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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패션을 만나다 ④] ‘오디너리피플’의 언오디너리(Unordinary) 디자인
-오디너리피플 장형철 디자이너


[헤럴드경제=김아미 기자] ‘오디너리피플(Ordinary People)’ 디자이너 장형철(31)을 만나기로 한 시간은 오후 3시. 그는 오지 않았다. 디자이너실 직원은 예정된 시간보다 1시간 가량 늦을 것 같다며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왔다. 잘 나가는 디자이너는 시간 개념도 없는 것인가. “이틀 후 오전 11시까지 헤럴드경제 본사로 오라”는 말을 남기고 자리를 떴다. 단단히 별렸다. 이 무례한 인터뷰이(Interviewee)를 혼내주겠다고.

디자이너 장형철의 첫인상은 ‘외모와 말투가 따로 노는 사람’이었다. 1대 9 가르마를 칼같이 잡은 ‘센’ 외모와는 달리 말투는 어리숙했다. 시간을 잘못 알고 있었다며 어쩔 줄 몰라하는 디자이너에게 “혼내주겠다”던 애초의 다짐은 금세 무너져버렸다.

미국 나이로는 만 서른살. 장형철은 최범석, 고태용에 이어 ‘뉴욕 최연소 진출’ 타이틀을 새롭게 얻은 디자이너다. ‘뉴욕 패션위크 멘즈 2016 S/S’가 열렸던 지난 7월 ‘컨셉코리아(문화체육관광부ㆍ한국콘텐츠진흥원 주관)’를 통해 뉴욕에 입성한 것. 아시아인으로서는 일본 디자이너 1명, 한국 디자이너 2명이 이 기간 뉴욕에서 무대를 가졌다. 
사진=안훈 기자/rosedale@heraldcorp.com

컨셉코리아는 신진 디자이너들에겐 높은 문턱이다. 심사가 까다롭다. 심사위원들은 한국과 해외 인사 반반으로 구성돼 있다. 경쟁하는 디자이너들도 쟁쟁하다. 이제 고작 4년차 디자이너인 장형철은 “단 1%도 합격을 예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뽑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라 쇼 준비조차 안하고 있었다”고.

그를 높게 평가한 것은 해외 심사위원들이었다. 사이먼 콜린스 파슨스패션스쿨 전 학장, 코즐로우스키 미국 패션디자인협회 부회장 등이 먼저 그를 알아봤다. 뉴욕 쇼가 끝난 후에도 호평이 이어졌다.

“스포티하면서도 스포티하지 않고, 클래식하면서도 뻔한 클래식이 아니다라는 평가를 들었어요. 그 안에서 동양적이면서 고급스러운 느낌도 묻어난다면서요. 처음이었어요. 내가 하고자 했던 것을 이렇게 정확히 캐치해서 평가하는 것을요.”

전문가들 눈에는 ‘스포티하면서도 스포티하지 않은’ 오디너리피플이지만, 비전문가의 눈에는 구분이 잘 되지 않는다. 특히 디자이너 고태용의 ‘비욘드클로젯’과 분위기가 겹친다. 예상대로, 그는 고태용과 인연이 깊다.

“고등학교 때까지 요리학원을 다니다가 군대를 갔는데 그때 막연하게 패션 쪽으로 나가볼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제대하고 신사동 가로수길에 있는 한 패턴실에서 과외를 받았는데 거기서 처음으로 고태용과 알게 됐어요. 이후 비욘드클로젯에서 4년 동안 팀장으로 있었어요. 직원이 저 하나밖에 없던 때부터죠.”

셰프 지망생이던 청년이 패션계에 입문하게 된 것도 고태용 때문이었고, 오디너리피플이라는 브랜드명을 갖게 된 것도 비욘드클로젯 때문이었다. 오디너리피플은 2010 S/S 비욘드클로젯의 테마였다. 이 컬렉션을 계기로 처음으로 자신만의 컬렉션을 꿈꾸게 됐다.

“나가지 말라”는 고태용 실장의 만류(?)를 뿌리치고 장형철은 2011년 3월 26일 오디너리피플을 런칭했다. 자본금 3000만원. 1000만원은 디자이너실 보증금으로 쓰고, 남은 2000만원으로 옷을 만들었다. 패션 편집숍 ‘에이랜드’ 4곳에 입점을 시켰는데 첫 달 매출이 1300만원. 홈페이지도, 직원 하나도 없이 편집숍에 행거 하나 걸어놓은 브랜드로서는 이례적인 기록이었다. 맨투맨 티셔츠 등 젊은 남성들이 좋아하는 디자인이 먹혔다.

시작부터 운이 좋은 것을 보니 부모님 ‘버퍼’가 있었겠다 싶다. 
사진=안훈 기자/rosedale@heraldcorp.com

“아버지는 헬리콥터 조종사였어요. 군인 집안에서 엄격하게 자랐죠. 어머니는 전업 주부시고요. 금전적 지원은 브랜드 런칭할 때 아버지 명의로 대출받은 것 외엔 없었어요. 하지만 심적으로는 전폭적인 지원을 해 주시죠. 저를 두고 재벌설, 게이설이 있더라고요. 패션 쪽에 저를 아는 사람이 없기 때문인 것 같아요. 제가 외부 노출을 거의 하지 않아서 그런 의혹들이 생긴 것 같은데, 저는 재벌도, 게이도 아닙니다.”

아침 10시에 출근해서 새벽 3~4시에 퇴근하는 일상을 반복하면서부터 여자친구는 꿈도 꾸지 못하는 중. 업계에 인맥도 학맥도 없는 이 젊은 디자이너는 오로지 일과 연애중이다.

술도 거의 입에 대지 않는다. 자기 관리도 철저하다. 고등학교 때까지 100㎏ 가까이 되던 체중을 군대 가기 전부터 빼기 시작해 현재 70㎏을 유지 중이다. 직접 피팅을 하기 때문이다. “내가 입고 싶은 옷을 만든다”는 신념 때문에 늘 적정 체중을 유지하려 애쓴다. 관리 비결은 축구다. 일주일에 3번 정도는 경기를 뛸 정도로 “축구를 어마어마하게 좋아한다”고.

군인집안 출신, 요리사, 축구광…. 패션과는 무관해보이는 스펙의 소유자가 패션에 인생을 걸게 된 이유를 물었다.

“어렸을 때는 어머니가 사다 주시는 옷을 입고 하라는 대로 하고 살았어요. 그러다가 스무살에 친구들과 함께 처음으로 쇼핑이란 걸 했죠. 시간 가는 줄, 다리 아픈 줄 모르겠더라고요. 가슴이 쿵쾅쿵쾅 뛰고 너무 재밌었어요. 컬렉션 준비를 할 때도 그 때처럼 늘 가슴이 뜁니다.”

가슴 뛰는 일을 따라 살고 있는 젊은 디자이너의 꿈이 당차다. “나 밖에 하지 못하는 디자인, 패션계에 한 획을 긋는 디자이너”다. 척박한 한국의 패션시장에서 오디너리피플의 언오디너리(Unordinary)한 디자인을 기대해본다.
amigo@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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