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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 최대의 아트펀드(APT:미술가연금신탁) 작품방출 개시..아트마켓 긴장
[헤럴드경제=이영란 선임기자] 얼마 전 해외 언론에선 다음과 같은 뉴스가 타전됐다. “APT 매물이 쏟아져 가격하락이 예고되고 있다. 이에 시장이 크게 동요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아파트(APT) 뉴스려니 하겠지만 아니다. 세계 최대 규모의 예술가 연금신탁이자, 아트펀드인 APT(the Artist Pension Trust:미술가연금신탁) 얘기다.

미국및 유럽을 기반으로 하는 이 거대 연금신탁이 올해로 출범 10주년을 맞아 보유 중인 작품(총 1만여점)을 방출하기 시작했다. 대형 미술신탁이 작품 방출을 선언하자 뉴욕및 유럽 미술시장은 긴장감에 휩싸여 있다. 특히 APT에 소속된 작가들(총 2000명)의 작품을 보유하고 있는 화랑과 수집가들은 우려의 눈길을 보내고 있다. APT가 수문을 활짝 열고, 보유작 판매에 나설 경우 자신들이 소장 중인 작품값이 떨어질 것은 불문가지이기 때문이다.

강렬하면서도 매혹적인 표현력으로 촉망받는 니르 호드의 인물화 ‘ ‘Broken Hearts’. 코카인 중독으로 사망한 팝스타를 그린 작품이다. 니르 호드는 예술가연금신탁(APT) 회원이다. [사진= 잭 샤인만 갤러리]

지난 2003년 발의돼 출범한 APT는 현대미술을 기반으로 하는 신탁이다. ‘재능있는 미술가들이 노후를 안정적으로 보낼 수 있게 하자’는 취지에서 만들어졌다. 지금 활동하는 작가 중 몇몇은 스타작가가 돼 큰 돈을 벌겠지만, 대부분은 그저 그런 작가로 남거나, 일부는 생계유지조차 힘들지 모른다. 이에 작가들이 힘을 합쳐 일종의 ‘예술 계(契)’를 조직함으로써 노후를 대비한다는 개념이 탄생했다. 현재는 엇비슷한 처지이지만 누군가는 크게 뜰 것이니, 20년간 매년 1점씩을 각자 신탁에 맡기고, 그 중 ‘뜬 작가 작품’의 매각대금(일부)을 적립해 수십년 후 사이좋게(?) 나눠쓰자는 취지다.

APT는 작품 매각대금 중 40%는 해당작가에게, 28%는 APT 운영비용으로 충당하고, 나머지 32%를 주주들인 참여작가들에게 (훗날) 분배한다는 구조다. 즉 APT에 가입한 작가는 본인 작품이 1점도 안팔리더라도 장차 배당금을 받을 수 있다. 이같은 구조에서 작업은 등한시한채 배당금만 기다리는 작가가 있을 수 있기에 APT는 ‘언제든지 소속작가를 퇴출시킬 수 있다’는 조항도 만들어놓았다.

니르 호드의 인물화 ’스테파니‘. ‘ ‘Broken Hearts’와 짝을 이루는 그림이다. 호드의 회화 작품은 수천달러선이지만, 경매에선 추정가를 훌쩍 뛰어넘으며 2만달러에 팔리기도 했다. [사진= 잭 샤인만 갤러리]

미국같은 자본주의 경제에선 능력있고, 일 잘하는 사람이 모든 걸 가져가는 ‘winner takes all(승자독식)’이 원칙이지만 이 신탁은 그렇지않다. 작품활동은 열심히 했지만 예술 트렌드를 잘 못타거나, 작품이 난해해 상품성이 없는 작가도 ‘노후를 보장’해주는 일종의 연금(pension)개념인 것이다. 단 작가들이 원한다해서 누구나 APT에 가입할 수 있는 건 아니다. 100여명의 전문가로 이뤄진 국제 큐레이터팀의 심사를 통과해야만 APT 회원이 될 수 있다.

한편 APT는 작품 거래시 화랑이나 경매사를 통하지 않고, 고객(개인컬렉터, 미술관 등)과 직거래한다는 원칙을 수립해놓고 있다. 이는 화랑및 경매사에게 지급해야 할 수수료를 아끼기 위해서다. 자신들이 만든 자회사와 웹사이트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작품판매를 할 수 있으니 화랑및 경매사와 굳이 손잡을 생각이 없다는 것이다. 

2012 아트 리뷰의 ‘세계 미술계 파워100’에 30위로 이름을 올린 리암 길릭(영국)의 공간 설치작품. 벽면의 텍스트와 화려한 입체작품 모두 그의 작업이다. 리암 길릭 역시 APT 회원이다. [사진= 에스터 쉬퍼 갤러리]

기업가 출신으로 APT의 공동설립자인 모티 시니버그 회장은 “우리는 장래가 촉망되는 작가 2000명을 회원으로 둔 세계 최대의 신탁으로, 현재 1만점의 작품을 보유 중이다. 회원이 된 작가가 매년 1점씩 작품을 내놓기 때문에 조만간 작품수가 4만여점으로 늘어날 것”이라고 밝혔다.

현재 APT에는 2013베니스비엔날레에 초대돼 압도적인 대작을 선보인 로베르토 코우치를 비롯해 리암 길릭, 니르 호드 등 실력파 작가들이 대거 가입돼 있다. 이 아트펀드는 작가들 자신이 투자자인 것이 특징으로, 그들은 돈 대신 작품을 기부하고 수십년 후 연금을 받게 된다. APT는 참여작가의 수를 더욱 늘리고, 아시아 작가까지 적극 포섭(?)한다는 계획이다.

