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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피플앤스토리]“자동차는 생명체…내겐 ‘오랜 벗’같은 존재”
자동차와 함께 달려온 25년, 재규어 랜드로버 코리아 한국인 CEO로 파격 발탁…백정현 대표의 車·車·車 스토리
고진감래(苦盡甘來). 힘들다는 생각이 머리 끝까지 차오를 때마다 1년만 더 버텨보자며 이를 악물었던 경상도 사나이가 있었다. 그는 자동차 업계에 몸담은지 25년, 재규어 랜드로버 코리아 입사 15년만에 최고경영자(CEO) 자리에 올랐다. 특히 한 수입차 브랜드에서 계속 근무해 임원을 거쳐 CEO가 된 사례는 거의 없다.

지난 4월 취임한 백정현(49) 대표의 인터뷰는 짧은 침묵으로 시작됐다. 백 대표의 인생에는 언제나 자동차가 있었다. 차가 귀하던 어린 시절 아버지가 애지중지하는 신진지프(신진자동차가 만든 국내 최초 4륜 구동 SUV)를 보고 자랐다. 중학교 때 부친 차를 몰래 몰아보려하다가 혼쭐이 난 적도 있다. 자동차 인생의 자초지종(自初至終)을 풀어내자니 지나온 세월이 주마등처럼 흘러가는 듯 했다. 백 대표가 인생 이야기를 해보겠다고 언론을 만난 건 헤럴드경제가 처음이다.
지난 10일 서울 한남동 전시장에서 만난 백정현 재규어 랜드로버 코리아 대표. 재규어 플래그십 세단 ‘XJ’ 앞에 선 백 대표는 XJ를 두고 브리티시 럭셔리의 정수라고 말한다. XJ는 백 대표가 타는 차이기도 하다. 정희조 기자/checho@heraldcorp.com

폭염이 절정에 달했던 지난주 서울 한남동 재규어 랜드로버 전시장에서 백 대표가 풀어내는 자동차 스토리를 들어봤다. 이 곳 고객상담실 테이블 위의 랜드로버 미니어처는 매우 인상 깊다.

▶“비서실에는 안 갑니다”=1990년. 스물네살의 신입사원 백정현은 대학을 졸업하고 기아자동차에 입사했다. 경영학을 전공했지만 자동차회사를 골랐다. 당시 경영학과 출신들은 급여가 많은 금융회사를 선호했다. 하지만 그는 자동차가 좋다는 이유 하나로 주저없이 자동차회사에 원서를 냈다.

기아차는 청년 백정현을 김선홍 전 회장의 비서실에 배치하려 했다. 영어능력을 높이 평가받지 않았을까 하는 게 백 대표의 추측이다. 그는 지금도 영국 본사와 능숙하게 의사소통을 할만큼 뛰어난 영어실력을 갖고 있다.

그는 그러나 반대의사를 명확히 했다. 주변 사람들이 “회장 비서실은 출세의 지름길인데 왜 마다하냐”며 한마디씩 던졌으나 자신의 길이 아니다고 생각했다. 기아차를 세계 각국에 팔아보겠다는 의욕에 가득 찼던 때였다. “그 때 비서실로 갔다면 자금의 나는 없었을 것입니다.” 백 대표의 자신에 찬 목소리다.

해외 영업에 뛰어들었다. “해외 영업을 통해 시장을 이해하고 개척하는 힘을 길렀다”는 게 그의 평가다.

백 대표는 수입차 업계에서 입지전적인 인물로 꼽힌다. 재규어 랜드로버 코리아를 제외하고 외국인 대표 이후 한국인이 대표로 발탁된 경우는 없다. 보통 법인 초기 출범 때는 한국인이 대표를 맡지만, 시장이 어느 정도 커지면 본사에서 대표가 내려온다. 백 대표는 이런 관행에 제동을 걸었다.

국산차에서 수입차로 넘어오는 데 10년이 걸렸다. 1997년 외환위기는 기아차를 덮쳤다. 기아차가 휘청이자 현대차 측 제안으로 1998년 현대정공으로 자리를 옮긴다.

▶“1년만 버티자”=그에게 최대 시련은 2000년 현대정공에서 재규어 랜드로버(당시 포드코리아 산하 사업부)로 전직하면서 찾아왔다. 기아차와 현대차에서 포드와 각각 진행했던 프로젝트가 인연이 돼 포드 쪽에서 같이 일해보자는 제의가 들어왔다.

백 대표는 해외경험으로 미뤄, 국내에서도 수입차의 잠재력이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당시 국내 수입차 연간 판매대수는 4000~5000대로, 전체 자동차 시장(100만대)의 0.4% 밖에 되지 않았다. 올 상반기 점유율 16.6%(11만9832대)와 비교하면 실로 미미한 수준이다.

백 대표가 포드에서 맡은 직책은 A/S총괄이사였다. 말이 총괄이사지 혼자서 모든 일을 처리해야 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는 ‘주경야독’의 하루하루가 이어졌다. 특히 기술 분야에서 애를 먹었다. A/S나 마케팅 쪽은 경험이 있었지만 자동차 기술은 문외한이나 다름 없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영국 본사와 연락하면서 밤을 꼬박 새우기 일쑤였다.

