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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의 민낯-승정원일기 30] 탕평을 마음에 새기라
영조 18년(1742) 3월 26일, 아침에 왕세자의 입학식을 거행하였다. 영조 나이 41살에 낳은 둘째가 8살이 되어 입학식을 하였으니, 그 기쁨이 어떠하였겠는가. 영조는 아들 2명이 모두 세자로 책봉되었지만 즉위하지는 못하였다. 첫째 효장세자(나중에 진종으로 추존)는 10살로 영조 4년(1728)에 죽었고, 둘째 사도세자는 잘 알려진 대로 뒤주에 갇혀 불행하게 생을 마감했기 때문이다.

이날 영조는 창덕궁의 영화당(暎花堂)에서 행사에 참여한 성균관 유생을 불러 노고를 치하하면서 친필로 쓴 “공평하고 편벽되지 않음은 군자의 공평한 마음이요, 편벽되고 공평하지 않음은 소인의 사사로운 마음이다.”라고 쓴 어제 1장을 주었다. 그리고 이 구절을 돌에 새겨 반수교(泮水橋)에 세우라고 하였다.

[사진출처=한국학중앙연구원]
[사진출처=한국학중앙연구원]
[사진출처=한국학중앙연구원]

이는 나중에 벼슬을 하는 젊은 유생들에게 당론에 빠지지 말고 공평한 마음을 가진 군자로 성장하여 탕평 정치를 펼칠 것을 기대하는 영조의 당부이다. 이때 세운 것이 현재 성균관 대학교 안에 남아 있는 탕평비이다.

영조는 말년에 경희궁(慶熙宮)의 집경당(集慶堂)에서 자신의 업적 6가지를 말하였는데, 그 첫 번째를 ‘탕평’이라 하였다. 영조는 즉위 과정에서 치열한 당쟁을 목격하고, 즉위한 뒤에도 자신을 임금으로 인정하지 않는 무신란을 겪었다. 그런 가운데 왕권을 확립하고 국정을 수습하여 민생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당론을 조절하여 정국을 안정시키는 탕평책이 최상의 정책이라고 확신했다. 때문에 52년의 재위 기간 동안 탕평 정책을 추진했던 것이다.

강대걸(한국고전번역원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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