이같은 확대책을 펼치기 위해서도 작품판매는 시급한 실정이다. 예산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APT는 전문스텝을 고용했으며, 작품을 전시하는 플랫폼도 구축했다. 이 플랫폼은 판매기능도 갖고 있어 벌써 구매가 이뤄지고 있다. 필립스경매 출신으로 APT 판매책임자인 브룩 헤즐턴은 “우리가 보유한 작품의 평균가치는 5000~1만달러(536만~1071만원)이며, 물론 이를 호가하는 작품도 많다. 1만여점의 총가치는 1억2000만달러(1285억원)이다. 향후 이 가치는 4~5배 이상 뛸 것으로 자신한다. 작가들의 면면과 잠재력이 탄탄하기 때문이다”고 했다.

영국인이면서 2009베니스비엔날레에서 독일관 대표작가로 참여했을 정도로 글로벌 무대를 누비고 있는 리암 길릭의 대표작 ‘X Pringle of Scotland’. 주문자의 공간에 따라 크기와 형태를 달리해 제작한다.

그러나 APT의 작품판매로 미술시장이 동요하자 시니버그 회장은 “우리는 보유작을 가급적 천천히, 조심스럽게 팔 것이다. 폭탄세일은 결코 하지않을 생각이다. 또 미술관에의 작품대여가 이따금 구매로 이어지기도 한다”고 밝혔다. APT측은 회원 아티스트들의 작품이 미술관에 들어가는 것을 가장 선호하고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도 화랑들은 ‘미술관에의 작품 판매 또한 화랑에서의 작품전을 통해 이뤄지는 게 가장 바람직한 경로’라고 맞서고 있다.

APT는 현재 5명의 자문위원을 두고 있다. 전 휘트니미술관장을 역임한 데이비드 로스, 모리미술관장을 역임한 데이비드 엘리옷, 씨티뱅크 출신의 메리 호에벨르, JP모건 출신의 마누엘 곤살레스가 그들로, 모두 미술계에서 명성이 높은 인사다.

APT가 보유한 작품은 전세계 비엔날레는 물론 뉴욕MoMA, 런던 테이트 모던, 허쉬혼 미술관 등 유명 미술관에 대여되고 있다. 전세계 비엔날레와 도쿠멘타(카셀), 마니페스타 등에 초대되기도 했다. 이 경우 APT는 무상(운송및 보험료, 100달러의 수수료는 별도)으로 작품을 빌려준다. 물론 미술관측이 작품을 구입하길 원할 경우 주저없이 OK사인을 내린다. 

2013베니스비엔날레에 압도적인 대작을 선보인 로베르토 코우치의 작품. 코우치 또한 예술가연금신탁(APT) 회원으로 선발된 실력파 아티스트이다.

왜냐면 이 신탁을 굴리기 위해선 작품판매가 ‘필수’이기 때문이다. 훗날 작가들에게 노후연금을 지급하기 위해서도 보유작을 적기(適期)에 판매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판매시점을 놓칠 경우 APT는 향후 존립이 힘들 게 뻔하다. 작품만 잔뜩 쌓아놓는다면 운용자금이며 연금은 어디서 충당한단 말인가. 더구나 올들어 설립 10주년도 됐으니 이제 슬슬 작품판매에 팔을 걷어부쳐도 된다는 명분도 생겼다.

이같은 소식에 아트마켓에는 전운이 감돌고 있다. 미술전문지인 아트뉴스페이퍼는 “APT의 작품 방출소식에 뉴욕의 갤러리와 경매사, 수집가들이 가격하락을 우려하며 긴장하고 있다”며 “APT 보유작품은 그 볼륨이 커서 아트마켓을 뒤흔들 것”이라고 분석했다. 뉴욕에서 딜러로 활동 중인 에드워드 윈클만은 “우리는 APT가 보유한 작품이 개인거래를 통하든, 경매를 통하든 시장에 쏟아져나올 경우 작품값 하락을 불러올 것으로 본다”고 전망했다 .

익명을 요구한 맨하탄의 한 갤러리스트는 “나는 내가 거래하는 작가들이 APT에 가입하는 걸 막았다. 그 펀드는 너무 많은 걸 가져간다”고 주장했다. 또다른 화랑주는 “APT는 궁극적으론 보유작을 모두 팔아야 하는 처지다. (조만간 작품수가 4만점이 된다는데) 이런 엄청난 양의 작품판매가 아트마켓에, 그리고 작가들에게 과연 도움이 될까? 어쩌면 아주 애매하거나, 난처한 결과를 초래할지 모른다”고 꼬집었다.

어쨌거나 APT는 올해를 기점으로 작품을 개인고객과 미술관에 본격적으로 판매한다. 사이먼 머레이&컴퍼니 등을 통해 아시아투자펀드와 손잡고 아시아시장 진출도 적극 추진 중이다.

문제는 이 신탁의 향후 항로가 어떨지 예측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아트마켓은 자고로 늘 변수가 많기 때문이다. 게다가 몇몇 아티스트들은 즉각적인 혜택을 누리고 싶어 한다. 20년간 작품을 매년 1점씩 밀어넣고, 경제적 혜택(연금 수령)은 수십년 후에나 누린다면 일부 작가들은 마냥 기다리기 힘들어 할지도 모른다. 게다가 APT의 작품 판매가 기존의 아트마켓에 부정적 영향을 끼친다면 이 신탁의 진로는 당초 계획처럼 순탄치 않을 수도 있다. 아트 비즈니스에 이골이 난 화랑과 경매사가 그저 손놓고 보고만 있진 않을테니 말이다.

yr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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