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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취재X파일]철원평야 누비던 상황판단 빠른 남재준이었는데…
[헤럴드경제=홍성원 기자]약 20년 전 여름 강원도 철원. 억수같은 비가 퍼붓고 있었습니다. 당시 기자는 육군 6사단 산하 7연대에서 연대장 무전병으로 복무하고 있었습니다. 사단 예하 부대의 기동훈련 마지막 날로, 군용 지프의 천막을 거둔 상태여서 쏟아지는 비를 하염없이 맞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굽이치는 한탄강은 금방이라도 사람을 집어삼킬 듯 포효하며 흘렀고, 행군하는 병력도 모두 지쳐 사기는 떨어질대로 떨어진 상태였습니다. 속옷은 물론 군화까지 흠뻑 젖었고, 장대비는 안개도 아닌 것이 한 치 앞을 보기 힘들게 했습니다.

일개 사병으로서도 ‘아, 이대로 훈련을 하긴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바로 앞자리에 앉은 연대장은 요지부동이었습니다. 침묵의 빗속 행군이 얼마나 지났을까. 생소한 목소리가 무전기를 타고 느닷없이 날아들어 왔습니다.

“작전 종료” 귀를 의심했습니다. 다시 말해 달라는 뜻의 무전병 용어로 “재송?”이라고 했습니다. 또 한 번 “작전 종료, 부대 복귀”라고 힘있게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등병 때부터 전역할 때까지 연대장 무전병을 했던 기자로선 사단장의 목소리라는 걸 직감했습니다.

곧바로 연대장에게 이를 보고했고, 연대장과 사단장의 교신 뒤 병력들은 지시에 따라 원대복귀할 수 있었습니다. 사병이 사단장과 직접 교신을 했다는 뿌듯함은 접어두고라도 예정보다 일찍 작전 종료를 지시한 사단장의 상황 판단이 그렇게 고마울 수 없었습니다. 야전에서 지휘관의 결단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절감한 경험이었죠.

“작전 종료”를 지시한 사단장. 바로 현 남재준 국가정보원장입니다.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 증거위조 의혹으로 요즘 해임론 한복판에 서 있는 인물입니다. 위키피디아에 ‘남재준’을 쳐봤습니다. ‘취미는 등산으로 철책에서 지휘관을 거치면서 병사들과 철책을 걷는 게 좋아서였다고 한다’, ‘연대장 시절부터 병사들로부터 존경을 많이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참 군인’이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었던 남재준 원장에 대한 이같은 군인 시절 평가는 틀리지 않습니다. 앞서 소개한 훈련 조기 종료 지시 뿐만 아니라 사단장 남재준은 실제로 카리스마 있는 진정한 군인상을 보여준 걸 직접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철원의 철책을 지키는 사병들은 당시 주적(主敵) 개념도 확실히 갖고 있었습니다. 사단장, 연대장이 철책 순시를 하면 ‘한 놈 잡자’는 구호를 경례와 함께 할 정도였으니까요. 여기서 ‘한 놈’은 북한군을 의미하는 겁니다. 



이후 사단장 남재준은 2002년 4월, 한미연합사령부 부사령관이 되고 이듬해 4월엔 육군참모총장으로 최고의 자리에 오릅니다. 군 복무시절 잠시나마 상관이었던 인물인 데다 ‘무인(武人)’의 표본이라고 생각되는 인물의 승승장구에 마음 속으로 큰 박수를 치기도 했습니다. 기자가 훈련병 시절, 신병교육대를 찾아 ‘훈시 말씀’을 하던 검은 선글라스의 남재준 사단장 이미지는 아직도 잊을 수 없습니다.

현 정부 출범 후 그가 국가정보원장으로 취임했을 때부터 기자는 의아했습니다. 적임자일 수 있다는 판단과 함께 굳이 국정원장을 맡았어야 했나하는 아쉬움도 있었습니다. 그 자리를 거쳐간 인물들의 ‘끝’이 좋았던 적이 별로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려는 곧 현실이됐죠. 노무현 전 대통령 시절 있었던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공개를 남재준 국정원장은 감행했습니다. 국정원의 명예를 위해 공개하는 것이라는 설명이 뒤따랐습니다. 자의든 타의든 남재준 원장 스스로 정치의 한복판에 뛰어든 것입니다. 또 하나. 지난 대선에서 국정원 직원들의 선거 개입을 위한 인터넷 댓글 달기 작전(?)의 전모가 하나 둘 밝혀지며 남재준 원장은 또 곤욕을 치릅니다. 전 정부의 일이라고 해도 현 국정원 최고책임자로서 책임에서 빗겨 서 있을 순 없었죠. 이른바 ‘셀프 개혁’이라는 말로 남재준 원장은 국정원 개혁에 나섭니다. 박 대통령이 국정원 스스로 개혁안을 마련하라고 했기에 ‘셀프 개혁’의 정당성에 관한 언급은 하지 않겠습니다.

남재준 원장과 국정원의 시련은 끝난 게 아니었습니다.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 증거위조 의혹은 남재준 원장으로선 치명타가 아닐 수 없습니다. 검찰 수사가 진행 중이지만, 국정원이 ‘간첩 하나 잡았다’는 실적을 위해 각종 자료를 위조한 게 아니냐는 추론이 서서히 힘을 얻어 가는 형국입니다.

박근혜 대통령까지 나서 수사결과 문제가 나타나면 반드시 바로 잡을 것이라고 밝힌 뒤 검찰의 칼 끝은 점차 국정원 최고책임자까지 옥죄고 있는 모양새입니다. 정치권은 남재준 원장의 해임을 놓고 연일 왈가왈부 중입니다. 자칭 박심(朴心)을 잘 안다는 여권 인사들도 남재준 원장이 국정운영에 부담이 되고 있다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박 대통령의 신임이 각별했던 남재준 원장은 검찰 수사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자존심의 상처를 입지 않을 수 없게 됐습니다. 국정원의 핵심 임무 중 하나인 대공수사권을 경찰 등에 넘겨주는 상황까지 이르게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당사자는 침묵 중입니다. 진퇴를 결정할 때가 남재준 원장에게 닥쳤습니다. 해임이나 경질보다 스스로 거취를 결정하는 게 군인 출신으로서 명예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사단장 시절 철원평야에서의 추상같은 판단력이 20년이 흐른 뒤에도 작동할지 궁금하면서도 인생의 무상함을 느낍니다.

홍성원 기자/hongi@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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