힘든 고비마다 ‘1년만 버티자’는 생각이 들었다. 지인은 물론 가족의 반대까지 무릅쓰고 결정한 전직이었다. 이대로 포기할 수 없다는 승부근성이 타올랐다. 이를 악물고 1년을 버티니 조금씩 적응이 되기 시작했다. 대기업에서 느낄 수 없는 희열도 맛봤다. 단순 잡무 스트레스가 아닌 고객에게 어떻게 답을 줄 것인가에 대한 본질적인 고민이었다.

아직도 12년 전 랜드로버의 오프로드 행사가 눈앞에 생생하다. 지금은 협력업체의 도움으로 시승행사를 진행하지만 당시 4명의 직원이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챙겨야 했다. 주말이면 전국을 돌아다니며 극한의 오프로드 코스를 찾아야 했다. 차에게서 든든한 오랜 벗 같은 느낌을 받은 것도 그때였다. 차와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다 보니 왠지 모를 신뢰감이 생겼다. “1년 버티자는 게 벌써 15년이 됐어요. 가장 힘든 결정이었지만 위기는 기회와 함께 오는 것 같아요.” 

▶‘질주’=재규어 랜드로버 코리아는 지난 15년간 급속도로 성장했다. 재규어 랜드로버의 연간 판매대수는 2003년 381대에서 2007년(1096대) 1000대 고지를 넘어서더니 2010년부터 해마다 1000대 이상씩 무섭게 성장했다. 2011년 2399대, 2012년 3113대, 2013년 5004대, 2014년 6664대로 가파른 상승곡선을 그렸다.

올 들어서는 지난 7월까지 5515대를 판매하며 1년 전보다 무려 60% 성장했다. 올 연말에는 1만대를 돌파할 수 있을 것으로 백 대표는 내다봤다.

“그동안 너무 못 판 것 아닙니까?” 백 대표는 “아니다. 신차 효과가 크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동안 약했거나 아예 없던 세그먼트 신차가 나오면서 판매량이 늘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지난 5월 출시된 프리미엄 컴팩트 SUV 디스커버리 스포츠다. 두달 만에 500대를 팔아 치웠다. 이전 모델이 1년간 판매한 양이다.

“가장 보람 있었던 때는 언제입니까?” “2007년 3월 처음으로 월 판매 100대를 넘어섰을 때와 올 3월 월 1000대를 돌파했을 때죠.”

영국 본사가 바라보는 한국시장의 위상도 올라갔다. 한국은 재규어 플래그십 세단 XJ가 세계에서 네 번째로 잘 팔리는 나라다. 프리미엄 SUV 레인지로버는 일본을 제치고 세계 8번째 시장이다. 이런 재규어 랜드로버 코리아의 판매성장은 영국 본사가 백 대표를 수장으로 발탁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됐다. 영국 본사는 지난해 12월 전임 대표 사임 후 5개월간 국내외 복수 후보를 검토한 끝에 백 대표를 최종 낙점했다.

백 대표는 “이전에도 여러 번 대표 후보가 될 기회가 있었지만 스스로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고 말했다. 백 대표는 “A/Sㆍ마케팅ㆍ세일즈ㆍ네트워크 등 자동차의 각 분야를 거친 것이 큰 힘이 됐다”며 “나 뿐만 아니라 한국팀이 전반적으로 잘했다”고 직원들에 공을 돌렸다. 

▶“차는 생명체”=25년간 앞만 보고 달려온 그에게 ‘아버지로서 어떠냐’고 물었다. 그에게는 고2, 중3 아들이 있다. 백 대표는 “아이들에게 아빠는 늘 바쁜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다”며 “특히 해외 출장으로 둘째를 낳을 때 곁에 있어주지 못한 아내에게도 두고두고 미안하다”고 말했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서일까. 백 대표는 주말에는 집중적으로 아이들과 함께 운동을 즐긴다. 그는 “아이들과 2년 전에는 사회인 야구팀에서 야구를 하기도 했다”며 “운동을 하면 땀도 나고 자연스럽게 스킨십도 돼 대화를 많이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둘째 녀석이 여자친구가 생겼다는 말을 엄마보다 나한테 먼저 했어요.” 아빠에게 아주 큰 기쁨으로 다가왔다.

백 대표는 다음주에도 영국 출장을 떠난다. 재규어 랜드로버는 2008년 포드에서 인도 타타자동차로 넘어갔지만 백 대표는 지금까지 한번도 인도출장을 간적이 없다. 인도 타타가 프리미엄 차량에 대한 전권을 영국 본사에 일임한 것이다. 국내에 들어오는 재규어 랜드로버 차량 전량도 영국산이다.
백 대표에 “차는 곧 생명체”라고 말한다. 달리고 멈추는 본질적인 기능은 변함없지만 디자인과 인포테인먼트, 커넥티드카 등 끊임없이 진화하기 때문이다. 그는 “인간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 자동차이고, 이 때문에 자동차는 사양산업이 될 수 없다”고 강조한다. 날마다 새벽 5시30분 출근길을 나서는 백 대표. 오늘 밤도 영국 본사와 회의 준비로 밤을 보낼지 모른다. 15년 전 그날처럼….

대담=조동석 산업섹션 자동차팀장

정리=천예선 기자/cheon@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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