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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데스크 칼럼 - 전창협> 치욕은 묻히지 않는다
묻는다고 잊힌다면 묻을 일이다. 하지만 치욕까지 매장되지 않는다. 묻으려 몸부림칠수록 치욕은 더욱더 선연하게 솟아오른다.

왼쪽에는 123층짜리 초고층빌딩이 올라가고 있다. 오른쪽 놀이동산에선 간단없는 즐거운 비명이 흘러나온다. 우연히 산책길에 마주친 ‘치욕의 그날’은 슈퍼타워와 놀이동산 중간에 우뚝 서 있었다.

1637년 음력 1월 30일. ‘그날’을 사관(史官)은 떨리는 붓끝으로 기록을 남겼다. 남한산성에서 49일 버티던 인조는 결국 성문을 나섰다. 신하들의 통곡을 뒤로 한 채 조선의 왕은 삼전도 앞에 다다른다. 대군을 이끌고 조선까지 달려온 청 태종은 말한다. “지난날의 일을 말하려 하면 길다. 용단을 내려 왔으니 다행스럽고 기쁘다”. “성은이 망극합니다”라는 말고 함께 인조는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렸다. 항복의식 도중 청 태종은 고기를 베어 개에게 던져줬다.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보다 더한 치욕이었다. 인조가 도성으로 향하자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를 버리고 가십니까”하며 울며 부르짖는 백성이 만명을 헤아렸다.

항복터에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ㆍ삼전도비)’가 세워졌다. “마른 뼈에 다시 살이 붙고 차가운 뿌리에 다시 봄이 오도다”며 청 황제의 공덕을 찬미해야 할 만큼 조선의 지도부는 무력했다. ‘북벌론’이 나왔지만 국제정치 역학상, 명분론에 기댄 현실감 없는 얘기일 뿐이었다. 청과 조선의 군신(君臣)관계는 이후 지속됐고 삼전도비도 굳건했다. 구한말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패한 1895년이 돼서야 고종은 삼전도비를 수장시켜 치욕을 지우려 했다. 하지만 1913년 일제는 다시 조선의 욕된 역사의 상징을 건져 내 조선의 치욕을 다시 지상으로 올려놓았다. 광복을 맞자 또다시 땅속에 묻었다. 하지만 1963년 홍수로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여러 차례 이전을 거듭하다 2010년 석촌호수 주변에 옮겨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김영삼정부 시절, 정부청사로 쓰였던 조선총독부 건물을 부셔버렸다. 속은 시원했지만, 일제시대의 치욕은 이벤트로 지워지지 않는다. ‘아베 정권’의 역사왜곡도 다를 바 없다. 감추고 싶은 사실을 묻어버리고, 심지어 왜곡까지 하고 있지만 그럴수록 일제의 만행은 생생하게 살아나고 있다.

며칠 전 헤럴드경제가 있는 광화문 근처에 보수단체 회원들이 ‘교학사 역사교과서’를 시민들에게 판매하는 모습을 목격했다. 역사논쟁인지, 소동인지 어떻게 규정해야 할지 모르지만 역사교과서 채택을 놓고 보수와 진보진영 간 설전은 여전하다. 보수단체들은 일부 교과서가 북한을 미화하고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서술하지 않았다고 비판하고 있다. 반대쪽에선 친일교과서라는 비난이 맞서고 있다.

새 학기가 시작됐다.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학교에 보급하려던 보수진영의 시도는 좌절됐다. 하지만 무엇이 됐듯, 후대에 자랑스러운 역사만을 기억시키려는 시도는 온당치 못하다. 묻는다고 묻히지 않기 때문이다. 묻을 힘이 있다면 치욕의 역사에서 교훈을 얻는 데 써야 할 것이다. 삼전도비가 오늘도 굳건한 이유이기도 하다.

전창협 디지털콘텐츠 편집장 jljj@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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