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시계
실시간 뉴스
  • <월요광장 - 정용덕> 국사 교과서 논쟁에 대한 소회
스펀지 같은 고교생들의 두뇌
편향된 교과서 주입 위험천만
자신이 만진 ‘코끼리’ 가 답인 양…
역사학자들의 열린 인식 아쉬워


전(前)근대에서 근대로 이행하면서 여러 가지 중요한 역사적 변화가 이뤄졌다. 이 가운데 시장과 국가(state), 그리고 시민사회 영역이 두드러지게 제도화된 점을 빼놓을 수 없다. 자본주의 시장이 발달하면서 개인 자유와 노동 생산성이 크게 증대됐다. 관료제 국가의 발전을 통해 외적(外賊)에 대한 방어와 내부의 질서유지가 강화됐다. 민주 시민사회의 성장은 시장과 국가의 경제력과 공권력의 남용을 억제하는 정치 연대와 참여를 신장시켰다.

이들은 각각 별개의 영역에서 서로 다른 원리에 의해 작동하면서 발전해왔다. 그러나 상호 간의 긴장과 협력도 동시에 이뤄졌다. 시장에서 창출되는 재화를 바탕으로 국가는 상비군과 관료제를 유지해왔다. 사유재산 보호와 기업 활동에 필수요건인 국방과 법질서 유지, 그리고 기업에 대한 각종 지원을 통해 국가는 시장의 발전을 도모해왔다. 원천적으로 실패하는 부분을 배태하고 있는 사회제도인 시장과 국가의 취약점을 시민사회가 사전에 탐색하고 경고하고 때로는 직접 메워주면서 발전을 도왔다. 이 세 영역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부실해지는 경우 그 나라는 위기에 봉착한다.

나라(country)별로, 그리고 시대별로 세 영역 간의 발전 경로와 비중 면에서 의미 있는 차이가 있다. 그러나 학자들이 서로 다른 이론적 시각을 적용하기 때문에 빚어지는 단지 서술상의 차이도 발생한다. 현실 정치와는 이해관계가 없는 순수한 학자들의 경우에도 그들은 사회라는 ‘코끼리’의 특정 부위를 만져보고 나름의 소감을 주장하는 한 무리의 ‘맹인’들과 다름 아니다. 더욱이 세 영역 가운데 어느 하나를 규범적으로 더 강조해 부각시키려고 한다면 역사적 사실에 대한 왜곡으로까지 확대될 수 있다.

개개인이 지향하는 이념에 따라 국가, 시장, 시민사회 영역 간의 상대적 비중이나 중요성에 대한 우선순위가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소위 ‘좌-우’니, ‘진보-보수’니 하는 현실 정치이데올로기의 잣대를 가지고 간단명료하게 구분하기란 쉽지 않다. 자본주의 국가의 소멸을 지향하면서 사회주의 혁명을 일으킨 레닌이 그 혁명의 성공을 위해 관료제 국가를 확대한 것, 시장의 중요성을 내세운 레이건이나 대처 같은 신우파 정치인들이 개인 자유의 신장을 위해서라도 국방과 법질서 유지를 위한 국가의 공권력을 강화한 것, 시민사회의 발전을 주창하는 비정부기구 리더들이 기업이나 국가의 지원에 의존하려고 하는 것 등이 좋은 예다.

제대로 된 대학(원)에선 어떤 특정의 한 가지 이론보다는 가급적 다양한 이론적 시각들을 학생들에게 소개함으로써 세상을 종합적으로 통찰하는 능력을 갖추도록 토론을 유도한다. 학생들이 단지 한 개의 개념적 ‘렌즈’를 끼고 그 렌즈에 잘 들어오는 사회 현상만 진실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신봉하는 편협한 시민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다양한 이론적 시각과 그 시각들을 적용해 분석한 사회 현상을 학습하되, 그 가운데 어느 한 시각을 개인적으로 더 선호하고 추종하는 학생들이 있을 수는 있다. 이 경우에 학생들이 자유로이 선택한 시각을 한 단계 더 심화시킬 수 있도록 격려하고 지원하는 것이 올바른 선생의 자세다.

성인이 된 대학(원)생들에게도 다양한 시각을 소개하고 종합하는 능력을 길러주려고 노력하는 상황이다. 아직 세상 이치에 대한 지식이 옅은, 그러나 한창 감수성이 높아서 마치 스펀지처럼 흡수력이 강한 두뇌를 지닌 고교생들로 하여금 특정의 편향된 시각의 교과서를 주입식으로 읽고 외워 쓰도록 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자신이 만져본 코끼리에 대한 인식이 극히 부분적인 것임을 겸허하게 인정하는 역사학자들이 둘러앉아 마음을 열고 토론을 통해 부디 균형 잡힌 교과서를 펴내주기를 바라는 이유다.
맞춤 정보
    당신을 위한 추천 정보
      많이 본 정보
      오늘의 인기정보
        이슈 & 토픽
          비즈 링크