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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꽃 만발한 후궁 처소 낙선재, 1일 전격 공개
[헤럴드경제=박은혜 기자] 창덕궁 낙선재(樂善齋 보물 제1764호) 뒤뜰은 매화꽃, 앵두나무꽃, 꽃무릇 등 여러 가지 꽃들이 피고, 신선 사상을 엿볼 수 있는 괴석(기괴한 형상의 돌)이 즐비해, 참으로 아름답다.

이처럼 풍광이 사랑스럽기에, 남편을 먼저 떠나 보낸 대비, 정비에 밀린 후궁, 상중(喪中)인 왕후, 후궁의 소생 옹주 등이 기거했던 창덕궁 낙선재의 이야기를 접하노라면 가슴이 찡하다. 그간 여러가지 이유로 공개되지 않았는데, 오는 4월1일부터 개방된다니, 기대와 연민 두 마음이 벌써부터 그곳으로 달려간다.

문화재청에 따르면, ‘선을 즐거워한다’는 뜻의 낙선재는 원래 1847년 조선 제24대 임금인 헌종이 서재 겸 사랑채로 쓰려고 지었다고 한다.


‘역사저널 그날’이라는 TV토크쇼 좌장격인 신병주 건국대 사학과 교수도 “낙선재는 헌종이 한창 왕권강화를 시도하던 시기에 건립되었고 조선시대에는 창경궁 영역에 속해 있었는데, 지금은 창덕궁에서 관리를 맡고 있다”고 소개했다. 신 교수는 “단청을 칠하지 않았는데, ‘붉은 흙을 바르지 않음은 규모가 과도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고, 화려한 서까래를 놓지 않음은 소박함을 앞세우는 뜻을 보인 것’이라는 상량문(上樑文) 글귀로 미뤄 화려함을 쫓지 않고 소박함을 내세우고자 의도”라고 설명했다.

두산 백과는 실제 이 공간이 어떻게 사용됐는지를 중심으로 설명한다. ‘원래 상중(喪中)에 있는 왕후들이 소복(素服) 차림으로 기거하던 곳이며, 1963년 일본에서 돌아온 영친왕(英親王) 이은(李垠)이 이곳에서 사망하였다. 상중에 왕후들이 기거하던 곳이라 하여 단청(丹靑)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신 교수도 “헌종이 정조의 개혁과 부국강병 의지를 이어받기 위해 이 공간을 지었다"고 하면서도 "후궁인 경빈 김씨와 대왕대비 순원왕후가 살았으며, 마지막 황비 순정효황후, 황태자비 이방자 여사, 고종 황제의 외동딸 덕혜옹주 등 황실의 마지막 여인들이 여생을 보낸 곳"이라고 부연했다.


‘개혁안의 산실’이라는 낙선재의 취지는 후궁과 대왕대비의 거처로 기능하면서 점차 ‘뒷방’이지미가 덧씌워진 것으로 보인다. 정비가 아닌데 따른 박탈감, 남편을 떠나보낸 왕실의 독거노인, 어지러운 정세와 누란의 위기를 뒷방에서 걱정해야했던 왕실 여인네들이 아쉬움과 절제된 생활속에 여생을 보냈던 것이다.

신 교수에 따르면, 일제 침략후 낙선재에는 고종이 환감에 얻은 귀한 딸 덕혜옹주(1912~1989)가 머물렀다. 1925년 일제에 의하여 볼모로 끌려가 대마도 번주(藩主)의 아들인 소다케시(宗武志)와 강제 결혼하여 딸[宗正惠]을 낳았는데, 정신분열증으로 도쿄 인근의 병원에서 지내다가 1962년 귀국해 이곳에 기거했다는 것이다. 덕혜옹주가 귀국한 이듬해에 이방자(李方子:1901~1989) 여사도 귀국해 낙선재에서 여생을 보냈다. 이방자 여사는 영친왕 이은(李垠)의 부인으로 마지막 황태자비였다. 이방자 여사와 덕혜옹주는 각각 낙선재와 수강재에 머물면서, 서로 의지하며 지냈다. “낙선재에 오래오래 살고 싶어요. 전하 보고 싶습니다. 대한민국 우리나라.”라는 쪽지를 남겼던 덕혜옹주는 그러나 1989년 4월 21일 병세를 이기지 못하고 이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안타깝게도 이방자 여사도 덕혜옹주가 사망한지 열흘만에 눈을 감았다.

문화재청(청장 나선화)은 문화융성과 정부3.0 시대를 맞아 문화유산으로 국민의 행복한 삶에 이바지하고 문화유산 향유의 폭을 넓히기 위해, 그동안 관람객 안전사고 예방을 위해 공개하지 못했던 낙선재 뒤뜰을 올해 4월1일부터 개방한다고 26일 밝혔다.

창덕궁관리소는 지난해에도 인정전(임금이 조회하는 궁전) 내부를 개방해 관람객들의 호응을 얻은바 있다. 앞으로도 조사연구와 정비를 통해 더 많은 곳을 국민에게 개방할 계획이다.

/grac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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