 그만큼 추워진다. 이제는 하산해야 할 시간, 올라온 만큼 되짚어 내려가야 한다. 거리와 난이도를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실제 가야하는 것은 몸이기 때문에 별 차이는 없다. 하얀 화강암 돌덩이들을 되짚어 내려가서 숲길을 지나 빙하가 콸콸 쏟아져 내리는 초록색 강을 건넌다. 길목의 산장에서 잠시 쉬다가 다시 발길을 재촉한다. 서둘러 올라온 보람이 있어 뜨거워진 태양을 지고 오르는 불상사는 피하고 있다.


한낮, 웃통을 아예 벗어 제치고 커다란 배낭을 지고 오르는 산에 오르는 사람들이 힘들어 보인다. 아마 중간의 산장에서 하룻밤을 자고 올라가려는 일주일이상의 트레킹을 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내려갈 때는 오를 때보다 더 열심히 “올라!”를 외쳐주게 된다. 오르는 게 얼마나 힘들지 알기 때문이다. 온전히 두 발로 딛고 서서 한 걸음씩 옮기는 거리만큼만 걸을 수 있다는 것의 감사함을 생각하게 된다. 오로지 나의 동력만으로 움직여야 보이는 조금은 다른 세상이 있었다. 일곱 시간을 걷는 내내 오만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사라지기를 반복하지만 시간가는 줄 모르고 그 생각들을 즐기고 있었다. 비록 다리는 후들거리지만 오를 때 보지 못하던 풍경들도 내려갈 때는 마음껏 감상한다.


산장으로 돌아와 짐을 찾는다. 산행이 힘들까봐 두고 갔던 가방 속 카메라를 꺼내들고 이제는 아스라히 보이는 세 개의 산봉우리를 찍어본다. 온종일 산행에서 먹은 것이 별로 없는데 배가 고프지도 않았다. 산행을 마치고 나니 비로소 허기가 진다. 산장 안에서는 모든 것이 어마어마하게 비싸지만, 따뜻한 물은 무료로 식당의 보온병에 구비되어 있다. 그 뜨거운 물을 받아서 볼리비아 한인마트에서 샀던 컵라면에 넣어 먹으며 돌아가는 차를 기다린다. 잊지 못할 토레스델파이네의 세 봉우리가 아득한 곳에서 빛나고 있다.

이제 1박2일간의 산행을 마무리하고 칼라파테로 돌아간다. 칠레 국경을 훌쩍 넘어서 이틀 만에 아르헨티나로 입국하는 것이다. 섬과 다름없는 한반도, 해외여행이란 바다를 건너야만 성립되는 지역에 살다가 이렇게 국경을 사이좋게 나누어가진 나라들을 하루 이틀 새에 오가니 감회가 남다르다. 국경을 넘는 것이 이렇게도 쉬운 일이건만, 한국인에게 국경이란 삼엄한 비무장 지대뿐이라는 것이 슬프다. 꽤 많은 곳을 여행했지만, 국경을 넘을 때마다 항상 처음 시도하는 일처럼 미세한 긴장과 흥분이 일어난다. 두 번째 아르헨티나 입국도장이 여권에 선명히 찍힌다.

정리=강문규기자/ mkkang@heraldcorp.com
맞춤 정보
    당신을 위한 추천 정보
      많이 본 정보
      오늘의 인기정보
        이슈 & 토픽
          비즈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