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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화문 칼럼 - 이해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사회안전망
이해준 디지털본부장

“다수 사람들이 평생 처음으로 고용주가 일방적으로 결정해준 임금을 받아들일 필요 없이 독립적으로 협상을 할 수 있는 처지에서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기본소득이 있으므로 위험에 처할 염려가 없을 것입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불안을 날카롭게 파헤친 ‘위험사회’의 저자이자 유럽의 대표적 지성인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이 2006년말 타게슈피겔(Tagessfiegel)과의 인터뷰에서 한 말(녹색평론 135호 재인용)이다. 그는 당시 기독교민주당을 비롯해 독일에서 펼쳐진 기본소득 논쟁에 대해 “실업상태는 좌절이 아니라 축복”이라며 이같이 주장했다.

기본소득은 급격한 생산성 향상에도 불구하고 갈수록 일자리가 줄어들면서 높은 실업률이 지속되는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1980년대 중반부터 유럽을 중심으로 본격 논의되기 시작한 제도다. 연령이나 노동 여부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에게 일정한 소득을 제공함으로써 실존적 안전, 즉 생존을 위한 기초적 여건을 제공하자는 게 골자다.

그렇게 되면 누가 일을 하겠느냐는 지적에 울리히 벡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사람은 지금도 존재하지만 기본소득 때문에 그렇다는 인과관계는 없다며 “일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누구든지―대다수가 그렇겠지만―오늘날보다 더 자유롭고 더 자기결정적인 방식으로 일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저임금을 받는 궂은 일에 대해선 “반드시 해야 할 일이라면 급료가 올라갈 것입니다. 굶주림을 면할 정도의 임금을 받고는 누구도 일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겠죠”라고 말한다.

기본소득은 천문학적 액수의 돈이 들어가는 이상주의적인 구상이 아닐 수 없지만, 자본주의의 모순과 질곡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상상력의 산물이다. 유럽에서도 아직 실현되지 못했지만, 인문학적ㆍ사회학적 근거에 대한 연구와, 여기에 들어가는 재원으로 소득세를 이용할 것인가, 소비세를 이용할 것인가 하는 연구와 논쟁이 활발히 진행 중이다.

한국에서도 일부 경제학자들을 중심으로 기본소득 논의가 일고 있고, 이를 사회적 의제로 만들기 위한 단체도 활동 중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를 촉발시킨 것은 65세의 노인에게 일괄적으로 20만원의 기초연금을 지급하겠다는 박근혜 대통령의 공약이었다. 기초연금의 개념을 기본소득으로 확대해 획기적인 사회안정망을 구축하자는 주장이다.

아직은 시기상조지만, 이념과 정파를 떠나 이러한 논의를 진전시킬 필요가 있다. 한국을 포함한 자본주의 세계가 공통적으로 앓고 있는 문제를 사회공동체가 풀어보자는 차원에서, 인식의 전환과 현실적인 방안에 대한 연구가 필요한 것이다. 특히 한국에서는 시급한 사회안전망 구축 논의와 함께 진행할 필요가 있다. 어려운 사람 가운데 가장 어려운 사람을 구제할 수 있는 사회안전망, 사회구성원의 실존적 안전을 제공할 수 있는 긴급 대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최근 서울 송파구에서 생활고를 견디다 못해 세 모녀가 자살한 사건을 비롯해 자신의 처지를 비관한 사람들의 자살이 잇따르면서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다. 오늘날 한국사회의 최대 과제는 갈수록 치열해지는 경쟁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낙오된 사람들을 사회의 일원으로 포용하고, 재기의 희망을 줄 수 있는 안전망의 구축이다. 경제성장의 과실이 일부에게 집중되고, 거기서 탈락한 사람들이 나락으로 떨어진다면 불행한 사회로 남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국이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 중 자살률 최고라는 기록을 갖고 있는 것을 언제까지 방치할 것인가.

한국사회의 경제규모나 생산력 수준이 모든 국민에게 최소한의 생존 여건을 보장해줄 수 있음에도 이런 비극이 끊이지 않는다는 것은 그 구조에 중대한 결함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빈곤과 절망으로부터 해방시킬 탈출구가 필요하다. 6월 지방선거는 물론 정부, 정치권에서도 소외계층 문제를 최우선 순위에 올려야 하는 것이다.

/hj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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